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피날레를 위하여(5)
병든 두 눈이 에크하르트의 얼굴에서 그리운 모습을 애타게 찾았다.
그렇게 헤매다가, 교황은 한참 뒤에야 그리움 속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한번, 교황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아.”
그제야, 교황은 에크하르트를 제대로 눈에 담았다.
교황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네가, 마리엘라의 아이구나.”
그 나이답지 않게 주름진 교황의 손이 사일러스 쪽으로 뻗어졌다.
“사일러스, 나 좀 일으켜 주겠나?”
가까이 있는 에크하르트에게가 아니라, 멀리 있는 사일러스에게 말하는 것에서 교황이 제 아들을 어려워하는 게 느껴졌다.
사일러스가 후다닥 다가와 교황의 상체를 일으켜 주고, 침대 헤드에 기댈 수 있게 해 주는 동안 에크하르트는 그것을 보고만 있었다.
교황이 처음 만난 제 아들을 어렵게 여기는 만큼, 에크하르트 또한 처음 만난 제 아버지가 낯설었다.
그로 인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에크하르트를 보며, 교황이 말을 꺼냈다.
“……우선, 너를 이제야 찾게 된 점을 사과하마.”
겨우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교황의 입에서 쿨럭, 밭은기침이 흘렀다.
“변명, 에 불과하겠지만…… 나는 네가 태어난 걸 몰랐고, 그래서…….”
쿨럭, 재차 흘러나온 기침은 이번에는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키는 훤칠하나 에크하르트의 아버지치고는 상당히 마른 교황의 몸이 기침할 때마다 들썩거렸다.
그건 누가 봐도 죽어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에크하르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처음으로 만난 그의 아버지가 죽음을 목전에 앞두고 있다는 게 새삼스럽게 와 닿았다.
“천천히…… 천천히, 이야기 하십시오.”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침대 옆 협탁 위의 물을 내밀며, 침대 맡 의자에 앉았다.
교황에게 기다려 주겠으니 무리하지 말라고 하는 무언의 의사 표현이었다.
마를 것 같았던 교황의 눈가에, 또 다시 눈물이 맺혔다.
교황이 회한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말없이 다정한 건, 꼭 마리엘라를 닮았구나…….”
그 말에 한없는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
결국 에크하르트는 사일러스가 해 주었던 설명을 한 번 더 교황에게 들었다.
교황은 그간 제 자식을 챙기지 못한 것에 대하여, 스스로의 입으로 설명하고 사죄해야 한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에크하르트는 그런 교황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리고 모든 말이 끝나는 순간, 교황이 갑작스럽게 덥석 에크하르트의 손을 잡아 왔다.
“……에크하르트, 라고 이름을 지었다지.”
마냥 회한에 젖어 있던 교황의 눈이 순식간에 어떤 감정으로 타올랐다.
분노, 증오, 복수심- 그 감정이 해묵고 뒤엉켜 좀처럼 무언가로 정의할 수 없는 시커먼 덩어리.
그것의 정체를 에크하르트는 알고 있었다.
“신성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어라, 에크하르트.”
교황이 아니라 황제.
그건 더 이상 다섯 가문이 돌아가며 제국의 주인 되어야 할 자리를 나누어 갖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리스미에와 알켄세나는 다른 세 가문의 피를 이은 아이가 신성 제국을 독점하게 될까 봐 마리엘라를 해치려 했다.
교황은 두 가문이 가장 두려워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복수하고자 했다.
그 순간, 에크하르트의 손을 쥔 교황의 그 손에 어떻게 그런 힘이 존재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교황은 절대 놓치지 않을 것처럼, 에크하르트의 손을 좀 더 꽉 쥐었다.
“네가 지금의 가문을 사랑한다는 걸 안다. 후계자도 너밖에 없다는 것도 알아.”
교황이 호소하듯이 에크하르트의 손을 잡으며 매달렸다.
“인제 와서 너를 내 아들 삼고자 하는 것이 너를 키워 주신 분께 얼마나 죄스러운 일인지도 안다, 알아.”
교황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몰랐다지만, 그가 이십여 년을 내버려 둔 아들을 품어 준 것은 힐켄테데였다.
북부는 힐켄테데라는 하나의 구심점을 중심으로 뭉친 지역이었다.
거기서 힐켄테데가 빠지게 되면, 어떤 혼란이 올지 알 수 없었다.
반면, 신성 제국은 에크하르트가 황제가 되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다섯 가문의 후계자 중 누군가가 현 교황의 뒤를 이어 다음 대 교황이 될 테니까.
그러나 교황은 그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너밖에 없다, 에크하르트. 너밖에 없어……. 그리스미에와 알켄세나가 손을 잡았다. 이대로라면…….”
너무 말을 많이 한 탓에, 교황은 재차 쿨럭쿨럭 기침을 토해냈다.
그러나 그는 괴로워하면서도 원한을 토해냈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대 교황은 그리스미에와 알켄세나의 아이 중 하나가 될 테니까.
교황과 마리엘라의 교제 사실이 로메네스에 알려진 후, 마리엘라가 실종되었다.
마리엘라가 실종된 이후, 테스티아와 디엘리아는 극도로 사이가 안 좋아졌다.
디엘리아는 테스티아에게 아이 하나 지키지 못하고 무엇했냐고 그들을 질책했고, 테스티아는 디엘리아를 두고 무책임하게 아이를 외면한 주제에 뒤늦게 말만 많다고 따지고 들었다.
만약 로메네스가 두 사람의 교제 사실을 알려온 게 누구인지 발 빠르게 조사하고 일처리를 했다면 마리엘라를 찾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 로메네스는 그들의 가문이 책잡힐 일을 피하기 위하여 침묵했다.
그리스미에와 알켄세나가 서로 손을 잡은 판이었다.
거기에 대항하려면 세 가문이 하나로 모여야만 했다.
그리고 테스티아와 디엘리아, 로메네스를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것은 단언컨대 에크하르트뿐이었다.
“그들이 이 자리에 오르는 것은, 절대 두고 못 본다. 그러니까, 제발 네가…… 네가 해다오.”
교황은 숫제 무릎 꿇고 빌기라도 할 듯한 기세로 애원하고 애원했다.
그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날 수만 있었다면, 교황은 제 아들의 다리라도 붙잡고 매달렸을 터였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친어머니, 오늘 처음 본 친아버지.
그런 그들보다 에크하르트의 기억 속에서 선명한 것은 미혼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그를 키워 준 전 힐켄테데 대공이었다.
전 힐켄테데 대공은 에크하르트를 사랑하는 만큼, 북부도 사랑했다.
그녀는 제 양아들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었고, 그 속에는 북부를 향한 사랑도 들어 있었다.
에크하르트는 그것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그를 이루는 것 중에는 분명 북부에 대한 사랑이 존재했다.
자신의 신체 중 일부를 떼어놓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적어도 그건 에크하르트는 아니었다.
“……저는 힐켄테데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에크하르트는 교황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교황 성하를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생모라는 분 또한 그 급박한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저를 낳아 주셨으니, 감사해야 한다는 걸 압니다.”
에크하르트가 차분히 말을 꺼냈다.
그의 결심은 단호해 보였다.
“그렇지만 세 분 중 제 부모를 정해야만 한다면…… 제게는 저를 키워 주신 어머니가 부모이십니다.”
어쩌면 교황에게는 매정하게 들릴 말이었다.
그러나 전 힐켄테데 대공이 보여 준 사랑이 너무 컸다.
에크하르트는 제 어머니를 배신할 수 없었다.
“에크하르트, 넌 황제가 되기 위해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 준비는 내가 모두 해 두었어. 그리스미에와 알켄세나의 약점도 모두 이 손에 있고…….”
교황이 다급하게 횡설수설하며 이 말 저 말을 늘어놓았다.
그리스미에와 알켄세나의 약점이 손에 있어도, 교황은 그것들을 지금 당장 사용할 수 없었다.
두 가문이 결합한 세력은 현재 신성제국의 정세를 틀어쥐고 있었다.
게다가 현 교황은 곧이라도 죽을 것 같았고, 다음 대 교황조차 그리스미에나 알켄세나의 사람이 될 예정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교황이 두 가문의 약점이 될 만한 것을 들이밀어 봤자, 역공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래서 교황에게는 에크하르트가 절실했다.
그저 제 아들이라는 이유로 반겨 주고, 그 삶을 존중해 줄 수 있다면 좋았겠으나- 모든 관계와 현실이 그렇게 이상적일 수만은 없는 법이었다.
“……제가 신성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없는 이유가 그런 것 때문이 아님을 아시지 않습니까.”
곧 죽을 것 같은 이가 매달리는데, 그걸 거절해야하는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에크하르트의 얼굴이 점차 어두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절을 반복했다.
힐켄테데와 북부를 에크하르트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현존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는 힐켄테데와 북부를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그럼, 저 아이의 치료약은 필요 없더냐?”
돌연, 교황의 손이 오벨리아를 가리켰다.
그의 낯빛은 한없이 어두웠다.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흥정하려 드는 스스로가 비겁하고 비열하고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교황은 마리엘라의 복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황 성하!”
뒤에서 가만히 물러나 있던 오벨리아가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그녀의 목숨을 가지고 에크하르트의 힐켄테데와 경쟁을 시키는 게 아닌가!
오벨리아는 그에게 있어 힐켄테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다.
에크하르트가 북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알았다.
그간, 대공비로서 그와 북부의 일을 상의하고 공유했기에 그녀는 잘 알 수밖에 없었다.
에크하르트가 힐켄테데를 재건하며 해 온 모든 것은 결국 북부를 위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겨우 에크하르트의 출생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이들을 모조리 베어 버렸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힐켄테데가 휘청거리는 시점에서 북부의 위기를 초래하지 않으려면 북부의 주요 세력인 원로와 가신들까지 흔들려서는 안 됐으니까.
원로와 가신들이 흔들리면 가장 먼저 피해를 입는 것은 그들의 아래에서 민생고를 이어가는 평민들이 아니던가.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참고 참았다가, 힐켄테데가 단단해진 시점에, 피해가 길어지지 않게 한순간에 원로와 가신들을 쳐냈다.
그에게 있어 그렇게 되기까지의 시간들은 인고의 시간이었을 터였다.
그렇게 하여 에크하르트가 지킨 힐켄테데와 북부였다.
오벨리아는 그것을 제 목숨과 뒤바꾸라고 할 수 없었다.
“교황 성하, 제 목숨은 제가 알아서…….”
그러나 오벨리아의 말을 끊고, 에크하르트가 불쑥 물었다.
“정말로 바실리스크의 독을 해독할 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