116화.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다(11)
황실은 로이안 후작가의 눈치를 살피는 중이었다.
알렉산드로가 엘라사나에게 결과적으로 결혼 사기를 쳐 버린 셈이었으니까.
그런데 하필 이 시점에서 아그네스가 또 사고를 치다니!
그 소식이 얼마나 황실에 치명적이었든지, 선황까지도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아그네스의 궁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했다.
아그네스의 사고는 이번에도 황실에 치명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실에서는 모든 귀족의 무기 반입이 금지되었다.
그것은 황족을 위함이기도 했지만, 그 이면에 황궁에서 귀족들에게 위해가 가해질 일이 일어날 리 없다는 약속이 포함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아그네스가 그 암묵적인 약속을 처참하게 깨트린 것이다.
그래서 오벨리아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엘라사나를 괜히 아그네스의 쪽으로 보냈다고 후회했다.
오벨리아가 그런 마음으로 엘라사나에게 도착했을 때, 엘라사나는 급히 황후궁의 다른 방으로 옮겨져 치료받고 있었다.
“로이안 영애……! 괜찮아요?”
오벨리아는 치료 받고 있는 엘라사나를 보며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귀족 영애의 몸에 상처가 나는 것은 여러모로 치명적인 일이었다.
작게는 결혼에서부터 크게는 사교계에 진출하는 일까지 모두 영향을 끼쳤기에 귀족 영애들은 몸에 흉을 남기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썼다.
그런데 현재 엘라사나의 눈썹 바로 위쪽에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상처가 나 있었다!
“이게 무슨…….”
오벨리아가 드물게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엘라사나는 현재 미혼이 아니던가.
그런 이가 얼굴에 상처가 났으니 크게 상심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다들 잠시 나가 주시겠어요? 대공비 전하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어요.”
오벨리아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자, 치료받고 있던 엘라사나가 덤덤히 황궁의와 시녀들에게 말했다.
오벨리아를 제외한 모두가 방에서 나가고 나자, 엘라사나가 담담히 말했다.
엘라사나의 분위기가 이전과 다르게 기묘하게 차분했다.
“그렇게 죄책감 어린 표정 짓지 않으셔도 돼요, 대공비 전하.”
유리 조각의 단면이 상당히 거칠었고, 아그네스는 참도 망설임 하나 없이 유리 조각을 휘둘렀다.
그 탓에 필연적으로 엘라사나의 얼굴에는 흉터가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도 그것을 모르지 않을 터였다.
그렇지만 정말로 엘라사나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렇지만, 로이안 영애…….”
“정말로, 그러실 필요 없어요.”
오벨리아가 여전히 미안함에 머뭇거리자, 엘라사나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오히려 흉터가 생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오벨리아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엘라사나는 황후가 되려던 사람이다.
그런 이에게는 흉터 하나도 큰 흠결이 된다.
황족은 귀족들의 위에 서는 만큼, 티 하나 없이 완전무결해야 한다고 여기는 이들이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저는 이왕 해야 하는 결혼이라면 황후가 되려고 했어요.”
엘라사나가 담담하게 설명을 들어놓았다.
“원한 적도 없는 결혼에서 뭐라도 얻고 싶은 건 당연하잖아요.”
엘라사나의 말에 오벨리아는 조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벨리아는 철저히 귀족적으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귀족 간의 결혼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오벨리아가 알렉산드로를 향한 열렬한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지만, 결국 그것은 알렉산드로가 아무리 별 볼 일 없는 황자였어도 어쨌든 비슷한 신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벨리아는 늘 자신이 귀족으로서 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피하지 않았다.
결혼도 그 중 일환이라고 생각하는 그녀에게 엘라사나의 말은 단언컨대 놀라운 것이었다.
“단 한 번도 저 같은 생각은 해 본 적 없으시다는 표정이시네요.”
엘라사나가 조금 웃었다.
그녀는 후련한 얼굴이었다.
“저, 여자를 좋아해요. 정확한 내용은 황제 폐하께 비밀이지만…… 폐하를 사랑할 일이 없을 거라고만 말씀드렸어요. 그래서 저를 황후로 들이려고 하셨던 거예요.”
엘라사나로서는 처음 하는 고해성사였다.
“폐하와 잠자리를 원하지 않는다고도 말했고… 그래서 아그네스 이멜리언의 아이도 제 양자로 기꺼이 받아들일 생각이었죠.”
“아그네스 이멜리언을 싫어하던 게 아니었나요?”
오벨리아가 의아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엘라사나가 그간 얼마나 사교계에서 아그네스를 적대했던가?
그런데 아그네스의 아이를 제 친자식으로 만들 생각을 했다니.
오벨리아는 오직 그게 놀라웠다.
“아이는 죄가 없으니까요. 어른이 아이를 미워하면 안 되죠. 그보다…… 제가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데, 그거보다 다른 것에 더 놀라시네요.”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다는데, 놀라울 게 있나요?”
오벨리아는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엘라사나의 말에 반문했다.
엘라사나가 또 웃었다.
마치, 오벨리아가 이런 반응을 보일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왜 놀랍지 않으신데요?”
“사람마다 성격이나 성향이 다 똑같지도 않은데, 어떻게 사람마다 다 똑같은 성별을 좋아하겠어요? 그냥 다들, 결혼이 필요하니까 묻고 사는 것뿐이죠.”
실제로 오벨리아는 합의하에 각자 동성의 연인을 따로 두고 사는 귀족 부부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그들을 특이하게 여긴 적이 없었다.
오벨리아에게는 그저, 사랑하는 상대와 결혼할 수 없는 조금 안타까운 이들이었을 뿐이다.
귀족들에게 사랑은 부차적인 문제였으니까.
알렉산드로가 어떤 인간이었든, 오벨리아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와 결혼할 수 있었던 게 귀족으로서 대단한 행운이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오벨리아는 그 주제에 그들의 사랑을 유별나게 여긴다는 건 도리어 그게 더 이상하고 무례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자 이번에는 엘라사나가 울듯이 웃었다.
“역시…… 오벨리아 님이신 거죠?”
엘라사나가 확인하듯 물었다.
오벨리아가 겨우 머리색 하나만을 바꾸고 다시 수도의 사교계에 등장했을 때, 많은 이들이 그녀의 정체를 의심했다.
그저 다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여겨 누구도 제대로 말을 못 꺼냈을 뿐이었다.
게다가 아그네스와 모종의 관계를 형성하기는 했으나 어쨌든 아내인 오벨리아에게 그토록 잘했던 알렉산드로가 아니던가.
그런 황제도 오벨리아를 아는 척하지 않고, 본인도 오벨리아 카테리안느가 아니라는데, 다른 이들이 그런 그녀를 두고 오벨리아 카테리안느가 아니냐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엘라사나도 그중 하나였다.
아니, 정확히는 오벨리아가 그 오벨리아길 바랐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예전에…… 리스트로 자작 영식이 사교계에서 모욕당할 뻔했을 때도, 오벨리아 님은 이런 반응이셨잖아요.”
리스트로 자작 영식의 연인은 그와 같은 성별이었다.
연인과의 밀회 중, 그 사실이 질 나쁜 자들에 의해 까발려졌다.
제국에서는 아직까지 이성 간의 사랑이 주류를 이뤘다.
다수는 종종 저희에게 낯선 소수의 부류를 이상한 쪽으로 몰아가는 습성이 있었다.
자칫하면 리스트로 자작 영식은 그날 크게 난감해졌을 터였다.
‘남의 사생활을 엿보다니. 부끄러운 줄 아시오, 칸카르디아 백작.’
그때, 오벨리아는 오로지 칸카르디아 백작의 무리만을 책했다.
황태자비인 그녀의 책망에 백작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파티장을 떠났다.
그 후 오벨리아는 리스트로 자작 영식을 정말로 딱 평소처럼만 대했다.
그날은 아카데미를 막 졸업한 재능 있는 신예 귀족들을 치하하는 자리이기도 했는데, 심지어 그녀는 다른 신예들에게도 그러했듯이 리스트로 자작 영식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자랑스러운 제국의 인재를 길러내었다며, 그 자리에 참석한 부모 되는 귀족들에게 치하의 의미로 작은 선물을 하기도 했다.
무려 횡태자비가, 그 오벨리아 카테리안느가 이상하다 여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여긴 일이었다.
게다가 오벨리아는 각각 누군가를 사랑하든 전혀 개의치 않았고, 여전히 모두를 똑같이 자랑스러운 제국의 인재로 여겼다.
그런 상황에서 리스트로 자작 부부가 제 아들을 부끄러워할 수도 없었고, 누군가 자작 영식이 어떤 성별을 사랑하느냐로 트집을 잡을 수도 없었다.
엘라사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오벨리아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날의 일은 엘라사나에게 구원이었다.
“사실, 황후가 돼서…… 황제 폐하가 그토록 싫어하는 권력도 나눠 갖고,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아그네스 이멜리언에게서 황손을 낳았기에 가질 수 있는 권력도 뺏으려고 했어요.”
아내의 사촌 자매를 탐한 황제.
길거리를 헤매던 떠돌이를 구해 줬더니 은인을 배신한 아그네스 이멜리언.
엘라사나는 그런 이들이 권력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진짜로 권력을 가져야 할 사람은, 오벨리아 같은 사람이었다.
권력은 그것을 가진 사람의 말을 평범한 이의 말보다 더욱 귀 기울여 듣게 하니까.
부도덕한 이들이 하는 말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엘라사나는 알렉산드로가 하는 대부분의 요구를 들어줄 것처럼 굴었다.
황제와 아그네스에게서 그들이 독점할 권력을 빼앗기 위해서.
평생 자신을 숨기고 산 그녀에게 그쯤이야 전혀 어려울 게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황후가 되지 못할 테니 그럴 방법도 사라졌고…… 무엇보다, 오벨리아 님은 언제나 그렇듯이 스스로 잘하고 계셨네요.”
엘라사나가 오벨리아를 향해 웃었다.
오벨리아도 겨우 머리색을 바꾸고 돌아왔을 뿐이니, 자신을 알아볼 이들이 생기리라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을 이런 식으로 기억해 줄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것이 오벨리아의 기분을 새삼스럽게 했다.
그녀는 그때, 자신이 당연한 일을 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는 이제 제 길을 가려고요.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오히려, 이 상처 때문에…… 부모님께서 쓸데없는 욕심을 버리실 테니까요.”
엘라사나는 무언가 굳게 마음먹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단단하고 결연한 두 눈으로 오벨리아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제게 전혀 미안해하지 마시고, 이번 일이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이용하세요. 저는 오벨리아 님이 그렇게 해 주시면 좋겠어요.”
엘라사나는 한 치의 의심 없이 오벨리아를 믿고 있었다.
그 믿음이 가득한 두 눈을 마주하며 침묵하고 있던 오벨리아가 생각 끝에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로이안 영애, 혹시 한번만 더 아그네스의 시중을 들어줄 수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