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피날레를 위하여(3)
라이너스가 도착한 곳은 황궁이었다.
아그네스는 구금당하고, 알렉산드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와중에 라이너스가 황궁에서 찾아갈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어서 오게, 카테리안느 공작. 매사 바쁜 공작이 무슨 일로 나를 이렇게 조용히 찾아왔는가?”
선황제는 라이너스를 보자마자, 짧은 말로 그를 반긴 후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선황제의 눈 밑은 깨어나지 않는 알렉산드로 인해 그간 보지 않던 정무를 보며 황궁의 일을 신경 쓰느라 까맣게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라이너스는 선황제에게서 느껴지는 그 피로함보다, 선황제가 이전에 자신의 아버지를 대하듯이 자신을 반기지 않는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서 라이너스는 선황제의 행동을 갚아 주듯이, 짧은 인사 후 자신이 가져온 문서를 건넸다.
“선황 폐하께 보여 드려야 할 서류가 있어서 가져왔습니다.”
“……내가 봐야 할 서류?”
선황제가 의아한 듯 라이너스를 바라보다가, 제 시종을 시켜 라이너스의 손에 들린 서류를 가져오게 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굳이 자세한 내용을 묻지 않은 것은 빨리 서류를 읽고 해결하여 라이너스를 돌려보내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선황제는 제 뜻대로 할 수 없었다.
서류에 적힌 내용을 보는 순간, 선황제의 얼굴은 매섭게 굳어 버렸다.
쾅!
선황제가 황좌의 손잡이를 거세게 내리쳤다.
“지금 이걸 무슨 의도로 내게 가져온 거지? 라이너스 카테리안느!”
선황제의 목소리에는 당황과 분노가 잔뜩 실려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나라의 국고로 라이너스가 벌이는 철광석 광산 사업에 투자하겠다는 내용이 적힌 서류에 황후의 인장이 적혀 있었으니까.
“보시는 대로입니다.”
라이너스는 분노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선황제를 면전에 두고 뻔뻔하게 대꾸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류에는 황후가 개인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내탕금과 황후궁 관리 비용, 품위 유지 비용 등을 라이너스에게 투자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문제를 꼽자면…… 그게 올해뿐 아니라, 앞으로 최소 5년을 투자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아그네스가 설령 폐위당하더라도, 인장은 그녀가 황후일 적에 찍힌 것이기 때문에 그 내용은 후에도 유효했다.
그런 판에 심지어는 중간에 5년 내내 지속적으로 투자금을 지불하지 못할 경우, 총 투자금의 2배를 한 번에 내놓는다는 독소 조항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말만 투자자였지, 솔직히 말하자면 라이너스의 사업이 아그네스의 돈을 뜯어먹고 있던 셈이었다.
“맨 뒤의 서류도 보셔야 할 겁니다, 선황 폐하.”
라이너스가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이 말을 덧붙였다.
재빠르게 맨 뒷장을 넘겨 본 선황제가 대번에 서류를 제 손으로 구겼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분노를 참지 못한 것이었다.
“아그네스 이멜리언!”
선황제가 자리에 없는 아그네스를 향한 노성을 내뱉으며 서류를 내팽개쳤다.
어찌나 세게 집어던졌던지, 그 서류가 알현실의 중앙을 나뒹굴었다.
아그네스는 말도 안 되는 투자에 이어 보증도 선 채였다.
라이너스가 여기저기서 돈을 빌린 것에 대하여 보증인으로 황후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보시다시피, 그렇게 되어…… 현재 제가 돈이 좀 필요합니다. 황제 폐하께서 쓰러져 계셔서, 철도 사업이 한동안 중단되는 바람에 제 철광석 사업도 엉망이 되었거든요.”
선황제가 분노하든 말든, 라이너스는 자신이 황궁에 온 이유를 꺼내 들었다.
어차피 라이너스의 사업이 망하면 황실의 재정도 같이 파탄이 날 테니까.
“너, 감히……!”
쾅!
선황제가 자신의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한번 황좌의 손잡이를 내리쳤다.
그러나 라이너스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폐하, 체통을 지켜 주시지요. 저는 이제 일개 영식이 아니라, 카테리안느 공작입니다.”
도리어 라이너스는 아주 예의 바른 태도로 황제의 무례를 지적했다.
“이…… 이!”
쨍그랑!
황제가 황좌 옆 작은 테이블에 놓인 물컵을 그대로 라이너스를 향해 집어던졌다.
그러나 그 물컵은 채 라이너스를 맞추지 못하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현재 투자자들이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며 돈을 갚기를 성토 중입니다. 그러니 선황 폐하께서 둘 중 하나는 해 주셔야겠습니다.”
라이너스는 선황제가 자신을 맞추지 않을 거라는 점을 알고 있었던 듯이,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어쨌든 라이너스는 선황제가 폭력을 행사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카테리안느 공작이니까.
“황실에서 투자금을 대신 갚아 주시든, 철도 사업을 원래대로 빠르게 진행하게 해 주시든 결정해 주십시오.”
“네 건방짐은 내가 두고두고 잊지 않을 것이다.”
선황제가 이를 아득바득 갈며 라이너스를 노려봤다.
어딜, 황실을 제 사업의 운명 공동체 따위로 묶어 이런 식으로 협박할 줄이야.
“폐하, 저만 좋자고 하는 사업이 아닙니다. 철도 사업이 하루빨리 완성되어야, 황실에도 이득이 돌아올 것 아닙니까.”
라이너스는 앞에 제 할 말을 모두 다 하고 나서야, 선황제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마치 황실을 위한 일인 것인 양 말했다.
그 모습이 가증스러워 선황제가 입매를 비틀었다.
그러나 라이너스의 말도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알렉산드로가 가사 상태에 접어들면서 황실의 모든 것은 정지된 상태였다.
그리고 아주 급한 것만 황제가 처리하고 있었으니, 철도 사업도 뒤로 밀리는 게 당연했다.
즉, 그 비싼 철광석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오히려 돈을 써가면서, 철도는 건설되지도 않고 시간만 지진부진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말이었다.
“……오늘 내로 철도 사업을 조속히 재시행하라 이르지.”
결국, 선황제는 이를 악물며 라이너스의 말을 수락했다.
감히 저를 협박하러 온 라이너스의 작태가 괘씸했다.
그러나 철도 사업은 그 괘씸함보다 중요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폐하의 은혜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제야 라이너스가 무릎을 굽혀 선황제에게 인사했다.
정말이지, 가식적이기 그지없었다.
***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는 쉬지 않고 몇 날 며칠을 달려 신성 제국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사일러스가 다급하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공 전하, 대공비 전하……!”
사일러스는 어쩐지 과하게 두 사람을 반겼다.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가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우선 지금 당장 가실 곳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가 쉴 새 없이 마차를 달려온 피로를 조금이나마 풀기도 전에, 사일러스가 그들을 재촉했다.
“잠깐, 잠깐……! 지금 뭐하는 거지?”
에크하르트가 그런 사일러스를 제지했다.
물론 마차로 달려온 것쯤, 그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몸이 극도로 약해진 오벨리아에게는 대단히 별일이었다.
그녀는 애써 괜찮은 척했으나, 마차로 달려오는 며칠간 안에서 속이 뒤집히는 바람에 제대로 먹지 못하여 낯빛이 좋지 않았다.
그런 오벨리아를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어딘가로 끌고 갈 기색이니, 에크하르트로서는 매우 못마땅했다.
“아……! 그것이……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대공비 전하. 그게…… 저희가 한시가 급하여.”
사일러스는 일전에 봤을 때와 달리 행동이 차분하지 못하고 어딘가 어수선하게 굴었다.
그의 태도에서 이상함을 느낀 오벨리아가 물었다.
“신전에 무슨 일이 있나……?”
사일러스가 머무는 곳은 당연히 신전이었다.
오벨리아는 신전에 발을 딛자마자, 마치 누군가를 애도라도 하는 것처럼 이곳이 지독하게 조용함을 깨달았다.
신관들은 하나같이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듯이 조심조심 움직였다.
황태자비로서 민생을 살피기 위하여 백성들의 모습을 눈에 담는 게 습관이 되었다 보니 자연스레 몸에 벤 행동 덕에 알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기는 조금 그렇습니다. 제국 내에서도 비밀에 부치는 일이라서요.”
사일러스가 오벨리아의 오른손을 제 두 손으로 꼭 잡으며 부탁했다.
“이번만, 이유를 묻지 마시고 저를 따라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절대로 대공비 전하와 대공 전하께 해가 될 일은 아닙니다.”
사일러스의 태도는 간절하기 그지없었다.
“……알겠네, 일단 가지.”
오벨리아는 은혜는 반드시 은혜로 갚는 사람이다.
사일러스는 처음 그녀를 만났을 당시, 에드먼드와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먼 길을 와주었다.
게다가 지금 알렉산드로를 그렇게 만들 수 있었던 것 또한 사일러스가 보내 준 신관, 센티스 덕이었다.
사일러스에게는 여러모로 빚진 것이 많았으니, 그녀는 그의 간곡한 부탁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하아, 오벨리아. 쉬어야 하지 않나.”
에크하르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강력하게 막아서지는 않았다.
이미 오벨리아를 겪어 본 결과, 이런 상황에서는 어차피 그녀의 뜻대로 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찮아, 다녀와서 쉬자.”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를 달래듯이 말했다.
사일러스가 순식간에 매우 안도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그럼 두 분, 모시겠습니다.”
그 모습이 오벨리아만 설득하면 에크하르트도 넘어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한시가 급하다는 사일러스의 말이 사실인 듯, 그는 오벨리아의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재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가 사일러스를 따라 빠르게 신전의 더 깊은 안쪽으로 들어갔다.
***
신기하게도, 신성 제국의 신전과 황궁은 이어져 있었다.
사일러스가 안내한 곳은 그 두 장소를 잇는 비밀 통로였던 모양이었다.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는 이방인인 자신들에게 사일러스가 이런 통로를 거리낌 없이 공개하는 이유를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에크하르트의 정체가, 이런 길을 알아도 될 법한- 그런 가문의 핏줄이라는 의미였다.
두 사람이 심각한 얼굴로 사일러스를 따라 한참을 걷고 있을 때, 사일러스가 드디어 멈춰서 벽의 어딘가를 눌렀다.
그리고 돌 벽이 스르르 열리는 순간, 그 안에는 깊이 병든 것처럼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방 한가운데 있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오벨리아는 단번에 그 중년 남자를 알아보았다.
“교황 성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