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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130화 (130/136)

130화. 마침내, 드디어, 완벽히(1)

남자가 올라오는 순간, 알렉산드로는 모든 세상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남자의 얼굴에서 떠오르는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가 순간 이성을 잃고 외쳤다.

“당장 저 남자를 끌어내려!”

그러나 황실 기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가 당황하여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그리고 그런 그의 눈에 일리어스가 들어왔다.

알렉산드로는 그제야 연회장에 들어왔던 처음과 달리, 어느덧 이곳의 기사들이 전부 일리어스의 사람들로 교대되어있음을 깨달았다.

알렉산드로는 제가 달려가서라도 남자를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에크하르트가 알렉산드로를 막아섰다.

“흠흠, 귀족 나리들께 인사 올립니다. 저는 마티어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찰나에 남자가 기어코 입을 열었다.

“이 제국의 황후 폐하인 아그네스 이멜리언, 아니, 평민 매리의 아버지이지요.”

자신을 마티어스라고 소개한 남자에 의한 파문이 빠르게 연회장 전체로 퍼졌다.

마티어스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매리는 왕국의 왕녀님이 아니라, 왕녀님의 하녀였습니다. 여기, 이게 매리가 왕국의 하녀 시험에 통과하려고 공부했던 흔적들입니다.”

마티어스가 낡고 거친 종잇장들을 내밀었다.

필기감이 부드럽지 않아, 귀족들은 잘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오벨리아가 그 옆에서 모두의 앞에 다른 종이 한 장을 보여 주었다.

“에피메스테르의 필적 감정서입니다. 현 황후 폐하의 필적과 이 종이들에 적힌 필적이 정확히 일치한다는군요.”

알렉산드로는 말이 없었다.

그는 이미, 이 상황에서 자신이 어떤 말을 하는 소용이 없을 것을 깨달았다.

“매리의 오른쪽 종아리에는 커다란 화상 자국이 있습니다.”

마티어스는 제 말을 입증하려는 듯 더욱 명확한 증거를 제시했다.

“맞아요, 제가 봤습니다.”

“저도 봤어요. 하도 선명해서 기억하고 있죠.”

어느새 북부에서 돌아온 레베카와 한동안 황후의 시중을 들었던 엘라사나가 마티어스의 말에 맞장구쳤다.

엘라사나는 그렇더라도, 레베카는 아그네스가 직접 자신의 측근이라며 소개한 적이 있었으니 더욱 그 말에 신빙성이 갔다.

아그네스가 이멜리언 백작가에 입적되기 전 신분은 망국의 왕녀로 알려져 있었다.

이제는 연회장 내가 시끄러울 정도로 수군덕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사람들이 뭐라고 속닥거리는지는 굳이 상세하게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알렉산드로도 알 수 있었다.

황실이 또 아그네스 이멜리언, 아니, 매리에게 기만당했다.

평민에게, 황실이, 지금까지 내도록.

그 사실이 명확해지는 순간, 황실의 위신은 더는 추락할 수 없을 만큼 밑바닥을 뒹굴게 되었다.

알렉산드로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망할 아그네스 이멜리언!

그는 소리라도 내지르고 싶었으나, 이 상황에 더 이목을 끌어 봤자 제 손해임을 모르진 않았다.

무언가, 이 상황을 타개할 것이 필요했다.

아그네스 이멜리언에게 또 다시 황실이 속았다는 사실보다 귀족들의 이목을 끌 그 어떤 것.

그 순간, 알렉산드로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만한 커다란 소문거리가 될 것.

알렉산드로가 가지고 있는 패는 단 하나뿐이었다.

“일주일 뒤에!”

알렉산드로가 돌연 목소리를 높였다.

본래는 한 달 뒤에 깜짝 발표할 생각이었으나, 이제는 그럴 여유 따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소 무리수를 두더라도 일을 진행하기로 했다.

황제가 돌연 목소리를 높이자, 저들끼리 떠들던 귀족들의 시선이 알렉산드로에게로 집중되었다.

그가 여유로운 척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철도 열차의 운행식을 열겠다.”

알렉산드로의 입에서 기어코 돌이킬 수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토록 시끄럽던 귀족들이 사이로 순식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황실이 벌이는 철도 사업은 단순히 황실의 이득만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무려 대륙을 관통하는 철도 사업이었다.

이것의 시발점이 제국의 수도와 그 인근 지역들이었다.

이 운행식이 성공적으로 끝이 나면, 본격적으로 대륙 전역에 철도를 놓는 일이 시작될 터였다.

이미 각국의 사절들이 그로 인해 여러 번 제국을 다녀간 터였다.

수도에서의 철도 열차가 성공적으로 운행되면, 곧바로 다른 왕국들과의 협약대로 론체스터의 주도하에 그 나라들과도 이어지는 철도를 놓을 예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정말로 론체스터 제국이 이 대륙의 중심이 되는 것이었다.

“드디어……!”

누군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철도 사업은 론체스터의 모든 국민이 집중하고 성공하길 기원하던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성공만 하면 제국의 위상이 달라질 것 아닌가.

그때, 오벨리아가 끼어들었다.

“한 번도 시범 운행을 해 보지 않은 열차가 아닙니까. 그것을, 일주일 뒤에 운행식을 여시겠다는 건 무리가 아닌가 합니다.”

알렉산드로의 말에 갑작스럽게 들떴던 분위기가 오벨리아의 말에 순식간에 도로 가라앉았다.

그러고보니, 가장 중요한 단계를 아직 거치지 않았던 것이다.

“제국의 내로라하는 기술자들이 내 명령을 받고 만든 것이다. 감히 황제인 내 판단을 의심하는 것이냐?”

그러나 이번만큼은 알렉산드로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에드먼드가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폐하, 열차에 탈 이들은 제국의 귀한 백성들이 아닙니까? 만에 하나라도 열차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들이 다치게 됩니다.”

“맞습니다, 폐하. 시범 운행 이후 운행식을 거행하시는 게 맞는 줄로 사료되옵니다.”

일리어스도 나서서 말을 거들었다.

힐켄테데의 대공비부터 이프넌트 후작, 황실 기사단장이 똘똘 뭉쳐 황제를 막아서자 귀족들의 여론도 그리로 쏠리는 듯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또 대화에서 밀려 운행식을 오벨리아의 말대로 뒤에 치러야 할 판이었다.

알렉산드로가 이를 악물었다.

매번, 제 뜻대로 되는 법이 없었다.

“이들의 말대로 하시는 게 어떠신지요, 폐하? 무어 그리 급한 게 있으셔서 굳이 운행식을 빠르게 열고 싶어 하십니까.”

그리고 거기에 에크하르트가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붓듯이 알렉산드로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에크하르트의 말은 알렉산드로가 사람들이 잊었으면 하는 급한 일, 즉 황실이 아그네스에게 기만당했다는 사실을 굳이 콕 집는 셈이었으니까.

그리하여 순식간에 울컥한 알렉산드로가 재차 단호하게 선언했다.

“아니, 정확히 일주일 후, 열차의 운행식을 열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도록, 알렉산드로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백성들이 그토록 걱정된다니, 화물 열차를 사용해 운행식을 하면 되겠지!”

알렉산드로의 시선이 오벨리아에게 딱 박혀 있었다.

어디 이의를 제기할 테면, 해 보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마치, 그와의 말씨름에서 진 듯한 모양새였다.

알렉산드로의 입가에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한 미소가 내걸렸다.

열차의 운행식까지는, 이제 일주일이 남게 되었다.

***

연회가 끝이 난 후, 알렉산드로는 아그네스의 궁으로 쳐들어갔다.

어쨌든 황손을 잉태한 상태이기에, 황제를 독살하려다가 걸렸으나 감옥에만은 집어넣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그리하여 아그네스는 아이의 건강을 위하여 산책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제 방 밖으로도 나올 수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아그네스 이멜리언!”

알렉산드로는 아그네스를 발견하자마자,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

이제 아그네스의 배는 해산일을 얼마 남겨 두지 않아 확연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종종 제 처지에 분노하여 패악을 부리고 스스로의 성질에 못 이겨 제대로 식사도 못 하는 탓에, 그녀의 팔다리는 상당히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 따위 개의치 않았다.

“감히 네가 날 속여! 평민 주제에……!”

알렉산드로가 아그네스를 마구잡이로 잡아 흔들며 분노했다.

그러자, 순간 아그네스가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속은 게 바보지……! 알렉산드로, 네가 멍청해서 나한테 속아 놓고 왜 그걸 내 탓을 해!”

아그네스는 더없이 즐겁다는 듯이 오래간만에 신나게 웃어댔다.

그녀는 눈앞의 알렉산드로 따위 단 하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이 미친년! 너 때문에 황실이 또 어떤 망신을 당했는지 알아? 죽여 버릴 테다……!”

알렉산드로가 진짜로 아그네스를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두 손으로 그녀의 목을 감쌌다.

그러자, 아그네스가 또 다시 낄낄거렸다.

“날 죽이게? 오! 알렉산드로. 드디어 네 아이까지 죽이는 패륜을 저지르는구나!”

“닥쳐! 네가 겨우 그딴 핏줄을 타고난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네 아이 따위 필요 없었어!”

혈통도, 권력도 무엇 하나 없는 어미를 둔 죄로 알렉산드로는 어린 날 자신이 이 황궁에서 얼마나 무시당했는지를 기억했다.

그리하여 그는 제 자식만큼은 완벽한 혈통을 가지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도 물 건너가 버렸다.

그에 대한 알렉산드로의 분노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리하여 그는 진짜로 아그네스의 목을 쥔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어윽……! 끅…… 끅……! 알, 렉……산, 드로……!”

숨통이 막혀 오기 시작하자, 그전까지는 낄낄거리며 알렉산드로를 비웃던 아그네스도 상황의 심각함을 느꼈는지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이 제 목을 조르는 그의 두 손을 긁어댔다.

그러나 알렉산드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너 같은 걸 황궁에 두는 게 아니었어. 일이 이렇게 된 건, 다 네 탓이라고!”

알렉산드로는 분노를 터트리며 모든 일을 아그네스의 책임으로 전가했다.

그는 말을 하면 할수록, 정말로 그녀만 없다면 모든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로의 두 손에 더더욱 힘이 들어가던 찰나였다.

무언가가, 뚝, 뚝, 떨어지며 그의 발치를 적셨다.

알렉산드로의 고개가 홱 아래로 내려갔다.

그 아래에는…… 아그네스의 다리 사이로 흐른 피가 어느덧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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