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피날레를 위하여(8)
제 앞에 던져진 서류가 무엇인지는, 라이너스도 확인할 필요 없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서류를 본 그 찰나의 순간, 라이너스는 아주 빠르게 판단을 마쳤는지 곧바로 일리어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일리어스 형님……! 살려 주십시오, 이게 밝혀지면 전……!”
라이너스가 무릎걸음으로 걸어와 일리어스에게 매달렸다.
이 일이 밝혀지면 라이너스는 당연히 카테리안느 공작 작위를 박탈당한다.
부당한 방법으로 공작 작위를 계승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일이 귀족가에서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일이 종종 발생했기 때문에 제국 법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탁.
일리어스는 제 발에 매달린 라이너스를 매정하게 밀어냈다.
만약에, 라이너스가 자신만 죽이려 했더라면…… 그랬더라면, 일리어스는 라이너스의 만행을 용서하진 못해도 눈감아 줄 순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라이너스가 숨을 거두어 간 이는 그들의 아버지였다.
일리어스도, 오벨리아도 너무 너무 사랑하는 아버지.
무엇보다, 그들을 사랑해주었던 아버지 말이다.
“아버지께 몹쓸 짓을 하고도 무사하길 바랐다면, 그건 네 욕심이고 오만이다. 네가 인간으로서 못 할 짓을 했으니 응당 그에 맞는 벌을 받아야하지 않겠느냐.”
라이너스를 내려다보는 일리어스의 시선은 한없이 냉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너스는 재차 일리어스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제가 죽이려고 했던 형에게 하기에는 대단히 염치없는 짓이었다.
하긴, 라이너스가 사람으로서 염치라는 게 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지만.
“제가 사형이라도 받길 원하십니까? 그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우선 저택 밖으로 이야기가 새어나가지 않게 해주시고…….”
카테리안느에서 힘을 쓰면, 카테리안느 공작을 죽인 라이너스를 사형에 처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라이너스는 그들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다.
철썩.
하지만 대뜸 부엌의 문이 열리고 성큼성큼 다가온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자신의 뺨을 내리치는 순간, 라이너스가 자신이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모조리 오판이었음이 밝혀졌다.
“너는…… 너는 어떻게…… 이 상황에서도…….”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라 있었다.
단언컨대, 이토록 이성을 잃은 어머니의 얼굴은 일리어스와 라이너스 모두 처음 보는 것이었다.
“너는 어떻게 이 상황에도 너 살 생각만 할 수 있는 거야……!”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비명처럼 말을 토해냈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자신이 패륜을 저질렀음을 들켰을 때 인간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까발려진 사실에 대하여 수치심과 죄악감으로 몸부림쳤어야 옳았다.
그러나 라이너스의 얼굴에는 수치심이나 죄악감 따위 없어 보였다.
지금 그에게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살아남겠다는 강렬한 생존 욕구뿐이었다.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은 그것을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제 아비를 죽인 사실이 모두의 앞에서 밝혀진 순간조차도 사람이 저럴 수 있는 것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는 내가 낳은 것이 사람인지 아닌지조차 헷갈릴 지경이구나!”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크게 통탄했다.
그녀가 지금까지 쌓아 왔던 말들을 다다다 쏘아붙였다.
“지금까지 대체 뭐가 널 이렇게 만들었는지 무수한 밤을 고민했다. 혹시라도 이 어미가 부족해서, 이 어미가 너를 잘못 가르쳐서, 내가 너희를 차별해서……!”
카테리안느 공작부인의 어깨가 분노와 절망감으로 인해 들썩거렸다.
그녀가 숨을 몰아쉬며 제 드레스 치맛자락을 꽉 잡아 쥐고 겨우 버티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네가 그런 나쁜 감정들을 품게 된 게 아닐까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어!”
예로부터 자식의 죄는 부모의 죄라고 하지 않던가.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라이너스가 자신을 구금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 고초를 겪은 까닭이었다.
공작 부인은 아들을 이렇게 길러낸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제 손으로 사랑하는 남편을 죽일 아들을 길러내다니!
이런 어리석고 끔찍한 짓이 어디 있단 말인가!
라이너스에게 일리어스와 오벨리아에게 죄를 고하고 잘못을 빌라고 말하는 순간에도, 라이너스의 약점을 잡기 위해 이 저택에 남는 순간에도…….
실은,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은 늘 라이너스의 앞에 마지막 기회가 있길 바랐다.
아무리 라이너스에게 모진 말을 했어도, 제 자식이라고 그렇게 포기할 수가 없었더란다.
그러나 이제는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도 그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자신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수치심과 죄악감도 없는 이런 괴물을 키운 적 따위,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틀렸던 거야. 그냥, 난 너를 낳지 말아야 했어!”
기어코 카테리안느 공작부인의 입에서, 그녀가 이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던 말이 흘러나왔다.
“아니요! 이건 모두 어머니와 아버지의 잘못이 맞으십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라이너스가 울컥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저자를 입양하지 마셨어야지요! 혹은 입양했더라도, 피 한 방울 안 섞인 자식 따위 어차피 자식도 아닌데 버리셨어야……!”
쫘아악!
이번에도 라이너스는 끝까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그의 뺨을 아까보다 더더욱 세게 내리쳤기 때문이다.
얼마나 망설임 없이, 거세게 내리쳤는지, 순간적으로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의 몸은 휘청이고 라이너스는 완전히 고개가 돌아가 있었다.
“어머니……!”
만약 놀란 일리어스가 다급하게 카테리안느 공작부인을 부축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넘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누가 내 자식이 아니야! 일리어스는 누가 뭐래도 내 첫째 아들이다! 내 사랑하는 남편과 내가 가슴으로 품어 낳은, 가장 아프게 낳은 아들이야!”
카테리안느의 원로들은 힐켄테데나 황실의 사람들만큼이나 융통성 따위 찾아볼 수 없고 그 핏줄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이들이었다.
카테리안느 공작 부부는 원로들의 뜻을 모두 꺾고 일리어스를 데려왔지만, 사람이라는 존재가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사실을 알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리하여 원로들은 공작 부부가 보지 않는 곳에서 일리어스에게 가짜라는 폭언을 퍼붓다가, 어느 날 끝내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에게 들키게 되었다.
그 일은 두고두고 아이에게 상처가 될 일이었고, 공작 부부는 평생을 일리어스에게 죄인이 되어 살았다.
카테리안느 공작 부부가 자신들의 첫째 아들을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자리에 올리겠다고 결심한 것 또한 그날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공작 부인의 앞에서 라이너스가 한 말은 그녀의 역린을 건드린 셈이었다.
“하……! 끝까지 가짜 따위만 그렇게 옹호하시는군요.”
돌아간 고개를 원래대로 돌리며 라이너스가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라이너스는 제 어머니를 상처 주고 싶었다.
“라이너스님……!”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들이닥친 기사에게 달려들어 검을 빼든 라이너스가 제 목을 그으려고 목으로 검을 들이댔다.
챙!
그리고 그것을 검을 발도하여 일리어스가 막아낸 것 또한, 아주 찰나에 연달아 일어났다.
라이너스가 손에 들고 있던 검은 어느덧 일리어스의 검에 의해 저 멀리로 날아가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라이너스!”
일리어스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카테리안느 공작부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러나 원하는 대로 죽지 못한 라이너스는 분한 듯이 소리를 내질렀다.
“아아아아아악!”
그런 라이너스를 기사들과 원로들 모두 미친 사람 바라보듯 질린 얼굴로 쳐다보았다.
“왜요! 왜 난 죽는 것도 마음대로 하지 못해야 합니까! 예?! 어차피 다 잃은 거! 그냥 죽게 두면 될 일 아닙니까! 말해 보세요, 어차피 낳지도 마셔야 했다면서요! 그래서 어머니, 당신 말대로 죽어 드리려 했는데 뭐가 문제랍니까!”
라이너스가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을 향해 원망을 토해냈다.
마치, 자신이 죽으려던 것이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의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를 탓하는 어조였다.
공작 부인의 얼굴은 이제 숨이라도 멈춘 것 같은 표정이었다.
퍽!
“악!”
그 순간, 앞서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뺨을 때렸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소리가 났다.
차마 아픔을 참지 못한 라이너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라이너스의 몸이 완전히 무너져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일리어스가 라이너스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린 것이었다.
단언컨대, 일리어스가 라이너스에게 손을 올린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네 놈은, 네 잘못에서 죽음으로 도피하려 들면서……! 그조차 어머니 탓을 해!”
일리어스의 표정이 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라이너스의 몸이 자신도 모르게 떨렸다.
그토록 무서운 일리어스의 모습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이었다.
“네 잘못은 네가 감당해! 어머니한테 뒤집어씌우려 하지 말고! 살아서! 네가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돌아올 비참함을 견뎌! 그게 네가 해야 할 일이다!”
일리어스는 라이너스에게 말한 후, 대답할 틈을 주지 않았다.
일리어스가 기사들에게 손짓해 라이너스를 끌고 가라 일렀다.
“방에 가둬 놓고, 어떻게든 죽지 못하게 해. 식사를 거부하면 억지로 입을 벌리고 쏟아 부어도 되고, 또 죽으려 들면 손발을 모두 묶어 놓아도 상관없다.”
최소한의 인간적인 대우조차 해 주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두 눈이 휘둥그레진 라이너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일리어스!”
그러나 일리어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리어스는 오히려, 라이너스가 방에 갇힐 때까지…… 그 모습을 두고두고 응시했다.
***
그리고 이 사실은 황궁에 있는 선황제에게 빠르게 전달되었다.
“뭐……?! 라이너스가 카테리안느 전 공작을 죽였다는 게 발각되었단 말이냐!”
자신의 기사에게서 말을 전해들은 선황제가 자중하지 못하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