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피날레를 위하여(7)
교황은 에크하르트에게 가만히만 있어도 된다고 했으나, 에크하르트는 무지한 군주가 될 생각 따위 없었다.
황제가 무지하면 백성들이 고생하니까.
그리하여 에크하르트는 부지런히 신성 제국에 대해 배우고, 오벨리아는 치료에 전념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에크하르트의 기사가 보고를 해 왔다.
“대공 전하, 선황제가 요즘 자꾸 북부를 들쑤시려 합니다.”
현재, 힐켄테데의 문은 굳게 닫힌 상태였다.
대공비가 아직 의식을 못 차렸기 때문이라고 변명해 두었지만, 사실은 에크하르트와 오벨리아 모두가 힐켄테데 성을 떠나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우연이었으나, 바실리스크의 독을 해독하는 방법은 사일러스가 짐작했던 것과 거의 흡사했다.
다만, 가루다의 불씨를 가지고 신성 제국에서만 사용되는 특수한 제조법을 거쳐야만 바실리스크의 독을 해독할 약을 완성할 수 있었다.
가루다의 불씨로 인해 이미 한 차례 몸 안의 독기를 잠재운 터였기에, 오벨리아의 치료는 수월했다.
결과적으로 피까지 토해가며 진행했던, 조금 무모해 보인 그간의 행동들이 효과가 있었던 셈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위협받거나 정체를 들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긴장 없이 편하게 치료에 전념할 수 있었다.
신성 제국의 제조법으로 인해 오벨리아가 더 이상 피를 토하는 일은 사라졌지만, 기본적으로 그녀가 마신 독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의 해독약은 여전히 독한 편이었다.
허약해진 오벨리아의 신체 상태상 단번에 치료하려다간 죽을 수도 있었기에 상태를 보면서 치료하느라 그녀의 상태는 아주 더디게 나아졌다.
여유가 더 필요했다.
그런 상황에 선황제가 북부를 들쑤신다고 하니 여간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에크하르트가 힐켄테데를 단단히 방비해 두고 오기는 했으나 상대는 선황제였다.
사실상, 론체스터의 진짜 권력을 쥔 자.
그래서 오벨리아는 선황제의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때마침, 에크하르트의 또 다른 기사가 오벨리아에게 보고를 해 왔다.
“대공비 전하,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께서 증거를 찾으셨다고 합니다.”
모든 일이 술술 풀리고 있었다.
오벨리아의 어머니는 라이너스가 전 카테리안느 공작의 암살을 사주했다는 증거도 찾았으며, 그 사실을 라이너스에게 들키지 않고 무사했다.
참, 운명 같은 타이밍이었다.
오벨리아는 곧바로 결심했다.
“에크하르트, 카테리안느를 되찾아야겠어.”
원래는, 황실과 같이 라이너스의 몰락을 보려고 했었다.
라이너스가 당하는 것을 보면 황실에서 몸을 사리거나, 경계심을 더 높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크하르트가 신성 제국의 황제가 되기로 함으로써, 그와 오벨리아의 손에는 새로운 패가 들어온 셈이었다.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패가.
그리하여 그들의 계획은 수정되었다.
라이너스 따위 없어도, 황실이 헛된 희망에 젖게 만들 다른 방법이 생겼으니까.
“어머니께 지금 당장, 라이너스를 끌어내리라고 전해 줘.”
오벨리아는 망설임 없이 기사에게 명령했다.
더는 라이너스를 두고 보아 줄 이유가 사라졌다.
이제, 정당한 카테리안느 공작이 마침내 그 자리에 오를 순간이었다.
***
“카테리안느 공작님! 지금 이게 사실입니까!”
새로운 카테리안느 공작저는 아침부터 시끄러웠다.
분노에 찬 카테리안느의 원로들이 시간을 가리지 않고 저택으로 쳐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라이너스로서는 봉변이었다.
“지금 이게 뭣들 하는 짓인가!”
라이너스가 이를 바득바득 갈다 분노하여 소리쳤다.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가문의 원로들이 가주에게 이따위로 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들어, 원로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다.
하여 라이너스는 요즘 좀처럼 가문의 일을 제멋대로 처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완전히 그를 무시하여, 제멋대로 저택에 쳐들어오기까지 한 것이다.
라이너스의 아버지가 이 자리에 있을 때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사실이 그를 자격지심에 부들부들 떨게 만들었다.
“그건 저희가 물어야 할 질문 같군요, 공작님.”
그리고 그 난장판 속에서 유일하게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근 들어 라이너스가 가장 믿고 있던, 에스더 백작이었다.
에스더 백작이 손짓하자, 그녀의 시종이 한 사내를 끌고 나왔다.
“네가 아는 바를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소상이 밝혀야할 것이다.”
에스더 백작이 엄중한 목소리로 사내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사내가 라이너스의 앞에 폭탄 같은 말을 던져 놓았다.
“……론체스터 제국의 황후 폐하인 아그네스 이멜리언은…… 그러니까, 제 딸입니다. 그 아이의 진짜 이름은 아그네스가 아니라 매리고요.”
매리.
평민 중, 열에 셋은 있을 만큼 흔한 이름이었다.
순간, 라이너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뒷말은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귀족 중, 그런 식으로 아이의 이름을 지을 부모는 없으니까.
아그네스는 평민이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그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사내의 말이 사실이라면, 카테리안느 가문에서 라이너스의 자리가 위태로워지는 것은 둘째 치고 황실을 능멸한 죄도 면할 수 없을 터였다.
아그네스가 더한 사고를 칠까 봐 그녀와 빠르게 손절했다지만, 어쨌든 아그네스가 황후 자리에 오를 때 그녀는 카테리안느 소속이었다.
그것도 라이너스가 직접 입적시킨.
애초에 아그네스가 평민으로서 황후가 되었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녀는 몰락한 왕국의 왕녀인 척하고 황후가 되었다.
그것은 명백히 황실을 기만한 행위였다.
원로들과 라이너스, 모두의 시선이 사내에게 박혀 있었다.
그 사나운 시선들에 사내가 쭈뼛쭈뼛하며 말을 이었다.
“확인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매리의 오른쪽 종아리에 커다란 화상 자국이 있습니다.”
사내는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아그네스가 제 딸, 매리가 아닐 리 없다는 확신.
라이너스의 얼굴이 점차 사색이 되었다.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직감이 느껴졌다.
아그네스는 저자의 딸이었다.
평민인 남자의, 평민인 딸.
“이 사실이 퍼져 나갈 경우, 카테리안느는 더없는 손해를 보게 됩니다.”
에스더 백작이 말을 잇지 못하는 라이너스를 향해 차분히 말했다.
그의 고개가 백작을 향해 휙 돌아갔다.
그러고 보면…… 저 남자만 없었으면 들통 나지 않을 일이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런데 에스더 백작이 굳이, 저 남자를 없애지 않고 여기까지 끌고 와서 모두가 알게 했다는 사실 또한 그제야 인지되었다.
라이너스의 두 눈이 커졌다.
백작이 저 남자를 어떻게 찾아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답은 금세 나왔다.
에스더 백작의 능력으로, 멸망한 왕국의 사람인 아그네스의 아버지를 찾는 건 무리였다.
카테리안느 공작가나…… 힐켄테데 대공가의 능력이 아닌 이상은.
그러니 결론은 하나였다.
에스더 백작은 원래부터 오벨리아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일을 카테리안느 전체의 피해로 퍼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공작님께서 책임져 주십시오.”
에스더 백작이 당당하게 요구했다.
라이너스더러 혼자 독박을 쓰라는 이야기였다.
“애스더 백작!”
라이너스가 분노하여 소리쳤다.
카테리안느 가문의 힘으로 이 일을 무마하면, 가문이 어느 정도 피해당할지언정 훨씬 작은 처벌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황실을 기만한 죄를 라이너스가 가문과 무관한 상태로 받게 되면, 그 벌은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로서는 최악의 가정인 셈이었다.
“솔직히, 라이너스 님께서 지금까지 가주로서 제대로 된 일을 하신 적이 없지 않습니까?”
에스더 백작이 차분하게 따지듯이 말했다.
그러자 그간 불만을 품고 있던 원로들이 하나, 둘 떼 지어 입을 열었다.
“흠, 흠…… 잘못된 사람을 가문에 들여 황후 자리에 올리는 바람에, 카테리안느의 위상만 괜히 깎여나갔고…….”
“게다가…… 라이너스 님께서는 가문의 안주인께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후계자도 아니지요.”
“심지어, 이제는 일리어스 님도 돌아오셨는데…….”
와장창!
원로들의 불만을 듣고 있던 라이너스가 순간, 식탁을 쓸어내렸다.
음식과 접시의 깨진 조각들이 더럽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마치, 현재 엉망이 된 그의 신세처럼.
그러나 라이너스는 자중해야한다는 걸 알면서도, 참을 수 없었다.
원로가 감히 자신을 일리어스와 비교했기 때문이다!
라이너스의 열등감이 그의 머리를 잔뜩 달궈 놓았다.
“하! 이렇게 나에 대한 불만이 많아서 다들 지금까지 어떻게 참으셨나 그래!”
라이너스가 두 눈에 불을 켜고 소리쳤다.
“당신네들이 그래 봤자, 어차피 지금 카테리안느 공작은 나야! 당신들을 원로 자리에 올려두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것도 나라고!”
원로의 자리에 대한 최종 결정권자는 물론, 그 가문의 가주에게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그것은 가주에 의해 독단적으로 정해지지 않았다.
가신과 원로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절차를 충분히 거친 상태에서 가주가 최종 확인을 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지금 라이너스는 그 모든 것을 깡그리 무시하려 들었다.
“저…… 저런!”
나이가 지긋한 원로가 라이너스의 무도한 말에 목덜미를 잡으며 경악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계속해서 소리쳤다.
“설령 내가 어떤 벌을 받더라도, 나는 카테리안느 공작으로 죽고 살 거다! 너희 따위가 날 어떻게 할 수는…….”
그러나 그런 라이너스의 말을 누군가 끊어놓았다.
“아니. 넌 그렇게 할 수 없을 거다, 라이너스.”
식당부터가 워낙 난장판이었기에 눈치채지 못했으나, 어느덧 기사들을 끌고 나타난 일리어스가 라이너스의 앞에 있었다.
“넌 아버지를 살인 청부한 죄로 지금부터 재판에 넘겨질 예정이니까.”
그리고 일리어스가 라이너스의 앞에…… 라이너스가 뒷골목의 이들과 거래한 서류의 원본을 던져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