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복수의 끝은 아름답지 않다(2)
지난밤, 오벨리아는 몰래 선황제에게 만남을 청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요청에 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오벨리아가 알렉산드로의 치명적인 약점을 선황제에게 내밀었기 때문이다.
“네가 한 말이 사실이더냐?”
그리하여 오벨리아를 보자마자, 선황제는 본론부터 꺼내들고 말았다.
그만큼 사안이 다급한 탓이었다.
“사실입니다. 알렉산드로는 국고를 빼돌려서 외국 사신들에게 건넸어요.”
그만큼이나 급한 사안.
그건 바로, 본래 철도 사업에 들어갔어야 할 예산이 어디로 빼돌려졌는지에 관한 일이었다.
그리고 오벨리아는 이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아는 알렉산드로는 이미 일전에도, 툭하면 물질로 사람을 끌어들이려고 했던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벨리아는 힐켄테데의 사람들을 시켜 알렉산드로와 외국 사신들 간의 관계를 알아보았다.
본래 들어갔어야 할 예산이 눈에 띄게 부족해질 만큼 끌어다 썼으니, 티가 나지 않을 리 없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 오벨리아는 증거를 잡아낼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그 증거에 의하면…… 론체스터에서 다른 나라에 철도를 놓을 수 있게 된 것은 외교를 잘해서가 아니었다.
그만큼 알렉산드로가 협상하러 온 외교관들에게 ‘대가’를 주어서였을 뿐.
“이런 미친놈!”
쾅!
선황제가 참지 못하고 앞의 탁자를 내리쳤다.
그래도 유일하게 남은 제 핏줄이기에 무슨 사고를 치든 어쨌든 수습을 도와주었다.
그런데 이제는 하다못해 능력이 달려 국고를 외국으로 방출하고 있었다.
어쩌자고 이런 놈이 론체스터의 황제로 있는 것인지, 통탄할 노릇이었다.
“이걸 나한테 먼저 말해 주는 이유가 무엇이냐.”
선황제가 오벨리아에게 물었다.
분노한 것과는 별개로, 그는 역시 군주답게 빠르게 이성을 차렸다.
왜냐하면, 그녀의 입장에서는 굳이 이 사실을 선황제에게 미리 알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알려지는 순간 알렉산드로는 물론 황실조차 위태로울 일이었다.
황제가 직접 백성들의 세금으로 채워진 국고를 외국으로 빼돌리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안해 드릴 거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벨리아 역시 긴 서론을 늘어놓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곧바로 제 본심을 털어놓았다.
“아시다시피, 론체스터는 곧 빚더미 위에 앉게 될 겁니다.”
선황제가 침음을 삼켰다.
열차 운행식은 최악의 형태로 강제로 끝나 버렸다.
백성들은 황실을 상대로 보상을 요구하고 있으며, 투자자들은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서라면 황궁에 쳐들어오기라도 할 터였다.
이 철도 사업의 핵심은 전 대륙을 론체스터를 중심으로 한 철도로 잇는다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안전성에 관한 결함이 가장 끔찍한 형태로 증명된 이상, 다른 나라들은 론체스터에서 철도를 놓아 준다고 한들 거부할 터였다.
즉, 지금까지 황실에서 철도 사업에 들인 비용을 회수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 판에, 투자금에 그에 대한 이자까지 책임져야 했다.
오벨리아의 말 그대로 제국은 빚더미에 앉게 될 터였다.
“그 빚을 상환해 드리죠.”
선황제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오벨리아의 말은 표면만 보면 대단히 희망 같아 보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어마어마한 빚을 갚아 준다는 것에 대가가 없을 리 없었다.
선황제가 그녀의 말을 마냥 곱게 듣지 못하는 이유였다.
“조건은 무엇이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황제는 오벨리아의 말을 대번에 거절할 수 없었다.
나라가 파산하게 되면, 제국으로서의 국격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분노한 국민들은 아예 론체스터 황실을 갈아치우려고 할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런 식으로 무능한 황실이 전복된 역사가 이 대륙 위에 분명히 여럿 존재했으니까.
그러니까 선황제로서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하는 심정이었다.
“우선, 알렉산드로를 버리세요. 선황 폐하의 입으로 그의 부정부패를 먼저 밝힌다면, 황실의 체면은 유지할 수 있도록 저희는 입 다물어 드리죠.”
선황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물론, 오벨리아나 다른 이들의 입에서 밝혀지는 것보다야 황실에서 황제의 부패를 먼저 드러내는 것이 훨씬 낫기는 했다.
그러나 그게 황실의 체면이 유지되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드러낸 황실의 치부가 없어지진 않는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무리 옳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아비가 되어서 공개적으로 아들을 끌어내리는 모양새였다.
선황제에게도 타격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그네스에게서 황녀가 태어났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황제가 다른 말을 하기 전에, 오벨리아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뒤를 이을 황족이 없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은 할 생각조차 하지 마세요.”
그것은 나직한 경고였다.
선황제가 이를 악물었다.
황녀가 태어났다는 것은 비밀로 하고 있었는데, 또 어디서 정보가 새어나갔는지 알 수도 없었다.
이제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황녀가 혼전에 임신된 사생아라고 할지라도, 아이를 황위 계승권자로 만들 편법이 있다는 것쯤 오벨리아가 모를 리 없었다.
오히려, 황녀의 탄생을 알고도 황위를 계승할 수 있는 존재를 남겨주는 것에 감사해야 할 따름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그녀는 선황제의 대답을 듣지 않고도 다음 조건을 꺼내 들었다.
“두 번째로, 북부를 공국으로 인정해 주시고 자주권을 보장해 주세요.”
쾅!
“말도 안 되는 소리!”
선황제가 재차 탁자를 내리쳤다.
북부는 제국에서 가장 쓸모없는 척박한 땅을 분리해 힐켄테데에 맡겨 버린 곳이기 때문에, 제국 전체 영토에 비하면 1/6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북부의 영토를 떼어내도 중부와 남부, 동부, 서부가 남으니 사실 비옥한 영토는 그대로 남는 셈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제국의 땅이 줄어든다는 것은 그만큼 국력이 줄어드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입는 손해를 생각하면, 오벨리아는 지금 북부의 땅을 헐값에 넘기라고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오벨리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럼, 어디 작금의 황제가 사실 힐켄테데의 전 대공 전하를 해쳤다는 사실까지 한 번 밝혀내 볼까요? 선황제 폐하께서 그것을 침묵하셨다는 사실까지 전부 포함해서요.”
북부의 귀족들은 황실이 아니라 힐켄테데에 충성했다.
그녀가 말한 사실들이 밝혀지면, 황실에서 곱게 북부를 독립시켜 주지 않더라도 무슨 사단이라도 날 터였다.
선황제가 이를 갈며 반박했다.
“네게 증명할 것이 있을 리가 없다.”
“제가 증거 하나 남겨 놓지 않았으리라 확신하십니까?”
오벨리아가 픽 웃었다.
그러자 선황제가 말을 잃었다.
그는 분명 당시, 황실이 힐켄테데 사변에 얽혔다는 모든 증거를 없애도록 제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그녀의 수완은 선황제가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오벨리아가 정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없었다.
단언컨대, 지금의 황실은 북부의 호전적인 귀족들을 감당할 여력 따위 없었다.
선황제가 두 주먹을 꽉 쥐며 부들거렸다.
세상을 호령하며 살아온 그였다.
단언컨대, 이런 굴욕은 처음이었다.
선황제는 자신이 썩 훌륭한 황제였다고 자신했다.
그리고 눈 뜨고 제국의 영토를 고스란히 빼앗기게 생긴 지금, 그의 자부심은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어느덧 기백 좋던 중년의 사내는 어디 가고 그녀의 앞에는 삽시간에 늙어 버린 남자만이 남아 있었다.
아마 선황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결코 론체스터가 이전과 같은 명성을 회복하지 못 하리라.
살아서 그 치욕을 견디는 것.
그게 전 힐켄테데 대공의 죽음을 방치한 선황제에 대한 에크하르트의 복수였다.
“대신, 2년의 유예를 드리죠. 서류상으로는 북부가 내일부로 힐켄테데 공국으로 독립하되, 그에 대한 발표는 2년 뒤에 하겠습니다.”
오벨리아가 마지막으로 선황제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꺼내 놓았다.
지금 당장 북부까지 론체스터에서 떨어져나가게 되면, 론체스터는 그야말로 혼란에 휩싸일 터였다.
적어도 그것을 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그것을 주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것은 에크하르트가 신성 제국의 황제로 등극하여 자리를 잡고 동시에 북부에 혼란이 없게 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유예였다.
하지만 지금 그 시간이 간절한 것은 무엇보다 론체스터였으므로, 선황제는 평소와 같은 이지를 발휘하여 거기까지 추측해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한참을 침묵한 끝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 하지.”
선황제의 완벽한 패배였다.
***
그렇게 하여, 선황제는 오벨리아와의 거래대로 직접 알렉산드로를 황제의 자리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회의장에 나타난 것이었다.
“감히 네가 황제의 관을 쓰고 이런 짓들을 해!”
선황제가 알렉산드로를 향해, 그가 외국의 사신들과 그 나라에 주었던 뇌물 목록이 담긴 증거 서류를 흩뿌렸다.
선황제의 목소리는 지난 밤 오벨리아에게 당한 굴욕을 토해내듯이 잔뜩 격앙되어 있었다.
“널 폐위시키겠다는 문서를 오늘 신성 제국에 보낼 것이다. 마침 귀족원에서도 네 폐위를 요청했으니, 이른 시일 안으로 빠르게 통과되겠지!”
선황제는 제 아들을 향해 경멸의 시선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알렉산드로만 아니었어도 제가 어제 그런 치욕을 당하지는 않았으리라 여겼다.
그렇게 생각하니, 눈앞의 아들이 더더욱 미워졌다.
“그러고 나면 널 론체스터 가문의 계보에서 지워 버릴 것이다. 너 따위 오점을 우리 황가에 남겨 둘 수는 없는 법!”
선황제가 기어코 알렉산드로의 앞에 선언했다.
“아아아아악!”
그 순간, 알렉산드로가 울부짖었다.
잔뜩 성을 내던 선황제는 물론, 모두 미친 듯이 구는 알렉산드로에 놀라 순식간에 장내가 싸늘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알렉산드로가 참지 못하고 외쳤다.
“아버지……! 당신은 늘 이런 식이었죠!”
알렉산드로가 두 눈을 번뜩이며 소리쳤다.
오벨리아가 굳이 선황제에게 알렉산드로를 폐위시키라고 한 이유.
그 이유가 마침내 눈앞에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