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복수의 끝은 아름답지 않다(4)
“설마 아그네스가 딸을 낳았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오벨리아의 말에 잠깐 넋을 놓았던 알렉산드로가 눈을 희번덕이며 철창에 매달려 말했다.
“……그 애는 사생아야!”
한 아이의 아버지가 했다고 생각하기에는 놀랍도록 정 없는 말이었다.
“……뭐? 그 애는 네 아이야.”
오벨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그만큼 알렉산드로의 말이 지나치게 터무니없이 느껴진 탓이었다.
아그네스와 알렉산드로 사이의 아이였기에 오벨리아도 아이가 딱히 예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벨리아는 그의 말에 기가 차 반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제 아이를 두고 저렇게 말하는 아버지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정통성은 그 아이가 아니라 내게 있어.”
알렉산드로가 이를 갈며 반박했다.
그러니까 지금 그는 자신의 아이를 황위를 두고 경쟁하는 상대로 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갓 태어난 아이를 말이다.
오벨리아가 그대로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이제 모든 것을 잃은 상황이라지만, 알렉산드로가 진짜로 저렇게까지 엉망으로 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정말로 자신이 한 때 저런 남자를 사랑했던 것인지, 오벨리아는 믿을 수가 없었다.
“……너, 진짜 이렇게까지 바닥으로 떨어져야겠어?”
한참의 침묵 끝에 입을 연 오벨리아가 말했다.
인간은 그 본질이 선하지 않아도 위선을 부리기 위해 노력이라도 할 수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를 티내지 않는 것.
그게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품위였고 그렇게 하기에 인간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에게는 그조차 없어 보였다.
“……하, 오벨리아. 네가 그러니까 나한테 뒤통수 맞은 거야.”
알렉산드로가 돌연 자신을 경멸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오벨리아를 비웃었다.
“네 욕심 많은 오빠를 보면 모르겠어? 황실을 지키기 위해 나를 버리는 선황을 봐! 권력에 자식과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알렉산드로의 두 눈은 광기에 차 있었다.
“도리, 선, 정의, 인애, 신뢰. 네가 그딴 것들을 믿고 있는 한, 너는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에게 반드시 또 배신당하게 될걸?! 권력이란 그런 거니까!”
알렉산드로는 자신의 그릇된 생각을 완전히 옳다고 믿고 있었다.
오벨리아가 철창에서 뒤로 물러났다.
알렉산드로라는 한 인간의 본성이 드러난 것인지, 혹은 그가 이렇게 변해 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눈앞의 존재는 알렉산드로라는 한 인간이기보다, 권력을 위한 욕망덩어리 그 자체였다.
“그래, 너나 선황 폐하…… 그리고 라이너스는 그렇지.”
그래서 오벨리아의 화는 완전히 가라앉아 버렸다.
알렉산드로 같은 인간에게 기운을 빼는 게 아까워졌기 때문이다.` 만약 그녀가 오늘날 알렉산드로를 이렇게 무너트리지 않았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그가 자멸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지만 알렉산드로, 너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나는 여기까지 나 혼자 오지 않았어. 네가 말하는 그딴 것들로 나를 도와준 이들로 인해 여기 서 있는 거야.”
알렉산드로가 외국 사신들과 차분하게 친교를 다졌더라면, 귀족들을 일방적으로 힘으로 누르려 하지 않았더라면, 제 아내가 될 이들에게 권력 하나 나누지 않으려고 수를 부리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는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로는 기어코 여기까지 와 버렸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네가 처음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아마 너는 평생 불행할 거야, 알렉산드로.”
오벨리아는 단언할 수 있었다.
“……뭐?”
오벨리아가 제게 할 줄 몰랐던 말이 들려오자, 알렉산드로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반문했다.
“지금부터 너는 가장 낮은 곳에서 살게 될 거야. 죽지도 못하겠지. 그런데 앞으로 네가 불행할 가장 큰 이유는 그게 아니야.”
알렉산드로는 이어지는 오벨리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그곳에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넌 거기서 모두가 너를 우습게 본다고 생각할 거야. 누구의 호의도 순수하게 믿지 못할 거고, 또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생각 같은 건 감히 못하겠지.”
이제 곧 알렉산드로는 론체스터의 계보에서도 지워진 채로, 아무도 그의 정체를 모르는 스켈론디아 섬의 노역장으로 끌려갈 예정이었다.
그곳은 각국에서 버려진 범죄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심지어 그곳의 범죄자들은 일거수일투족을 간수들에게 감시받았다.
말 그대로 개인적인 생활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평생 억눌려 살아야 하는 곳이었다.
물론, 그곳에 가는 것만으로도 알렉산드로에게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요, 괴로운 삶일 터였다.
그러나 오벨리아가 생각하는 그의 가장 큰 불행은 그 점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네게는 권력이 평생 없을 거고- 너는 권력이 없으면 더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었으니까.”
오벨리아가 홀가분한 기분으로 선언했다.
마음속에 남아 있던 알렉산드로에 대한 복수심도 이제는 보내 줄 때가 된 모양이었다.
그녀가 아니어도 이제 그는 평생토록 스스로 불행을 자처할 테니까.
알렉산드로는 더는 말이 없었다.
그에게 오벨리아가 말했다.
“네 딸은 사생아가 아니라, 선황 폐하의 딸인 5황녀가 얼마 전에 낳은 아이로 하기로 했어. 그리고 그 5황녀는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고 기록될 거야.”
5황녀는 실종되어, 끝내 찾지 못한 채 죽었다고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녀가 어딘가에서 살아있다고 우겨도, 어차피 그 말이 맞는지 아닌지를 가려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이 일은 카테리안느 공작가와 힐켄테데 대공가, 이프넌트 후작가 그리고 로이안 후작가가 힘을 합친 작품이었다.
그러니 그에 반발할 수 있는 귀족들이 있을 리 없었다.
실제로 현재 반발은커녕, 앞으로 갓난아이에 불과한 황제를 앞세우고 권력을 휘두를 생각에 귀족원에 들고 싶어하는 귀족들이 득시글했다.
“그럼, 평생 불행해- 알렉산드로.”
오벨리아가 마지막으로 알렉산드로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에크하르트와 함께 돌아서자, 알렉산드로가 돌연 철창에 매달려 외쳤다.
“차라리 죽여……! 날 죽이라고! 단두대에 올리란 말야!”
그러나 뒤에서 뭐라고 떠들건 말건, 오벨리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복수는 끝이 났고, 이제 더는 제 삶을 그곳에 할애하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
“너무 내 마음대로 일을 처리해 버려서 아쉽지는 않아, 에크하르트?”
오벨리아가 황성을 나와 마차에 오르며 에크하르트에게 물었다.
알렉산드로를 어떻게 할지는 순전히 그녀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에크하르트에게도 분명 알렉산드로에게 복수할 사유가 있었다.
그런데 에크하르트는 그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인제 와서 이걸 묻는다는 게 좀 그랬지만, 한 번쯤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해 봤는데, 오벨리아.”
에크하르트가 갑자기 픽 웃었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내 가장 큰 복수는 알렉산드로에게서 너를 빼앗아 온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뒤로 물러나 있던 것은 아니었다.
알렉산드로에게 가장 걸맞은 최후.
그것을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에, 그저 오벨리아를 믿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가 알렉산드로에게 내린 판결에 만족했다.
“나는 이 복수의 끝에 만족해. 이 정도면 알렉산드로에 의해 돌아가신 내 어머니께서도 편히 눈을 감으실 거다.”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의 손에 제 손을 깍지 껴 잡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그 어깨 위에 얹은, 힐켄테데에 대한 부채감도 내려놔.”
오벨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어깨에서 힘을 풀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에크하르트에게 말을 꺼내며 긴장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말에, 무겁던 어깨가 갑자기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에크하르트는 이런 오벨리아를 그녀 자신보다도 더 빨리 알아채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러는데 내가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겠어.”
오벨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내뱉고 말았다.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한 번 제게 준 이상, 그녀의 모든 것이 제 것이라고 했던 에크하르트였다.
그렇게 말하더니- 그는 기어코 그것을 사실로 만들었다.
에크하르트 힐켄테데는 그런 남자였다.
오벨리아가 순간 상체를 그의 쪽으로 기울였다.
그 순간, 그녀의 입술이 에크하르트의 입술에 닿았다.
오벨리아 한정으로 한없이 무방비하던 그의 두 눈이 커졌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기회를 놓치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의 단단한 팔이 곧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
서로의 타액이, 서로의 숨결이, 서로의 마음이 오갔다.
고요한 마차 안에서 오벨리아가 그를, 에크하르트가 그녀를 탐하는 소리만이 울렸다.
그렇게 한참을 붙어 있다가 숨이 벅차 잠시 떨어졌을 때, 오벨리아가 속살거리듯 말했다.
“사랑해, 에크하르트.”
모든 것을 잃은 줄 알았다.
그래서 복수에 미쳐 살았다.
그런 오벨리아가 괴물이 되지 않도록 지탱해 준 것은, 그녀의 삶을 지켜 준 것은 에크하르트에 대한, 그에 의한 사랑이었다.
그래서 오벨리아는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한다, 오벨리아.”
언제 들어도 달콤한 그 고백에 에크하르트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 역시도,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
3년 뒤.
론체스터는 힐켄테데와 카테리안느의 도움으로 빚을 갚고, 그 후 꾸준히 성장해 3년 전보다 상당히 빠른 발전을 이루었다.
다수결에 의한 결정을 통해 귀족원이 제법 통치를 잘한 덕이었다.
에크하르트는 로메네스의 성을 물려받아, 제 친어머니의 복수를 완성하고 신성 제국의 교황이 아닌 1대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북부는 론체스터에서의 분리되어 공국으로 독립하였음을 공표했다.
그 소식이 발표된 날, 에크하르트는 기다렸던 듯이 신성 제국의 사절들과 함께 힐켄테데 공국을 찾았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오벨리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에크하르트가 품에서 보석함을 꺼내 열어 보였다.
그곳에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신성 제국의 황후에게만 주어지는 반지가 들어있었다.
그녀의 답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 텐데도 불구하고- 그는 잔뜩 긴장된 기색으로 오벨리아에게 물었다.
“오벨리아, 내 황후가 되어 주겠어?”
황후의 성장을 한 채 사람들의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폐궁으로 끌려갔던 오벨리아였다.
그런 그녀가 이제는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황후가 되어 달라는 청혼을 받고 있었다.
아, 그제야 오벨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 남아 있던 응어리가 모두 풀리는 것을 느꼈다.
더없는 행복이었다.
“기꺼이, 에크하르트.”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에게 손을 내밀며 환히 웃었다.
그제야 그의 얼굴에서 긴장이 사르르 녹아내리며 달콤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침내 그녀의 손에 황후의 인장 반지가 끼워졌다.
오벨리아는 그렇게 비로소 황후가 되었다.
-마침-
By.[Y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