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피날레를 위하여(9)
선황제는 안절부절못하며 걸음을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한 곳에 서 있지를 못했다.
곧 그가 제 기사에게 물었다.
“라이너스는 어떻게 됐지?”
“자택 내에 구금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쓸모없는 놈!”
선황제가 라이너스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며 욕을 했다.
알렉산드로가 라이너스를 골랐을 때부터 딱히 제 아들의 안목을 믿지는 않았다.
선황제가 생각하기에 라이너스는 카테리안느의 삼 남매 중 유일한 하자품이었던 탓이다.
쾅! 쾅!
선황제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말끝마다 황좌의 손잡이를 내리쳤다.
“아비를 죽일 거면, 제 형도 확실히 죽이든가! 아니면 이렇게 됐을 때 대항할 세력이나 제대로 만들어 놓든가!”
일리어스가 붙잡는다고 그대로 붙잡히다니.
선황제는 라이너스가 하는 행동의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반항할 패기조차 없는 놈이었다.
“라이너스 카테리안느를 어떻게 할까요?”
기사가 물었다.
어쨌든, 라이너스는 현재 황실과 함께 철도 사업을 진행 중이니 그를 도와줄지, 황제의 의중을 묻는 것이었다.
“……쯧. 생각을 좀 해 봐야겠다.”
황제가 이마를 짚으며 피곤하다는 듯이 말했다.
생각 같아서는, 라이너스 따위야 어떻게 되든가 말든가 단 하나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알렉산드로가 깨어나지 않는 지금 철도 사업에 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라이너스였다.
게다가 막대한 양의 철광석 또한, 그가 소유한 광산에서 나오고 있었다.
여러모로 라이너스가 사라지면 일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톡. 톡. 톡.
선황제가 손가락으로 황좌의 손잡이를 두들기는 소리만이 알현실을 계속해서 울렸다.
골머리를 싸매 봐도, 사실 라이너스가 전 카테리안느 공작을 해쳤다는 증거는 너무나 명확했다.
그래서 그를 구제하려야, 구제할 방법이 없었다.
물론, 선황제가 무리해서 제 사람들을 움직이면 라이너스의 형량을 줄이는 것쯤이야 가능할 터였다.
그러나 선황제는 라이너스를 위해 그렇게 해 주려는 게 아니라, 카테리안느 공작의 권력을 가진 라이너스가 필요한 거였다.
라이너스가 카테리안느 공작 작위를 빼앗기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솔직히 선황제는 라이너스를 위하여 번거롭게 무언가를 해 줄 생각 따위 없었다.
“아무래도 라이너스 카테리안느의 철광석 광산을 양도받고, 철도 사업에 관련된 전권을 위임받을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생각 끝에, 황제는 라이너스를 지키느니 그가 가진 것을 빼앗아 오기로 했다.
현재, 라이너스를 제외하고 오벨리아를 위시한 카테리안느 일가는 황실에 대한 감정이 결코 좋지 않았다.
살인죄는 최소한 몇십 년을 감옥에서 썩어야 했고, 존속살인은 그 가중치가 더했다.
라이너스가 감옥에 갇히게 되면, 그가 하던 일을 다른 카테리안느 일가의 사람이 위임받게 될 터였다.
그러나 라이너스가 부당하게 카테리안느 공작 작위를 찬탈한 것이기 때문에, 그가 카테리안느 공작으로서 한 모든 것은 무효가 될 수 있었다.
즉, 카테리안느에서 아무 손해도 입지 않고 철도 사업을 포기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 일로 인해 생긴 부채는 라이너스가 모조리 떠안게 된다.
그러나 라이너스에게 그것을 갚을 능력이 있을 리 없으므로, 결국 보증을 선 황실이 그 돈을 모조리 갚게 될 터였다.
그렇게 쭉정이만 남은 라이너스는 단언컨대 철도 사업에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카테리안느가 사업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라이너스가 끌어들인 투자자들 또한 우수수 떨어져 나갈 터였다.
그렇게 되면 결국 철도 사업은 무산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선황제는 그것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현재 황실이 발을 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철도 사업에 관한 많은 투자에 이미 너무 많은 보증이 황후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사업이 실패하고, 라이너스가 감옥에 수감되면 남은 책임은 모조리 황실이 뒤집어쓰게 되는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그러니까 황실의 입장에서는, 무조건 철도 사업을 성공시키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차라리 철도 사업이 빠르게 진행되는 게 나았다.
그래서 선황제가 감옥에 갈 라이너스로 인해 일이 지지부진 되지 않도록, 그것에 관한 권한들을 빼앗아 오려는 것이었다.
일시적으로 황실이 모든 철도 사업에 관한 모든 부채를 책임져야 할 터지만, 그건 어차피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사업이 실패해도, 결국 황실이 책임져야 할 테니까.
그러니 차라리 어떻게든 철도 사업을 성공시키는 게 나았다.
철도 사업만 성공하면 황실은 막대한 돈을 벌게 될 것이고, 그 후에는 지금의 부채 따위 아무것도 아니었다.
“죽일까요?”
선황제의 기사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사람의 목숨을 많이 거둬 본 이의 태도였다.
그러나 선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라이너스 카테리안느가 죽어서 일이 모두 해결된다면 죽이면 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더 일만 커질 뿐이니 내버려 두어라.”
이런 상황에서 라이너스가 죽는다면, 오벨리아는 분명 황실을 의심할 터였다.
자칫하면 그게 황실의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일단, 오늘 밤 라이너스의 저택에 사람을 보내도록. 그를 회유하여 되도록 평화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받아내는 게 가장 상책이다.”
“예, 명령을 받듭니다.”
결국, 선황제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의외로 그날 밤, 선황제의 기사는 아주 쉽게 라이너스와 접촉할 수 있었다.
***
“대상이 미끼를 물었다고 합니다.”
에크하르트의 기사가 그와 오벨리아에게 말을 전해 왔다.
오벨리아가 의도한 대로, 선황제가 라이너스로부터 철광석 광산을 양도받았다.
그 외에 철도 사업과 관련된 권한들도 일체 전부였다.
선황제가 라이너스를 설득할 필요도 없이, 그가 의외로 선뜻 모든 것을 선황제에게 넘겼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라이너스는 일리어스가 제가 하던 사업으로 잘되는 꼴만은 못 보겠다는 심보였을 것이다.
정말이지, 끝까지 못돼먹은 심보였다.
라이너스가 그렇게 행동하리라고, 오벨리아는 이미 예상했지만.
“북부에 있는 선황제의 첩자에게 현 황제가 먹은 독의 해독 방법에 대하여 정보를 흘려라.”
에크하르트가 제 기사에게 명령했다.
모든 부채를 황실이 가져가게 되었으니, 이제는 알렉산드로가 깨어나서 철광석과 철도 사업에 박차를 가해 줄 때였다.
“예, 전하.”
에크하르트의 명을 받든 기사가 재빠르게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 후 며칠 뒤, 마침내 알렉산드로가 깨어났다는 소식이 론체스터 제국 내에 파다하게 퍼졌다.
***
정세가 휙휙 급변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신성 제국 내에 있는 오벨리아는 상당히 평온했다.
에크하르트는 신성 제국의 황제가 되기 위해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고 배워야 할 것도 많아 바빴으나, 그녀는 할 일이 없던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오벨리아는 하루에 한 번씩 교황을 찾아가고 있었다.
“번거롭게 하루에 매번 굳이 시간을 내어 이 늙은이를 찾아오지 않아도 되네.”
오벨리아가 찾아올 때마다, 교황은 퍽 당황스러운 기색이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어쨌든 교황은 그녀의 목숨을 두고 에크하르트와 거래를 한 셈이었다.
그래놓고 오벨리아를 뻔뻔히 보기가 민망했던 것이다.
“제가 신성 제국에서 놀기만 하니, 무료하여 그럽니다.”
오벨리아는 그런 교황의 심정을 모른 척하며 대꾸했다.
그런 식으로 몇 번 더 교황을 찾아가자, 교황은 어느덧 그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오벨리아가 해 주는, 북부에서 에크하르트가 보내던 일상 이야기가 교황의 귀를 사로잡은 덕이었다.
그리하여 서로 함께 마주 보고 앉아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즈음, 오벨리아가 교황에게 말을 꺼냈다.
“에크하르트에게 먼저 다가가시는 게 어떨는지요.”
오벨리아의 말에 교황이 크게 멈칫했다.
그의 두 눈이 확연하게 떨리고 있었다.
한참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느릿하게, 교황이 대꾸했다.
“…………내가 무슨 염치로.”
“생판 처음 보는 아들을 감싸 주시기는커녕, 사랑하는 여인의 목숨을 두고 거래를 청하셨으니 염치없는 행동이긴 하셨지요.”
오벨리아의 말이 적나라하게 교황의 행동에 대한 잘못을 지적했다.
그의 얼굴이 순간 확 붉어졌다.
“큼……. 맞는 말이네만, 참 거침없군.”
교황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워낙 태어난 가문도 가문이고, 그 후에도 교황으로 살아온지라 누가 이런 식으로 그에게 대놓고 지적을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염치없는 행동을 하셔 놓고, 설마 에크하르트가 교황 성하께 먼저 다가오길 바라는 건 아니시겠지요.”
그러나 오벨리아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건……! 그건 아닐세. 내가 어떻게 감히 그런 걸 바라겠나.”
교황이 대번에 오벨리아의 말을 부정했다.
그렇지 않아도 죄스러운데, 그런 것까지 바랄 수는 없었다.
“그럼 교황 성하께서 먼저 움직이셔야지요. 태어나 처음 만난 아버지와 이렇게 데면데면한 사이로 지내고 있는 에크하르트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신다면요.”
오벨리아가 계속해서 말을 덧붙였다.
그녀는 에크하르트의 마음속에 교황이라는 존재가 무거운 짐이 되어 남기를 바라지 않았다.
“몸이 힘드시다고 너무 이렇게 안에만 계시지 말고, 밖으로 나가서 산책도 조금씩 하시고 햇빛도 쐬고 그러세요. 이렇게 뒤늦게 아들을 만나셨으면, 그간 못 해 준 거 최소한 10년은 챙겨 주셔야죠.”
교황은 이제 완전히 넋을 놓은 채로 오벨리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간 얌전히 에크하르트의 일상을 말해 주기만 하던 아가씨에게서 이런 잔소리를 들을 줄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렇게 오벨리아의 말을 들으며 어쩔 줄을 몰라하던 교황이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