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다(13)
독을 탔을 때, 가장 티나지 않을 것을 고르라면 술이었다.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핑계를 대어 술을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제가 몸이 좋지 않아 의원이 한동안 술은 삼가는 게 좋다더군요.”
솔직히 아무리 봐도 건장해 보이는 그가 몸이 좋지 않다니 너무 뻔한 핑계였으나, 힐켄테데 대공이 그렇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의외로 아그네스는 그것을 얌전히 받아들였다.
두 번 붙잡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물리는 그녀의 행동에 알렉산드로가 어이없다는 듯이 홱 아그네스를 노려봤다.
그러나 아그네스는 그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모르는 척했다.
“아그네스……!”
알렉산드로가 이를 악문 채 목소리를 낮춰 아그네스를 채근했다.
“기다리세요, 황제 폐하.”
그러나 아그네스는 태평하게 제 손톱이나 고르고 있을 따름이었다.
알렉산드로는 이를 갈았으나, 오벨리아를 해치우겠다며 준비한 물건은 아그네스의 손에 있었다.
그러니 그로서는 아그네스를 채근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결국 선물을 진상하는 시간은 그렇게 지나갔다.
다음으로 황제와 황후가 첫 춤을 춰 플로어를 장식할 때까지도, 아그네스는 상황을 마치 방관자처럼 지켜보기만 했다.
“너, 에크하르트를 처리할 생각이 있는 거야?”
춤을 추기 위해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는 두 손을 맞잡은 채였다.
임신으로 인해 그녀의 몸이 무거웠기 때문에, 춤곡은 매우 느렸다.
그러나 그는 곡이 시작되자마자 그 손에 힘을 주어 배려없이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징징거리지 말고 보채지 좀 마. 내가 처리해 준다고 하잖아.”
아그네스가 알렉산드로를 향해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느 순간부터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만 마주 보아도 열 받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그 표정 하나에 쉽게 울컥했다.
“징징거려? 내가 보채? 네가 언제 일을 제대로 처리한 적이 있어야 너를 믿고 가만히 있을 거 아니야!”
알렉산드로가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로 말을 짓씹었다.
그의 음성에 짜증이 그득그득했다.
아그네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진짜, 이런 찌질한 남자를 뭐가 좋다고…….”
그녀의 입에서 노골적으로 알렉산드로를 한심하게 여기는 말이 흘러나왔다.
“뭐?!”
순간 알렉산드로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황제와 황후의 춤을 지켜보던 귀족들이 놀라 알렉산드로에게로 시선을 집중할 정도였다.
그 시선을 느낀 그가 이를 악물며 황급히 입꼬리를 억지로 올렸다.
적어도, 건국제에서 황제와 황후의 불화를 대놓고 알릴 수는 없었다.
“그럼 네가 다음 춤 타임에 오벨리아 좀 붙잡고 있던가.”
알렉산드로의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보며 쯧쯧 혀를 찬 아그네스가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의 쪽을 고갯짓했다.
“힐켄테데 대공이랑 오벨리아가 좀 떨어져 있어야 내가 뭘 해도 할 거 아니야?”
현재,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의 곁을 떠나지 않고 마치 충성스러운 맹견처럼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저렇게 경계가 높아서는 그에게든, 그녀에게든 무슨 짓을 하기가 어려웠다.
“다음 곡이 나올 때, 네가 춤 신청이라도 해.”
오늘따라 아그네스는 기묘하게 침착해 보였다.
알렉산드로는 그런 그녀를 잠시 낯선 눈으로 쳐다보았다.
보통 그가 짜증을 부리면, 더한 짜증을 부리는 게 아그네스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오늘은 시종일관 무슨 말을 해도 차분한 것이 전혀 아그네스 같지 않고 다른 사람 같았다.
“……너, 무슨 꿍꿍이야?”
알렉산드로가 찜찜함에 아그네스를 추궁했다.
한순간에 전혀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구는 그녀의 모습이 여간 찜찜한 게 아니었다.
“하기 싫으면 말든가.”
그러나 아그네스는 알렉산드로의 질문에 제대로 대꾸도 해 주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는 이 상황에 대하여 전혀 아쉬움이 없다는 것처럼 굴었다.
알렉산드로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그네스의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지금 당장 에크하르트를 처리할 방법은 그녀뿐이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아그네스의 말을 듣는 수밖에.
“……알았으니, 힐켄테데 대공은 똑바로 처리해.”
결국, 알렉산드로는 한 번 더 아그네스를 닦달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너나 똑바로 해.”
물론, 그 닦달에 대하여 아그네스에게서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뿐이었지만.
***
아그네스와 대화를 나눈 대로, 알렉산드로는 다음 곡에 오벨리아에게 다가가 춤을 신청했다.
“대공비, 나와 한 곡 추지.”
“영광입니다, 황제 폐하.”
핑계를 대어 거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오벨리아는 알렉산드로의 춤 신청을 깔끔하게 받아들였다.
아그네스에게 등 떠밀려서 한 춤 신청이기는 했지만, 그는 이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여겨졌다.
그렇지 않아도 오벨리아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기 때문이다.
“오벨리아, 아직도 내게 복수하고 싶어?”
곡이 흐르는 플로어에서 알렉산드로와 오벨리아는 익숙하게 발을 맞추었다.
황태자 부부로서 두 사람이 함께 춤을 춘 시간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니 그쯤이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너 같으면 가만히 넘어가고 싶겠어?”
알렉산드로가 제멋대로 먼저 말을 편하게 했기에, 오벨리아도 굳이 그에게 경어를 쓰지 않았다.
어차피 춤은 그러라고 추는 거였다.
플로어에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곡의 소리가 워낙 컸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춤을 추면서 딱 달라붙어 있는 두 사람이 아니면 서로의 말을 알아듣기 힘들었으니까.
“내가 너한테 다시 황후 자리를 준다고 해도?”
알렉산드로가 대뜸 말을 꺼냈다.
순간, 오벨리아는 귀족과 황족으로 살아온 세월 내내 처음으로 발을 삐끗할 뻔했다.
다행히도, 몸에 익은 게 있어 품위를 지킬 수 있었지만.
“……돌았니? 약을 먹은 게 내가 아니라 너였나 본데.”
오벨리아가 질색하며 알렉산드로를 쳐다봤다.
대체 그 머릿속이 어떻게 되어 있길래, 그녀가 황후 자리 하나 던져 주면 그간 당한 일을 모두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잘 생각해 봐. 내가 너한테 보상을 해 주겠다는 거야.”
그러나 질색하는 오벨리아의 반응에도 알렉산드로는 뻔뻔했다.
여즉 권력을 잡고 있는 선황제와 합의한 바도 없고, 아그네스가 지금 당장 폐위당한 것도 아니었으나 그는 당당했다.
“솔직히, 네 능력, 겨우 힐켄테데 대공비 따위로 썩히기에는 아깝잖아?”
알렉산드로의 말은 자신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줄이나 알고 있는 건가 싶을 만큼 갈수록 가관이었다.
“돌아오기 뭣하면, 네가 죽은 거처럼 위장해 줄 수도 있어. 황태자비로서 죽어 황궁을 나갔듯이, 대공비로서 죽은 후에 황후로 돌아와도 되는 거 아닌가?”
솔직히, 이건 알렉산드로가 그간 생각해 오던 진심이었다.
그는 오벨리아를 되찾고 싶었다.
제가 버릴 때는 몰랐으나, 남의 손에 그녀가 있어 보니 알겠다.
오벨리아만큼 쓸모 있는 여자는 없었다.
알렉산드로는 그런 여자를 제 황후로 두고 싶었다.
“……미친 새끼.”
오벨리아가 기어코 욕설을 입에 담았다.
그녀를 대신하여 마리아가 죽었다.
그때, 오벨리아는 울 수조차 없었다.
자신 때문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럴 자격조차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처참한 죽음들 위에서, 오벨리아가 살아남은 것이었다.
그날의 처참함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지금 그녀더러 그 일을 반복하라고 저 뻔뻔한 낯짝으로 지껄이는가!
순간 오벨리아의 안에서 분노가 활활 치솟았다.
화가 나 그녀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곳이 모두가 보고 있는 플로어의 정중앙만 아니었더라면 오벨리아는 당장이라도 알렉산드로의 뺨을 내리쳤을 터였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하기에는 애석하게도 그녀는 지극히 이성적인 인간이었다.
“잘 생각해 봐. 너한테 나쁜 제안은 아닐 거니까.”
오벨리아가 천금 같은 인내심을 발휘하여 분노를 참고 참아도, 알렉산드로는 자꾸만 그 입을 뚫렸다고 마구 놀렸다.
결국 그녀가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하, 지금 황실을 꼴을 봐. 나 보고 침몰해가는 배 위에 올라타라고? 다들 황실보다 힐켄테데의 눈치를 더 보는 걸 너만 모르나 보지!”
“헛소리……!”
그리고 마침내, 알렉산드로의 되지도 않을 소리가 멈췄다.
그는 오벨리아의 도발에 쉽게 걸려들어 눈에 불을 켰다.
그러나 그 순간, 곡이 끝났다.
그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빠르게 알렉산드로에게서 떨어졌다.
“너야말로 같잖은 소리 하지 마. 듣고 있는 내 귀가 아플 지경이니까.”
오벨리아가 짜증스럽게 말한 후, 플로에서 내려왔다.
어쨌든 대공비와 황제의 사이였기 때문에, 남들의 오해를 살 행동은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다행히도 알렉산드로는 그녀를 쫓아가지 못했다.
“오벨리아에게 완전히 까인 모양이네?”
그리고 황제의 자리로 돌아오는 알렉산드로를 아그네스가 약 올렸다.
그녀는 마치 그가 오벨리아에게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의치 않는 듯한 태도였다.
“넌……! 대체 아까부터 뭐하는 거야.”
알렉산드로가 짜증스럽게 마른세수로 제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아그네스를 노려봤다.
오벨리아와의 춤 시간이 끝났는데도 에크하르트는 여전히 멀쩡했다.
알렉산드로가 힐끔 본 바에 의하면 아그네스는 에크하르트에게 제대로 접근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기다려 봐, 이제 내 목적은 거의 다 이뤘으니까.”
“……뭐? 네가 언제 뭘 했는데?”
알렉산드로가 의문에 가득 찬 얼굴로 두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나 아그네스는 의뭉스러운 미소만을 지을 뿐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는, 연회의 끝이 다가와서야 알게 되었다.
“쿨럭……!”
“꺄아아악!”
“황제 폐하!”
“대공비 전하!”
연회가 마무리로 치달을 무렵, 알렉산드로와 오벨리아가 동시에 피를 토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아그네스가 피를 토하면서도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곧 폐위될 황후 따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아주 즐겁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