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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129화 (129/136)

129화. 피날레를 위하여(11)

사람이 지나치게 기가 막히면 말을 잃는다고 했다.

그리하여 오벨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알렉산드로는 그녀가 돌아본 것에 무슨 기대를 품은 것인지, 말을 늘어놓았다.

“라이너스가 전 카테리안느 공작을 살인 교사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며? 말해 봐, 네가 원하는 대로 처벌해 줄 테니까.”

순간, 오벨리아는 눈앞이 핑 도는 듯 했다.

물론, 아파서가 아니고…… 지나치게 열이 받은 탓이었다.

“너.”

오벨리아가 알렉산드로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그녀가 성큼성큼 황좌의 앞으로 단을 걸어 올라와도 막아서지 않았다.

평소라면, 오벨리아도 그런 알렉산드로를 괴이쩍게 여겼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를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를 죽인 게 마치 온전히 라이너스의 잘못이기만 한 것처럼 굴다니.

이토록 뻔뻔할 수가 없었다!

오벨리아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녀는 지금 당장이라도 저 뻔뻔한 말을 내뱉는 입을 틀어막고 알렉산드로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그러지 않은 것은 그나마 남은 오벨리아의 마지막 이성 덕분이었다.

“저번부터 생각한 건데, 미쳤어?”

오벨리아가 앉아 있는 알렉산드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내가 너한테 돌아가리라는 가정 따위를 할 수 있지? 내 아버지를 죽이고! 나를 죽인 네가!”

알현실 안에 알렉산드로가 모든 사람을 물려두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오벨리아는 이 울분을 토해내지도 못했을 테니까.

“내가 죽인 게 아니라 라이너스가 살인을 청부한…….”

그러나 오벨리아가 화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로는 지독하게도 몰염치했다.

“네가 라이너스와 작당한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사람을 바보 취급해도 유분수지……!”

오벨리아가 거친 숨을 내쉬며 씩씩거렸다.

매사 이성적이고 냉철했던 그녀로서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알렉산드로가 황급히 말을 돌렸다.

“어쨌든, 공작이 먼저 간 덕에 널 곧바로 죽이지 않아서 네가 살았잖아! 그러니까……!”

쫘악!

그 순간, 도저히 참지 못한 오벨리아로 인해 알렉산드로의 고개가 돌아갔다.

“감히, 감히 네가, 지금……!”

오벨리아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온 몸을 떨었다.

그러니까 알렉산드로는 지금 전 카테리안느 공작이 죽으며 시간을 번 덕에, 그녀가 죽지 않았으니 된 것이 아니냐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인간이 비도덕적이고 몰염치하더라도, 인간이라면 이토록 뻔뻔할 수는 없었다!

“네가 날 때려?!”

처음으로 오벨리아에게 얻어맞자 한동안 정신이 멍했던 알렉산드로의 두 눈에 불꽃이 튀어 올랐다.

그 순간, 그가 오벨리아의 손목을 확 잡아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대로 황좌에 내리눌렀다.

알렉산드로와 그녀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 코끝이 맞닿았다.

“네가 그토록 원하던 황후의 자리를 준다잖아! 그런데 뭐가 그렇게 불만…… 아악!”

강제로 황좌에 앉혀진 오벨리아는 참지 않았다.

그녀가 그대로 머리를 알랙산드로의 턱을 들이박았다.

그 충격에 그대로 그가 뒤로 넘어졌다.

오벨리아도 골이 울리는 아픔에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오벨리아!”

콰당!

안에서 난 큰 소리에 에크하르트가 알현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서던 시종과 기사들은 어느덧 바닥에 제압당해 있었다.

그리고 들어서자마자, 상황을 빠르게 파악한 에크하르트가 알현실의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이거 여십시오……!”

알현실은 내문과 외문, 이중문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보통 시종과 기사들은 외문 밖에 대기했다.

그 때문에 한발 늦게 쫓아온 이들은 에크하르트가 잠가 버린 내문 밖에서 문을 열라며, 문을 마구잡이로 두들기고 있었다.

“너, 오벨리아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에크하르트가 넘어져 있는 알렉산드로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렸다.

악력이 어찌나 센지, 알렉산드로의 키가 그리 작은 편이 아니었는데도 한 손으로 그를 들어 올릴 지경이었다.

오벨리아가 그것을 보며 비척비척 황좌에서 일어났다.

알렉산드로가 잡고 있었던 손목이 욱신거렸다.

그 찰나에, 그가 무슨 짓을 하려고 저를 그렇게 억압했던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에크하르트에게로 다가갔다.

“놔줘, 에크하르트.”

아직은 여기서 일을 벌일 때가 아니었다.

대공비와 대공만 있는 알현실 안에서 황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만 난감해질 터였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로의 멱살을 한참을 잡고 있던 에크하르트가 이를 악물며 알렉산드로를 내팽개쳤다.

“쿨럭……!”

멱살을 잡고 높이 들어 올렸던 탓에, 숨이 막혔는지 알렉산드로가 기침했다.

밖에서는 여전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폐하!”

오벨리아가 알렉산드로에게로 다가가 몸을 낮추었다.

그녀가 작게 속닥였다.

“네가 방금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카테리안느와 힐켄테데에 의해 보복당하고 싶지 않으면, 지금의 일은 네가 알아서 잘 얼버무려.”

라이너스의 공작 작위는 취소될 예정이었다.

그러면서, 카테리안느 공작부인과 일리어스가 다시 카테리안느의 전권을 쥐게 되었다.

그러니 여기서 오벨리아에게 방금 알렉산드로가 하려던 짓이 들통나면, 그녀의 말대로 힐켄테데와 카테리안느를 동시에 적으로 돌리는 게 되는 셈이었다.

그리고 지금 황실에는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그 두 가문을 감당할 여력 따위 없었다.

“큭…….”

알렉산드로가 굴욕감에 몸을 떨었다.

아까 분노에 어쩔 줄 모르던 오벨리아와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에크하르트가 알렉산드로에게로 다가와, 그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이거, 놔……!”

알렉산드로가 에크하르트의 손을 내치며 휘청거렸다.

중심을 잡아 넘어지는 꼴을 겨우 면한 알렉산드로가 에크하르트를 노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와 팔짱을 끼며 그를 이끌었다.

“가자, 에크하르트.”

찰나에 에크하르트와 알렉산드로의 매서운 시선이 오갔다.

그리고 시선을 먼저 피한 것은 알렉산드로였다.

에크하르트의 두 눈이, 정말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알렉산드로를 물어뜯을 것처럼 사냥 직전 맹수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의 얼굴이 재차 굴욕감으로 달아올랐다.

그러나, 황성에서 기사를 상대로만 검을 들어본 알렉산드로와 어린 날부터 전장에 나섰던 에크하르트의 차이는 좁힐 수 없는 것이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에크하르트가 문을 열자마자 기사들이 달려와 알렉산드로를 둘러쌌다.

다른 기사들이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의 앞을 막아섰다.

“……보내 줘라.”

알렉산드로가 이를 악물며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알현실 앞을 지키던 기사들은 그의 측근이었기 때문에, 황제의 말에 오히려 반발했다.

“하지만 폐하……! 힐켄테데 대공은 함부로 폐하의 알현실에 쳐들어갔……!”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애초에 너희가 잘 막았으면 될 일이 아니냐!”

퍽.

알렉산드로가 신경질을 부리며 제 말을 막은 기사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기사들이 알렉산드로의 명령에 따라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의 앞에서 비켜섰다.

알렉산드로는 제 기사들에게 성질을 내면서도, 끝내 그런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를 붙잡지는 못했다.

***

“……오벨리아, 괜찮나?”

대공가의 타운하우스로 돌아가는 마차 안, 에크하르트가 조심스레 오벨리아에게 물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정황상 그는 그녀에게 불쾌한 일이 있었으리라고 짐작했다.

“……당신이 제때 들어와 줘서 괜찮아.”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에게 툭 기대며 말했다.

저를 억압하던 알렉산드로의 손이 생각나, 잡혀 있던 손목부터 그녀의 등골을 타고 기분 나쁜 감각이 흘렀다.

“……멍이 들 것 같군.”

에크하르트가 벌겋게 부은 오벨리아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아 올렸다.

알렉산드로가 어찌나 사정없이 잡았던지, 이미 조금쯤은 푸르게 변해 있었다.

금세 에크하르트의 두 눈에 분노가 차올랐다.

그와 반대로, 자국이 난 그녀의 손목을 매만지는 손길은 안타까움을 드러내듯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사실 안 괜찮아.”

그 조심스러움에, 오벨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어리광을 부리듯이 말했다.

“기분 나쁘더라.”

툭, 던져진 오벨리아의 말에 에크하르트가 그녀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물론, 그 손길은 알렉산드로와 달리 새가 날아들듯 아주 가볍디 가벼웠다.

“미안해, 더 빨리 들어가지 못해서.”

에크하르트가 한없이 애타는 눈으로 오벨리아의 손목을 바라보며 사과했다.

그 조심스러운 애정이 그녀를 사로잡았던 기분 나쁜 감각을 몰아내고 심장 위로 내려앉았다.

“……그래도 당신이 와 줘서 좋았고, 또 날 위험하게 두지 않으리라 믿었어. 그래서 알렉산드로한테 그렇게 당당하게 굴 수 있었던 거고.”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의 허리에 조심스레 팔을 감으며 안겨들었다.

쿵, 쿵, 빠르게 뛰는 그의 심장 소리가 오히려 그녀를 안정시켰다.

“……오벨리아.”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의 갑작스럽지만 긴밀한 접촉에 어쩔 줄 모른 채로 굳어 버렸다.

겨우 포옹일 뿐인데, 그렇게 굳은 그가 어쩐지 우습고 귀여워서 그녀는 웃음을 작게 터트렸다.

“마주 안아 줘, 에크하르트.”

오벨리아가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그제야 에크하르트가 어설픈 자세로 그녀의 등과 허리에 팔을 둘렀다.

두 사람은 그렇게 타운하우스에 마차가 도착할 때까지 서로의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

며칠 뒤, 알렉산드로의 복귀를 축하하는 연회 날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약속대로 힐켄테데에서 축하사를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황제로서 힐켄테데에 진 빚을 가장 쉽게 갚을 수 있는 방법이기에 오벨리아의 제안을 따랐으나, 알렉산드로는 축사를 위해 단상에 선 그녀를 불안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그네스의 아이가 혼전에 임신된 아이라는 진실도 터졌겠다, 알렉산드로는 더 이상 걸릴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오늘의 축사는 저 대신…… 저분이 해 주시기로 했답니다.”

오벨리아가 누군가와 똑 닮은 사내를 자신 대신에 단상에 올리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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