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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124화 (124/136)

124화. 피날레를 위하여(6)

“에크하르트!”

오벨리아가 경악하여 소리쳤다.

그럴 순 없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힐켄테데와 북부는 에크하르트의 전부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그녀 때문에 포기하는가!

그것도, 힐켄테데의 비극을 외면했던 그녀 때문에!

“말해 주십시오. 정말로, 바실리스크의 독을 해독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흔들리지 않고 재차 교황에게 물었다.

교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신성 제국 황실에만 대대로 내려오는 비약이 있다. 그것을 사용하면 바실리스크의 독을 해독할 수 있어.”

설마설마 했지만, 정말로 신성 제국의 황실에는 바실리스크의 독을 치료하는 방법이 있었다.

에크하르트가 침묵에 빠졌다.

깊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오벨리아는 성큼 다가가 그의 팔을 붙잡고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에크하르트, 이건 당신 인생이야. 당신 인생을 이런 식으로 결정해서는 안 돼.”

물론, 오벨리아도 자신이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죽음 앞에서, 혹시라도 모를 대비책으로 에크하르트의 복수심을 이용하려고 했던 그녀였다.

오벨리아도 에크하르트의 인생을 쥐고 흔들려고 했던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녀는 더욱 그를 말릴 수밖에 없었다.

두 번씩이나 자신에 의해 에크하르트의 삶이 뒤흔들려서는 안 되니까.

“오벨리아.”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가 단호한 어투로 반박했다.

“내가 누군가에 의해 삶이 이래라저래라 될 사람으로 보이나?”

오벨리아가 바실리스크의 독을 마실 때, 이미 그녀가 힐켄테데 사변의 진실을 말해 준 이유를 알아차린 에크하르트였다.

그것을 알고도 황실에 복수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의 선택이었다.

“나는 네 의도대로 휘둘린 게 아니라, 내 뜻대로 결정해서 복수를 선택했다. 저들의 오판으로 내 어머니와 내 사람들을 죽인 황실의 인간들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에크하르트는 대체로 도리를 지키고자 했지만, 마냥 선한 인간은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었다면 이민족들이 수시로 쳐들어오는 북부를 지킬 수 있을 리 없었다.

에크하르트는 필요하다면 언제든 자신의 적을 베어 넘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오벨리아 네가 아니었어도, 나는 언젠가 황실이 한 짓을 알아내어 그들에게 복수했을 거라는 뜻이야.”

그리고 단언컨대, 황실은 결국 반드시 에크하르트의 적이 됐을 터였다.

그러니 오벨리아가 하는 말은 틀린 셈이었다.

“내가 말했지. 살아, 오벨리아. 네 목숨은 내 것이니- 나는 네가 죽는 걸 허용할 수 없어.”

에크하르트의 말은 결국, 그가 신성 제국의 황제가 되겠다는 선언이었다.

오벨리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에크하르트, 당신의 힐켄테데는- 북부는 어쩌고. 당신, 전 힐켄테데 대공 전하의 유지를 받들지 않고 살 수 있어? 그걸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전 힐켄테데 대공은 에크하르트가 북부를 지켜 주리란 것을 믿고, 그에게 북부를 맡기는 것에 안심하며 안식에 들었다.

에크하르트가 북부를 떠난다는 것은 전 힐켄테데 대공의 그런 믿음을 등지는 일이었다.

“네가…… 북부를 맡아 줘, 오벨리아.”

에크하르트가 불쑥, 갑작스러운 말을 꺼냈다.

“뭐?”

오벨리아가 납득 가지 않는 말에 눈을 홉뜨며 반문했다.

“너는 현재 힐켄테데의 정통한, 그리고 유일한 핏줄이야. 내가 사라지면 네가 북부를 맡는 건 당연한 일이고. 원로들도 반발하지 않을 테지.”

오벨리아는 이미 로웰스턴을 위시한 원로들을 제압한 적이 있었다.

그녀의 능력은 이미 한 번 원로들의 인식에 크게 각인된 터였다.

게다가, 프렐런트 같은 힐켄테데의 골수 추종자들은 오히려 정통 핏줄이라고 알려진 오벨리아가 대공 자리에 오른다고 하면 더 좋아할지도 몰랐다.

“내가 어떻게 당신을 대신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난 당신처럼 전쟁에 나갈 수도, 강건하지도 못해.”

대대로 힐켄테데 대공은 힐켄테데의 기사단 가장 맨 앞에 나서서 검을 들어왔다.

그래서 이민족들에게 힐켄테데 대공이란 두려움의 상징과도 같았다.

이민족들이 힐켄테데와 심한 전쟁을 벌이는 날은 사실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늘 전쟁을 치르긴 하지만, 가벼운 대치로 끝나는 날도 많았다.

게다가 이민족 중 무력이 강하지 않은 부족들은 쉬이 쳐들어오지 못하거나, 혹은 쳐들어와도 필요한 곡식이나 물품 같은 것만을 훔쳐 달아나곤 했다.

힐켄테데의 명성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 수 있던 것이다.

그러나 오벨리아는 단언컨대 태어나 부채보다 무거운 것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할 수 있어. 네가 살아남기만 한다면, 어쩌면 나보다도 더 잘할 거다.”

“에크하르트, 나는…….”

“너는 나보다 사람을 다루는 데 뛰어나. 무력이 강한 지도자가 반드시 가장 좋은 지도자가 되는 건 아니지 않나.”

“힐켄테데가 지금까지 어떻게 유지되어 왔는지 알잖아. 힐켄테데의 핵심은 누구나 숭상할 만한 힘을 가진 대공이었어.”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두 사람의 말 중 어떤 것도 틀린 것이 없었다.

그의 말마따나, 좋은 지도자가 강한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대로, 힐켄테데는 힐켄테데만의 특수성이 있었다.

“힐켄테데의 기사단은 나 하나 빠진다고 해서 이민족들을 처리하지 못할 만큼 나약하지 않아.”

그러나 그 논란에 에크하르트가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오벨리아, 너는 너만의 방식을 쓰면 돼.”

에크하르트의 두 눈에는 오벨리아를 향한 확실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지금까지 힐켄테데의 방식이 전쟁이었다고 해서, 너도 반드시 전쟁을 치를 필요는 없어.”

오벨리아는 황위 전쟁 중에도 강자들로 인해 피해 입는 약자들을 줄이기 위하여 부단히 애쓰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백성들은 인애와 현명함을 모두 갖춘 그녀를 사랑했다.

북부에서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었다.

“오벨리아, 너는 어쩌면 전쟁보다 더 나은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늘 이민족들과 전쟁을 치러온 에크하르트였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전쟁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해 본 적 따위 없었다.

전쟁은 하면 할수록 서로가 가진 것들을 잃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건 일어나지 않는 게 훨씬 좋았다.

“네가 해 줘, 오벨리아.”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의 두 뺨을 두 손으로 감싸며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서로의 붉은 눈이 서로에게 박혔다.

“너라면 내가 사랑하는 힐켄테데와 북부를 믿고 맡길 수 있어.”

오벨리아는 더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울컥, 목이 멘 탓이었다.

에크하르트는 힐켄테데와 북부도, 그리고 오벨리아도 사랑했다.

그는 아무것도 포기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에게 힐켄테데와 북부를 맡기기로 결정했다.

“너는 날 사랑하니까. 그러므로 절대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망칠 리 없어.”

에크하르트가 제 어머니를, 힐켄테데를, 북부를 사랑하여 그것들을 지켜왔듯이, 오벨리아도 그러리라.

그는 재차 확신했다.

결국, 눈을 꾹 감았다 뜬 오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깨달았다.

평생, 그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없으리라.

왜냐하면- 오벨리아보다, 에크하르트가 그녀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알겠어. 당신 뜻대로 해, 에크하르트.”

그리하여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에게 질 수밖에 없었다.

본디, 그런 게 사랑이었으므로.

***

론체스터 제국은 현재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알렉산드로가 계속해서 일어나질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선황제는 초조해졌다.

건국제가 엉망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건국제는 론체스터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첫째 날 이후 둘째 날조차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끝나 버렸다.

외국의 사신들을 모조리 론체스터에 불러 놓고 이런 꼴을 보였으니,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게다가 건국제가 엉망이 되고 아그네스와 대면한 이후에 선황제는 또 다시 그녀를 찾아갔었지만 소득이라고는 단 하나도 얻을 수 없었다.

아그네스는 입을 꾹 다문 채 알렉산드로한테 먹인 독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아그네스를 처리할 수도 없었다. 알렉산드로가 이대로 숨이 끊어지게 될 경우 아그네스의 아이가 유일한 황가의 희망이 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마도 그녀는 이 사실을 알고 더욱더 버티는 것이겠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이 있다면, 황실과 카테리안느에서 물적 자원을 들이부은 덕에 대륙을 관통하는 철도 사업이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조차도 선황제를 완벽히 안심시킬 수는 없었다.

라이너스는 제 아버지를 죽이고 카테리안느 공작 자리에 오른 인간이었다.

그런 작자를 어떻게 온전히 믿는단 말인가?

알렉산드로가 없으면, 황실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선황제가 책임져야 했다.

선황제가 일찍이 보위에서 물러나 황제 자리를 알렉산드로에게 물려준 까닭이 무엇이던가.

권력은 적당히 누리면서, 그 책임은 지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와 같은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선황제에게 알렉산드로가 필요했다.

결국, 계속 깨어나지 않는 알렉산드로를 보던 선황제는 결단을 내렸다.

“안 되겠다, 황실 부기사단장을 부르도록.”

“폐하, 아이리스 경은 감옥에 있습니다……!”

시종장이 놀라 선황제를 말렸다. 그러나 선황제는 단호했다.

“감히 내 말에 토를 다는 것이냐?”

선황제의 서슬 퍼런 말에, 시종장은 두 번 반대하지 못했다.

‘제가 못 할 말을 했습니까? 분명 힐켄테데 성의 의원들이라면 진즉에 대공비를 치료해냈을 겁니다.’

어쩌면, 에크하르트의 말대로 힐켄테데에서는 이미 오벨리아를 치료할 방법을 찾아냈을지도 몰랐다.

그녀와 알렉산드로가 같은 독에 당했으니, 오벨리아를 치료했다면 같은 약으로 그도 치료할 수 있으리라.

그렇지만 힐켄테데와 알렉산드로는 원수였다.

에크하르트가 알렉산드로를 치료할 방법을 고이 내어줄 리가 없었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지금 당장 북부로 가라. 가서 대공비가 어떻게 되었나 알아 봐.”

그리하여 선황제는 북부에서 치료 방법을 훔쳐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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