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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117화 (117/136)

117화.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다(12)

건국제가 코앞으로 다가왔고, 알렉산드로는 마침내 네 곳의 영지를 모두 시찰한 뒤에 돌아왔다.

그런 그가 황궁에 돌아와서 가장 먼저 들은 소식은 아그네스가 엘라사나의 얼굴을 유리 조각으로 그어 놨다는 것이었다.

쾅!

“너 진짜 미친 거야!”

그리하여 알렉산드로는 또다시 분노하며 곧바로 아그네스의 방으로 쳐들어갔다.

어차피 그녀는 곧 황궁을 나갈 예정이었으니, 이제 더는 참을 것도, 거리낄 것도 없어 화를 내기도 쉬웠다.

“대체 너 때문에 황실이 또 물어줘야 할 배상금이 얼마인지 알아!”

알렉산드로가 아그네스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녀의 눈앞에 서류를 던지며 소리쳤다.

아그네스의 매관매직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거나, 정당한 관료 시험을 보고도 관직에 오르지 못한 자들에 대한 지원과 보상금.

황후가 대공비를 모함한 것에 대하여 힐켄테데에서 청구한 정신적, 사회적 위자료.

그리고 이번에 로이안 후작가에서 귀족들의 무기는 빼앗은 주제에, 귀족을 위험에 노출시킨 황실을 고소한 것을 무마하는 데 든 비용까지.

황실의 국고가 쭉쭉 빠져나가고 있었다.

알렉산드로는 이 모든 것이 아그네스의 탓이라 여겼고, 그래서 속에서 천불이 났다.

“시끄러워! 그년이 자꾸 내 성질을 긁는데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그러나 아그네스는 그런 알렉산드로의 고함에도 꿈쩍하지조차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배가 너무 크게 부풀어 움직이기 힘들다는 이유로 황제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침대 위에서 일어나지조차 않았다.

“애초에 알렉산드로, 네가 오벨리아의 손아귀에 날 던져 놓고 가지만 않았더라도 내가 엘라사나 그깟 것한테 그 수모를 당했겠어?!”

아그네스의 기준으로, 엘라사나는 사람을 우아하게 짓밟는 재주가 있었다.

엘라사나는 폭력 하나 쓰지 않고 오로지 말로써 내내 아그네스의 자존심을 짓밟아 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라사나는 내내 품위를 잃지 않아서, 아그네스는 그 앞에서 천둥벌거숭이가 되고는 했다.

그것이 아그네스로서는 자존심이 상해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었다.

“로이안 후작 영애가 널 때린 것도 아니고, 네 건국제 준비를 제대로 돕지 않은 것도 아니라며! 공식적으로 로이안 후작 영애에게 어떤 잘못이 없는데 당했다면 네가 한심한 탓이지!”

알렉산드로가 노골적으로 아그네스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간의 서류를 살펴본 결과 엘라사나가 아그네스와 사적인 대화를 해 알 수 없는 내용을 제외한다면, 공식적으로 엘라사나는 황후에게 지극히 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오히려 엘라사나가 아그네스를 위해 챙긴 것들은 유폐당한 황후에게 쏟아붓기에는 과분했다.

그리고 그게 아그네스가 엘라사나에게 더 열받아 한 점이었다.

겉으로는 늘 완벽한 주제에, 끝에 가서는 아그네스를 비꼬고 비웃었으니까.

그리하여 알렉산드로의 말에 울컥한 아그네스가 따지려던 찰나, 이번에도 알렉산드로가 먼저 말로 선수를 쳤다.

“너, 진짜 일국의 왕녀였던 것 맞아? 아무리 힘없는 왕녀였고, 제국과 왕국의 예법이 다르다지만 이렇게까지 수준 차이가 날 일인지 모르겠는데?”

알렉산드로의 입에서 의심을 가득 품은 말이 흘러나왔다.

순간, 아그네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맞아! 왕녀 맞다니까?! 그때 내가 가지고 있던 왕녀의 인장을 봤잖아!”

아그네스가 괜스레 더욱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가 알렉산드로를 만났던 당시,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은 진짜로 왕녀의 것이었다.

다만 훔쳐 왔을 뿐.

그러나 아그네스가 본래 살던 왕국에 왕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들킬 일도 없었고.

그렇게 생각하자, 아그네스는 더욱 뻔뻔하게 굴 수 있었다.

“의심 가면 다시 한번 인장을 검사해 보든가!”

당당한 아그네스의 말에 알렉산드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인장은 이미 전에 검사를 해 본 터였다.

이제는 사라진 왕국의 장인만이 만들 수 있다는 정교한 문양은 가짜가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왕녀라고 다 고귀한 것은 아닌 모양이지.”

알렉산드로가 목소리를 낮출 생각도 하지 않고 쯧쯧 혀를 찼다.

그러자 아그네스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제국의 황자라고 해서 다 고귀한 놈도 아닌데, 왕국의 왕녀라고 해서 다 고귀하란 법 있어?”

그 누가 들어도 알렉산드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가 순간 이를 악물었다.

“말조심해. 황제를 모독하는 건 즉결 처형도 가능한 범죄야.”

“그래서? 네 아이를 가진 나를, 아이를 품은 채로 가져다 버리기라도 하게?”

그러나 아그네스에게서 돌아오는 것은 빈정거림뿐이었다.

아그네스와의 대화에서 화만 얻었을 뿐, 본전도 찾지 못한 알렉산드로가 홱 돌아섰다.

그가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로이안 후작 영애가 계속 네 시녀 역할을 하고 싶다더군.”

“뭐?! 난 싫어……!”

아그네스가 알렉산드로를 붙잡기 위하여 팔을 뻗었다.

탁!

그가 그녀의 손을 온 방이 울리도록 거세게 쳐냈다.

“네가 싫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아! 넌 앞으로 닥치고 로이안 영애가 화풀이하면 하는 대로 받아들이도록 해!”

알렉산드로도 엘라사나가 다시 아그네스의 시녀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데에는 받은 일을 되갚아 주려는 것밖에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그의 의사를 알아들은 아그네스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나, 네 아이를 임신한 상태야! 스트레스 받으면 네 아이한테도 안 좋다고, 이 개자식아!”

무거운 몸을 겨우 움직여 자신을 쫓아 나오려는 아그네스를 무시한 채, 알렉산드로가 방문을 닫으며 말했다.

“알 게 뭐야, 어차피 정식 후계자도 되지 못할 텐데.”

“뭐……?”

아그네스는 이번에야말로 알렉산드로의 말에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가 제 핏줄만큼은 끔찍이 아낀다고 생각했다.

그런 알렉산드로에게서 흘러나온 발언은 아그네스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의 발언은 마치, 아이가 더는 제 황위를 튼튼하게 해 주지 못할 터이니 이용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쾅. 찰그락.

그리고 아그네스가 그렇게 넋을 놓은 사이, 그녀의 방문은 또다시 밖에서 굳게 잠겼다.

쇠사슬을 방문 손잡이에 칭칭 동여매는 소리가 선명했다.

“열어! 열라고! 너! 이 개자식아……!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쾅! 쾅! 쾅!

아그네스는 자신이 임산부의 몸인 것도 잊은 것처럼 마구잡이로 잠긴 문을 두들겼다.

그러나 이미 닫힌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아아아악! 알렉산드로!”

아그네스가 알렉산드로의 이름을 저주하듯 소리쳤다.

그녀는 뒤늦게야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오벨리아가 알렉산드로의 아이를 유산했을 때, 그는 그 점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적을 처리했다는 사실을.

아그네스는 알렉산드로와 자신은 진정으로 사랑하니 그사이에 태어난 아이만큼은 다르리라 생각했으나…… 결국 오늘날, 그것이 오만이었음이 증명된 셈이었다.

***

건국제의 첫날, 사신들을 환영하는 연회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알렉산드로는 오벨리아의 능력이 뛰어남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녀가 준비한 연회장과 음식, 사신들이 자리하는 위치, 식의 순서 등등 그 모든 것에서 부족한 점 따위는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론체스터 제국의 건국일을 축하하여 테리나프 왕국에서 드리는 선물이옵니다.”

사신들이 차례차례 연회장의 가운데로 나와 알렉산드로의 앞에 진상품을 올렸다.

오벨리아가 시종들과 시녀들조차 이런 일에 유능한 자들로 완벽히 배치해 놓은 덕에 그 수많은 진상품이 분류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모든 사절단이 인사를 끝내고 제국의 귀족들이 진상품을 올릴 차례였다.

“제국의 달, 황후 폐하께서 드십니다!”

문지기가 아그네스의 등장을 알려왔다.

알렉산드로가 순간적으로 표정을 굳혔다.

오늘, 아그네스가 오벨리아를 처리해 주겠다고 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토록 완벽한 날에 피를 봐야만 하는가?

알렉산드로는 순간 고민했다.

그의 시선이 에크하르트와 나란히 서 있는 오벨리아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능력은 죽어 사라지기에는 지나치게 아까웠다.

‘황후의 자리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능력이 아닌가.’

알렉산드로는 오벨리아를 보며 생각했다.

오늘은 건국제의 첫날일 뿐이지만, 건국제가 성공적일 것은 이미 오벨리아가 정리해 놓은 서류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는 돌연 그녀를 죽이기가 아까워졌다.

“폐하,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어느덧 알렉산드로의 옆으로 온 아그네스가 황후의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오벨리아에게 내내 꽂혀 있던 알렉산드로의 시선이 그제야 아그네스에게로 향했다.

알렉산드로가 돌연, 아그네스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했다.

“아그네스.”

“……예, 폐하.”

아그네스가 흠칫했다.

그녀의 두 눈에 의심이 깃들었다.

알렉산드로가 갑자기 왜 태도를 뒤바뀌었는지, 서로의 밑바닥을 겪은 아그네스는 이제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건 말건, 그가 고갯짓으로 에크하르트를 가리켰다.

“오벨리아가 아니라, 에크하르트 힐켄테데를 죽여. 오벨리아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어.”

알렉산드로의 두 눈에 오벨리아를 향한 탐욕이 넘실거렸다.

에크하르트 힐켄테데만 없어지면, 오벨리아는 또다시 결혼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제 오벨리아는 힐켄테데의 딸이라는 위치까지 가지고 있었으니, 잘하면 카테리안느와 힐켄테데 그 두 권력을 제 손에 넣을 수 있는 셈이었다.

알렉산드로의 머릿속에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그 탐욕 어린 얼굴을 아그네스가 경멸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나 아그네스는 어쩐 일인지, 쉬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렇게 하지요.”

그동안 귀족들이 진상품을 바칠 준비가 모두 끝났다.

가장 먼저 앞으로 나온 것은 직위가 제일 높은 힐켄테데였다.

에크하르트가 진상품을 바치고 물러나려던 찰나였다.

“힐켄테데 대공, 그대에게 술을 한 잔 내리고 싶은데…… 괜찮지?”

아그네스가 알렉산드로의 말대로, 에크하르트를 노리는 듯 그를 호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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