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피날레를 위하여(10)
“고맙네.”
교황의 말은 다소 뜬금없었다.
오벨리아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방금 자신이 교황에게 상당히 건방지게 굴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감사 인사를 듣게 될 줄이야.
당연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내 아들을 이렇게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안심이야.”
교황이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전 힐켄테데 대공이 워낙 잘 키워 주셨다만은…… 그래도, 아비 된 마음에 혹여 외로운 부분이 있지는 않을까 걱정을 했다네.”
차근차근 흘러나오는 말에 오벨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죽은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런데…… 알다시피, 내가 그 아이를 만나자마자 아비답지 못한 짓만 한데다가, 어린 날 해 준 것도 없지 않나.”
교황은 조금 전보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 보였다.
“그래서 이런 걸 물어볼 수가 있어야지.”
교황의 나이에 비해 노회한 손이 조심스럽게 오벨리아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대공비가 내 아들의 곁에 있어 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
교황은 진심으로 기쁜 듯이 웃었다.
그 모습은 영락없이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 그 자체였다.
“……제가 있다고 안심하지만 마시고, 그래도 에크하르트와 대화를 해보세요.”
그래서 오벨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아까보다 훨씬 누그러진 말투로 교황에게 말을 건네게 되었다.
그녀의 채근에, 교황이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미소했다.
“현명한 아가씨가 하는 말이니, 내 꼭 듣겠네.”
잡힌 손의 온기가 유독 따뜻하게 느껴졌다.
***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다.
그사이, 에크하르트와 교황의 사이는 알게 모르게 제법 괜찮아졌다.
교황은 부모로서 하면 안 되었을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했고, 자신의 사과를 받아들여 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에크하르트는 그에 대하여 아무 말도 없었지만, 교황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은 차차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신성 제국에서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를 극진하게 대하니,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힐켄테데의 기사가 에크하르트에게 다급하게 보고를 해 왔다.
“대공 전하, 아무래도 두 분이 대공성에 계시지 않는다는 걸 선황제가 알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급했던 것과 상반되게,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는 비교적 크게 놀라지 않았다.
거의 한 계절을 선황제의 눈을 가려 왔다.
주인이 없는 힐켄텓제의 성에 주인이 있는 척 속이는 것도 한계가 있으리라, 처음부터 예상했던 바였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그저 때가 왔음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는 함께 교황을 찾아갔다.
“아무래도, 이제 론체스터로 돌아갈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에크하르트가 교황에게 말을 꺼냈다.
그러자 교황이 크게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날이 그렇게 되었구나.”
교황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20여 년 만에 만난 아들을 보내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애써 아쉬움을 감추었다.
그것을 보던 에크하르트가 잠시 간의 침묵 끝에 툭 하니 말을 꺼냈다.
“……다녀오겠습니다.”
정말 별거 아닌 말이었으나, 교황의 두 눈은 마치 아주 대단한 말을 들은 것처럼 휘둥그레 커졌다.
두 눈을 한동안 제대로 감지도 못하던 교황이 환하게 웃으며 에크하르트에게 인사했다.
“조심해서 다녀오려무나, 에크하르트.”
교황이 너무나 기뻐하니 에크하르트는 도리어 멋쩍은 기색이었다.
본디 무뚝뚝한 성격의 에크하르트였으니까.
오벨리아가 옆에서 에크하르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툭 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오늘 안에 그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을지도 몰랐다.
“……예. 아버지도, 몸 건강히 계십시오.”
간단한 말이었으나, 그보다 에크하르트의 진심을 담을 수는 없는 말이었다.
그로 인해 교황이 더욱 눈시울을 붉혔다.
20여 년 만에 만난 부자는 그리하여 또다시 한동안 떨어지게 되었다.
***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는 북부의 성이 아니라, 론체스터에 있는 수도의 타운하우스로 곧바로 돌아왔다.
그 후, 두 사람은 선황제를 알현했다.
선황제는 독에 중독되었던 오벨리아가 깨어나 자신을 찾았다는 말에, 냉큼 알현을 허락했다.
평소에 냉철한 이성을 자랑하는 선황제지만, 그간 알렉산드로를 깨우기 위하여 별짓 다 안 해 본 것이 없었는데 그 해결책이 눈앞에 있으니 마음이 조급해진 모양이었다.
“선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건강이 좋아졌다니, 정말이구나.”
선황제가 눈으로 오벨리아의 상태를 살폈다.
그녀의 건강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알렉산드로가 멀쩡하게 깨어날 수 있을지 없을지를 재기 위함이었다.
그런 선황제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내며, 오벨리아가 선황제의 시종에게 약을 건넸다.
“제가 깨어나서 지금까지 쭉 먹어 온 약입니다. 아그네스 이멜리언이 사용한 독을 중화시켜줄 겁니다.”
“이 약의 정체가 무엇이더냐? 황제에게 먹이는 것인데, 약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는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시종에게 약을 건네받은 선황제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오벨리아에게 물었다.
그 말투에 의심이 가득가득했다.
하긴, 알렉산드로에게 가지고 있는 오벨리아의 원한을 선황제도 알고 있거늘, 대번에 그녀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약의 원료가 되는 약초들을 황궁의에게 보내두겠습니다. 저희가 드린 약이 의심스럽다면, 보낸 제조법대로 다시 제조하여 황제 폐하가 드시게 하면 될 겁니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마치 선황제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던 것처럼 의연하게 대처했다.
“황제가 깨어나면, 힐켄테데에 큰 상을 내릴 것이다.”
선황제가 찜찜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황궁의들은 결국 알렉산드로를 깨우지 못했다.
오벨리아의 어딘가 석연치 않은 호의나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결국, 선황제는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가 전한 약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선황제는 황궁의들을 닦달하여, 약에 문제가 없음을 몇 번이고 확인받은 뒤에야 그것을 알렉산드로에게 사용했다.
그렇게 일주일 뒤, 마침내 독에 중독되어 있던 알렉산드로가 눈을 떴다.
***
알렉산드로는 눈을 뜬 뒤, 오벨리아만을 불러들였다.
그녀는 에크하르트가 알현실 밖에서 기다리는 것을 조건으로, 알렉산드로의 부름을 받아들였다.
선황제가 내리겠다고 한 상에 대하여, 요구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 날 도와준 거지, 오벨리아?”
그러나 오벨리아가 알현실에 들어서자마자, 알렉산드로는 저딴 말을 물어왔다.
그의 얼굴에는 채 숨기지 못한 어떤 기대가 떠올라 있었다.
오벨리아의 미간이 팍 찌푸려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 폐하,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오벨리아가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알렉산드로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그러나 그는 마치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말을 이었다.
“혹시 내가 죽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나?”
알렉산드로의 말에서 드러나는 미묘하게 들뜬 듯한 그 감정.
그것이 오벨리아의 신경을 갉아 먹었다.
그리하여 그녀가 참지 못하고 날카로운 말을 꺼냈다.
“……죽었다 살아나더니 미치셨습니까? 지금 감히 무슨 오해를 하는 겁니까?”
알렉산드로는 대체 무엇을 바란 것인지, 알현실에 자신과 오벨리아만을 남겨 둔 터였다.
그로 인해 그녀는 제 속내를 감추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판에…….”
오벨리아가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알렉산드로는 마치 작정한 사람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런 판에 왜 나를 살려 줬냐는 말이야.”
알렉산드로에게는 오벨리아가 자신을 다시 일어나게 해 줬다는 사실이 상당히 의미가 큰 모양이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의미 부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오벨리아는 기가 막힌 심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저 정도면 망상이 병이었다.
“제가 황제 폐하의 부름에 응한 것은 일전에 선황제 폐하께서 황제 폐하를 깨워내면 주시기로 한 대가를 받으러 왔을 뿐입니다.”
“……대가?”
그제야 알렉산드로의 얼굴 위에 드러났던 기묘한 설렘이 한 풀 가라앉았다.
오벨리아는 그것이 아예 푹 꺼지길 바라는 마음이 되어 입을 열었다.
“곧 열릴 황실 연회에, 힐켄테데가 귀족들을 대표하여 축사를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황제가 죽을 뻔했다 살아났으니, 당연히 그를 축하하는 연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오벨리아는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힐켄테데가? 왜?”
알렉산드로의 눈매가 의심으로 인해 가늘어졌다.
왜냐하면, 힐켄테데가 축하 연회에서 축사를 하는 것은 전적으로 황실에 좋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일견, 황실과 힐켄테데가 그 좋지 않던 사이를 회복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굳이 그것을 오벨리아가 나서서 자처하는 게 알렉산드로는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려운 요구도 아닐 텐데요. 아니면, 어려운 요구를 하길 바라십니까?”
이미 선황제가 뱉어놓은 말이 있고, 무려 황제의 목숨을 구했는데 애초에 아무것도 내리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누워만 있던 황제를 깨웠는데도 아무 보상도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황실은 그 치졸함으로 인해 체면이 상할 터였다.
오벨리아가 한 요구는 오히려 한 일에 비해 가벼운 것이었다.
게다가 그 요구로 인해 이득을 보는 것은 결국 황실이었다.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대공비의 뜻대로 하라.”
결국, 알렉산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찜찜하긴 했어도, 오벨리아의 말을 거절할 마땅한 명분이 없는 탓이었다.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그럼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오벨리아는 제 목적을 이루자마자, 알렉산드로에게 인사를 건넨 뒤 곧바로 돌아섰다.
그와는 일분일초도 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가 버리려는 그녀의 등 뒤로, 정말이지 뜬금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그러니까…… 라이너스는 어떻게 처리해 주길 바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