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피날레를 위하여(1)
대공비와 황제, 그리고 황후까지!
모두 피를 토했다.
그러니 모두의 관심사는 단 하나였다.
과연 범인은 누구인가!
연회는 그대로 끝이 나고 모든 귀족은 황궁의 각 방에 나뉘어 구금 아닌 구금을 당했다.
대공비와 황제, 황후까지 모조리 피를 토했으니 당연한 일이었고 아무도 이 조치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러나 선황제는 이 사건의 범인을 아그네스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피를 토한 후 쓰러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알렉산드로나 오벨리아와 달리 아그네스는 금세 정신을 차렸기 때문이다!
그건 아그네스가 자신이 독을 쓴 본인임을 숨길 마음도 없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아그네스 이멜리언!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그리하여 아그네스를 치료를 핑계로 황후궁에 가둔 선황제가 황후궁으로 쫓아와 그녀를 추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하하하하……! 그럼 내가 당신들 손에서 놀아나기만 할 줄 알았어?!”
그러나 아그네스는 더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것처럼, 무려 선황제를 상대로 배를 잡고 깔깔거렸다.
그녀는 진심으로 즐거운 기색이었다.
당연했다.
아그네스는 선황제와 알렉산드로에게 제가 오벨리아를 죽이겠노라 말한 순간부터 쭉,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이토록 오랜만에 제 뜻대로 되었는데 기분이 좋지 않을 리가 없었다.
“감히……!”
선황제가 분개하여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철썩!
“악!”
사정없이 내리친 손 탓에, 아그네스의 고개가 돌아가다 못해 그녀가 견디지 못하고 휘청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푸하하하……! 아, 진짜 그 애비에 그 자식이라더니……! 퉤!”
아그네스는 이런 꼴을 당하고도 웃었다.
마치 선황제가 이 따위로 나올 줄 알고 있었던 모양처럼.
입 안이 터졌는지 그녀가 바닥에 침을 뱉자, 피가 섞여 나왔다.
“하여간 성질 더럽기는 그 인간이 그 인간이라니까……! 이래서 권력자들이란!”
아그네스가 짜증스럽게 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대놓고 빈정거렸다.
아예 노골적으로 선황제를 약 올리기라도 하려는 듯한 어조였다.
“당장 무슨 독을 썼는지 말해!”
선황제가 소리쳤다.
해독 시간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알렉산드로의 목숨은 위태로워질 터였다.
알렉산드로가 제위에 오르기 전, 오랜 시간 동안 벌어진 황위 다툼으로 인해 현재 남아있는 선황제의 핏줄이라고는 알렉산드로뿐이었다.
선황제는 자신의 자식이 아닌 누군가가 황위에 앉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아! 그거!”
짝.
아그네스가 양 손바닥을 부딪쳤다.
그녀가 곧 낄낄거리면서 웃었다.
“방에 오자마자 손을 다 씻어 버려서 물에 씻겨 내려가 버렸는데 어쩌지?”
아그네스가 보란 듯 선황제의 앞에 제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에 독을 바른 후 일부러 알렉산드로와 춤을 췄다.
그에게 오벨리아와 춤을 추라고 권유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그네스는 그 순간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알렉산드로가 오벨리아와 춤을 추지 않으면 자신의 계획이 모두 헛수고가 되는 게 아닌가!
그래도 다행히 그는 오벨리아와 춤을 췄고, 아그네스의 계획은 성공했다.
아그네스는 자신의 손에 독이 발린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 얼굴을 만지지도 않았고 핑거 푸드를 먹지도 않았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와 오벨리아는 달랐을 테니, 그 중독의 정도가 아그네스와 다른 것이 당연했다.
“말하지 않으면 고문을 할 것이다!”
선황제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붉으락푸르락했다.
도대체 어디서 이딴 게 튀어나와서 감히 자신을 이토록 능멸하는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며 살아온 그로서는 현재 아그네스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아니! 그렇게 못 할걸?”
아그네스가 눈을 번뜩이며 선황제를 쳐다봤다.
그녀가 당당히 목소리를 높였다.
“알렉산드로가 죽기라도 하면, 내가 가진 아이가 당신의 유일한 핏줄이 될 텐데…… 설마 황가의 방계 중 하나에게 황위를 넘기려는 건 아니겠지?”
아그네스는 선황제가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그는 그녀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으나, 손을 부들부들 떨 뿐 그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다.
현재 아이는 사생아에 불과했지만, 아이를 선황제의 손주로 만들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예컨대, 아그네스의 아이는 죽었다고 한 다음 선황제의 죽은 자식들 중 한 명의 잃어버렸던 아이로 공표하는 것이다.
황족들은 일찍 결혼하는 만큼, 자식도 빨리 낳았다.
황위 전쟁 중에 사라진 아이가 한둘쯤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지 어미를 닮아 끈질기기도 하지.”
선황제가 아그네스와 그녀의 부른 배를 징그럽다는 듯이 바라봤다.
얼음꽃 차를 마시고 하혈한 것에 이어, 아무리 아그네스가 미리 해독제를 먹어 두었다지만, 또 중독될 뻔했는데도 아이는 떨어지지 않고 제 어미의 뱃속에 붙어 있었다.
아이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아그네스를 고문했을 텐데, 아이가 있어 그럴 수 없음이 선황제는 화가 났다.
“황후궁을 싹 다 뒤져! 그리고 아그네스 이멜리언을 궁에 가둬 둬라.”
“예, 폐하.”
불같이 더 화를 낼 것 같던 선황제가 휙 돌아섰다.
더는 아그네스에게서 얻어낼 것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러니 보고 있어 봐야 화만 나는 얼굴을 더는 보고 있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 시간에 차라리 황궁의들을 닦달하여 알렉산드로를 살려내게 하리라.
선황제가 그대로 아그네스의 방을 나가 버렸다.
기사들이 우르르 군홧발로 들어와 아그네스의 방 안을 온통 엎어 놓았다.
아이를 가진 여자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데도, 그들 중 누구도 아그네스를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기사들이 제 방에 온통 군화 자국을 남겨 놓는 가운데, 아그네스가 또다시 미친 사람처럼 웃어 젖혔다.
아, 몰락이었다.
그러나- 혼자 죽지는 않으리라.
***
“그래서, 황실은 아직도 내 아내가 무슨 독에 중독된 건지 알아내질 못한 겁니까?!”
황제와 마주하자마자 에크하르트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서늘한 얼굴로 제 분노를 감출 생각 따위 조금도 없어 보였다.
“지금 어느 안전이라고 목소리를…….”
선황제의 시종장이 에크하르트에게 경고하듯이 말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에크하르트의 목소리는 더욱 매서웠다.
“죽고 싶지 않으면 그 입 다무시오.”
에크하르트는 이곳의 기사들 중 유일하게 전장 위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 말은 즉, 그는 무기가 없더라도 맨손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이었다.
시종장도 그 사실을 떠올린 것인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황제에 대한 충정이 좋더라도, 눈앞의 살인 병기 같은 남자에게 대항할 용기를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중하게, 대공. 그런다고 대공비가 나아지진 않네.”
선황제가 한숨을 삼키며 에크하르트를 진정시켰다.
선황제는 자신이 아그네스 따위 때문에 대공에게조차 이런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이 분했으나, 지금 당장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럼 제가 가만히 있는다고 황실이 제 아내를 위하여 무언가를 해 준답니까? 현재 독의 종류조차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그네스가 사용한 독은 애초에 선황제가 오벨리아에게 쓰라고 내준 것과 달랐다.
그리하여 독의 정체를 밝혀내는 데 더 오랜 시간이 들고 있었다.
“황실이 이렇게 무능할 줄이야……. 북부에 있는 내 성의 의원들이었다면 이토록 아무것도 못 하고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에크하르트가 분개하여 계속해서 소리쳤다.
쾅!
“감히 황실을 모독하는가!”
그러자 마침내, 선황제가 참지 못하고 제 화를 터트렸다.
그 순간, 에크하르트의 두 눈이 번뜩였다.
“제가 못 할 말을 했습니까? 분명 힐켄테데 성의 의원들이라면 진즉에 대공비를 치료해냈을 겁니다. 그런데 치료도 하지 못할 거면서 이렇게 황궁에 붙잡아 두고 있지 않습니까!”
오벨리아가 쓰러졌더라도, 황제인 알렉산드로가 독에 당했기 때문에 힐켄테데 또한 완벽히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물론, 피해자인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지만 어쨌든 법도가 그랬기 때문에 에크하르트와 오벨리아는 현재 다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황궁에 몸이 매여 있었다.
“황궁의 의원들은 론체스터 내에서 가장 유능한 자들만 뽑고 뽑은 이들이다! 그들이 어쩔 줄 모르는 대공비의 상태를 힐켄테데의 의원들이 치료할 수 있다?”
에크하르트의 말에 선황제는 단단히 자존심이 상한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어디 한 번 오벨리아 힐켄테데를 데리고 나가 보라! 황실 의원들의 손을 떠나 황궁을 벗어나는 순간 죽을 테니!”
선황제가 저주처럼 소리쳤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마치 기다린 것처럼 대꾸했다.
“좋습니다! 선황제 폐하께서 윤허하신 겁니다? 저희는 지금부터 대공비를 북부의 성으로 데려가 치료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선황제가 다른 말을 꺼낼 수 없도록, 에크하르트는 곧바로 돌아서 알현실을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대공비를 중독시킨 황궁을 믿기 어려웠는데, 잘됐군요!”
“저……저……고얀……!”
선황제의 분노 어린 음성이 에크하르트의 등 뒤로 들려왔다.
***
그 길로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를 마차에 태우고 그의 기사들과 함께 북부로 향했다.
그리고 북부로 가는 길, 지금까지 마치 중독된 사람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오벨리아가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황제가 잘 속은 것 같아서 다행이야.”
에크하르트가 손수건에 물을 적셔 오벨리아에게 건네 주었다.
그녀가 제 입술과 손톱 등을 닦아내자, 마치 독에 중독된 것처럼 푸르게 변했던 살갗이 모두 사라졌다.
“그래, 우리 계획대로야. 그렇지만- 정말 괜찮은 게 맞나?”
에크하르트가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로 오벨리아에게 물었다.
그녀의 얼굴에 있던 화장을 지우자, 완전히 멀쩡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괜찮아. 알다시피 그 독…… 나한테는 소용없는 거잖아?”
그런 에크하르트를 달래듯, 오벨리아가 웃으며 대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