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피날레를 위하여(4)
“……저분이 내 아버지라는 건가?”
에크하르트가 침대에 다가가지도 못하고 멈춰선 채 물었다.
사일러스가 따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가 한시가 급하다고 했던 이유와 이곳에 에크하르트를 데려온 이유를.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보시다시피…… 현재 교황 성하께서는 상태가 위중하십니다.”
사일러스가 침울한 얼굴로 설명했다.
“대공 전하의 어머님이 사라지신 이후, 교황 성하께서는 날로 쇠약해지셨습니다.”
실제로, 교황은 에크하르트의 아버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나이가 들어 보였다.
마치 홀로 몇 십 년의 나이를 더 먹은 듯이.
“오랫동안 어머님을 그리워하셨지요.”
“……그렇다면 날 왜 찾지 않았지?”
에크하르트가 사일러스의 말에 의문을 표했다.
교황이 그토록 절절한 사랑을 했다면, 그 자식을 찾지 않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에크하르트의 어머님이신 마리엘라 님은 테스티아 가문의 사생아셨습니다. 그래서 두 분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셨죠.”
신성 제국에는 황제를 배출하는 다섯 가문이 존재한다.
그중에서 로메네스와 테스티아의 사이가 단순히 악연이라고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지독히도 좋지 않다는 사실은 타국에까지 알려진 것이었다.
“게다가 마리엘라 님은 사생아이셨으니, 더더욱 로메네스 가문에서 교황님의 상대로 허락해줄 리가 없었죠. 어차피 다섯 가문끼리는 결혼할 수 없기도 하지만요.”
일부일처제가 르 카르디에의 교리라고 주장하는 게 신성 제국이었다.
그랬으니 신성 제국에서는 론체스터보다도 훨씬 사생아를 나쁘게 취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크하르트의 어머니인 마리엘라가 테스티아의 성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신성 제국의 다섯 가문 중 한 가문에서 황제가 나오면, 다른 네 명의 후보는 자동적으로 법무 대신과 재무 대신, 외무대신 그리고 군부 대신의 자리를 나눠 갖게 된다.
그리고 이 네 사람에게는 황제의 뜻에 찬성과 반대를 표할 수 있는 의결권이 주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정치를 위해 가문 간의 결탁을 방지할 수 있도록 다섯 가문끼리는 혼인을 지양했다.
말이 지양이지, 다섯 가문 간의 결혼이 이루어진다면 신성 제국의 귀족들이 모조리 들고일어날 테니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다섯 가문은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순간마다 툭하면 모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 눈이 맞지 않은 이들이 없을 리 없었다.
마리엘라는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
그 부모가 각각 다섯 가문 중 테스티아와 디엘리아의 사람이었기에 서로 혼인할 수는 없었으나, 미련이 가득했던 사이에서, 그들의 사생아로.
사생아였으나 그 피가 귀하디귀했다.
버릴 수도 반길 수도 없었다.
결국 그런 마리엘라를 받아 준 것은 테스티아 가문이었다.
어차피 두 가문의 피가 섞인 아이를 밖으로 내돌릴 수는 없었고, 두 가문 중 하나는 마리엘라를 품어야 했으므로.
“마리엘라 님은 이미 테스티아와 디엘리아의 피가 섞인 분이셨죠. 그분이 로메네스의 자식을 낳으면, 다섯 가문 간의 균형은 완전히 깨지게 되는 겁니다.”
디엘리아의 손주이자 테스티아와 로메네스의 아이.
그런 아이가 태어나게 되면, 신성 제국의 교황 자리가 누구의 것이 될지는 정해진 일이었다.
나머지 두 가문, 그리스미에와 알켄세나에서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리스미에에서 마리엘라 님이 아이를 가지신 사실을 알자마자, 손을 쓴 겁니다.”
미혼의 귀족 영애가 임신을 했다.
마리엘라는 당연히 테스티아 저택 내부의 주치의에게 진찰을 받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몰래 외출을 해, 외부의 의원에게 임신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비극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아주 우연히도, 그 의원이 하필 그리스미에의 후원을 받는 이였던 것이다.
사생아로 태어나기는 했으나, 테스티아에서 비교적 곱게 자란 마리엘라가 뒷골목 의원을 찾아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제법 깨끗한 거리의 의원에 간 결과가 하필 그리된 것이었다.
마리엘라의 입장에서는 사실 대단히 억울한 일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사생아였기에 외부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나름 철저하게, 마차도 가문의 것이 아닌 공용 마차를 탔다.
의원이 마리엘라를 알아본 것은, 또 하필 출세에 욕심이 있던 의원이 다섯 가문에 대해 공부하여 제법 세세히 알고 있던 탓이었다.
“당시 그리스미에에 의해 교황 성하와 마리엘라 님과의 교제가 로메네스 가문에 들통났습니다. 그리하여 교황 성하는 자택 내에 구금당하시게 됐죠. 그때는 아직 교황이 아니셨으니, 가문에 반항할 수도 없으셨고요”
그리스미에는 알켄세나에 협조를 구했다.
테스티아가 마리엘라를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그녀가 본부인의 자식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는다는 건 신성 제국 내에서 말도 안 될 일이었다.
그렇기에 마리엘라의 호위는 심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처리하기 위해 그리스미에가 움직였고, 알켄세나가 사건을 은폐했다.
“마리엘라 님은 아이를 가진 사실을 교황 성하께 알리지도 못하고 일신의 안위를 위협받아 도망치셔야만 했죠.”
그리스미에와 알켄세나가 협조했기에 이것은 모두 단 하루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마리엘라는 테스티아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제 연인에게 도움을 구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도망치게 되었다.
사실, 그녀가 살아남아 에크하르트를 낳은 것이 기적이었다.
“마리엘라 님께서 어떻게 힐켄테데의 전 대공님과 연이 닿아 도움을 구하셨는지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마리엘라는 그리스미에와 알켄세나의 협력을 통한 은폐 탓에 그날 실종 후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다.
로메네스는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기 위하여 당시의 교황에게 힘을 빌려 주지 않았다.
사건은 그렇게 조용히 덮였고 내내 저택에서 살던 마리엘라가 론체스터의 북부까지 갔으리라고 상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나를 보내 에크하르를 살리라고 한 거야.’
오벨리아는 선황제가 에크하르트만은 살려 두라고 한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선황제는 에크하르트가 현 교황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것이다.
그것도 디엘리아와 테스티아, 그리고 로메네스의 피가 섞인.
선황제는 본래 힐켄테데 사변에서 에크하르트의 목숨을 구해 준 척하여 신성 제국에 빚을 받아낼 예정이었을 것이다.
어차피 힐켄테데 사변에 대한 진실은 황실과 오벨리아밖에 몰랐으니까.
그러나 알렉산드로가 멍청하게도 오벨리아를 내칠 줄은, 선황제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렇게 오벨리아에 의해 황실이 힐켄테데에 한 짓에 관한 진실이 밝혀졌다.
선황제는 다급해졌을 터였다.
에크하르트를 적으로 돌리게 생겼으니, 선황제는 정해야만 했다.
에크하르트를 처리하든, 신성 제국과 훗날 생길지도 모를 마찰을 대비하든.
그리고 아마 신성 제국의 교리를 어기고 황비를 세우고자 했던 일이나, 대신관이 올라야 할 자리에 선황제가 올랐던 일 모두 후자를 염두에 둔 것이었으리라.
어쨌든 힐켄테데의 대공인데다가 자체적인 무위도 드높은 에크하르트를 당장에 처리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뭐라도 대비를 해야 했고, 그렇게 생각한 게 신성 제국에 극친화적인 귀족들을 미리 걸러내는 일이었을 터였다.
론체스터에도 광신도는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귀족도 예외가 아니었다.
귀족 중에도 분명, 론체스터 황실보다 르 카르디에의 교리를 더 믿는 자들도 있었다.
혹시라도 나중에 에크하르트가 론체스터 황실에 적대적인 상태에서, 그가 신성 제국의 핏줄임이 밝혀지고, 론체스터 황실에 적의를 드러낼 때.
그때를 위해 광신도 같은 귀족들을 미리 찍어 눌러 놓으려 했으리라.
내부의 결속이 단단해져야만, 외부에서 압박이 들어와도 찌그러지지 않고 버틸 테니까.
역시, 알렉산드로보다 선황제가 훨씬 치밀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비록 론체스터에서 신성 제국의 영향을 줄이는 일은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귀족 중 신성 제국에 친화적인 이들은 모두 걸러 두었을 테니까.
“교황 성하께서 자리에 오르셔서 마리엘라 님을 찾으려고 하셨을 때는,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은 뒤였죠. 성하께서는 단언컨대, 대공 전하께서 태어나신 일도 몰랐습니다. 정식으로 마리엘라 님과 결혼하시겠다면서, 피임도 철저히 하셨으니까요.”
사일러스는 에크하르트에게 믿어달라는 듯 호소했다.
도리어 교황 몰래 피임을 피한 것은 마리엘라였다.
교황의 피임 차를 마리엘라가 몰래 일반 차로 바꾸어 놓았던 일을, 교황은 근래 들어 에크하르트에 관해 조사하면서 알게 되었다.
교황이 안쓰러워 거둬 준 마리엘라의 하녀가 그제야 이실직고한 것이었다.
사생아로 태어나,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늘 외로웠던 마리엘라는 무모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가지고 싶어했다.
서로가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 알수록, 더더욱.
어쩌면 그 속에는 테스티아에서 그랬듯이, 교황의 아이를 낳으면 로메네스에서도 자신과 아이를 받아 들여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존재했다.
“아셨다면, 교황 성하께서 얼마나 마리엘라 님을 찾아 헤매셨는데…… 당연히, 대공 전하의 존재에 대단히 기뻐하셨을 겁니다.”
사일러스의 말을 모두 들은 에크하르트가 그제야 침대로 다가섰다.
에크하르트의 시선에 교황의 머리칼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아버지라면, 일찍이 결혼하는 귀족들의 특성상 마리엘라와 만난 것은 결혼도 전이었으니 교황의 나이는 이제 겨우 50살도 안 되었을 터였다.
그런데도 사랑을 잃고 날이 갈수록 시들어갔다는 남자의 머리는 노인이라도 된 듯 새하얗게 새어 있었다.
에크하르트는 말없이 계속해서 교황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버려진 아이가 아니란 것을 알았으나, 기분은 뭐라고 정의할 수 없었다.
그 순간, 교황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교황의 검은 눈과 에크하르트의 붉은 눈이 마주쳤다.
“……마리엘라?”
쇠약한 목소리가, 제 사랑의 이름을 불렀다.
시선이 가물가물한 듯 가늘게 뜬 교황의 눈가에서 눈물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