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용의계곡(3)
내가 단순히 용을 몬스터로 생각했다면 이렇게까지 기분이 더럽지는 않았을 거다.
일단 나 자신부터가 용이다.
거기에 용신 카르아의 인연을 시작으로 지금은 세라까지 있다.
드래곤들은 용종들을 하찮게 여기지만 애초에 나는 그들과는 다르니까.
거기에 나 자신도 아마 좋은 관계는 맺지 못할 거 같고.
아무튼 쉬이 생각할 만한 것이 아니다.
“정말로 끔찍하군...”
나는 속으로 이를 갈면서 가장 가까이에 있던 드레이크의 시체를 살펴본다.
미스릴 같은 희귀 금속으로 만든 무구.
최소 오러나 4서클정도의 마법이 아니라면 흠집조차 나지 않는다는 비늘은 종잇장처럼 찢겨 있고 목부터 머리, 몸의 3분의 1이 없다.
이것 외에도 한 마리 한 마리가 정말이지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있다.
날카로운 것으로 잘렸다면 그나마 나았다고 생각될 정도다.
마치 거대한 생물이 거대한 이빨로 물어뜯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찢어발긴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나저나 이것들을 다 어떻게 한다...”
게임의 감각으로만 이야기하면 값비싼 재료들이 널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하나하나 묻어주자니 현실성이 없다.
“...아니, 애초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현실성이 없는 건가.”
괜히 착잡해져서 생각이 많아졌다.
친근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내 가족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깊게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
“챙기자. 이들도 그냥 이곳에서 썩는 것보다는 그게 낫다고 생각할 거야.”
물론 효과로 생각하면 굉장히 손상이 많이 되어 있으니 제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버릴 것이 없다는 것이 장점이다.
이대로도 쓸것은 아주 많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건 진짜 누가 그런 거지...”
인벤토리에 챙기기 전에 좀 더 관찰해본다.
어지간해서는 상대하기 힘든 이 용의계곡의 용종들을 유린하는 수준까지 강한 무언가가 분명히 여기에 있었다.
내 지식을 동원해 봐도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해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이곳에서 깽판이라는 개념만으로 봤을 때는 할 수 있는 존재가 몇 있다.
다만 그들이라면 이렇게 유린하듯이 뜯어 먹은 흔적을 보이며 발톱으로 찢어발기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오러를 잘 사용하면 비슷한 일은 할 수 있겠지만 효율적이지 못한다.
“이건 뭐 진짜 드래곤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은 설명하기도 힘든 일인데...”
하지만 드래곤이 뭣 때문에 그런 짓을 하겠는가.
귀금속, 오래된 아티팩트, 갖가지 희귀한 무구, 흔하지 않은 지식 등등.
그런 것에 밖에 흥미가 없는 존재들이다.
...아니, 애초에 이 시점에서 드래곤을 생각하는 것이 이상하다.
그들이 흥미도 없는 용종들을 먹을 이유 자체가 없다.
아무리 그래도 스스로를 지성이 넘치는 존재로 칭하는 드래곤들이 이런 짐승 같은 짓을 벌일 리도 없고...에라! 모르겠다.
“일단은 챙기고 나서...어...?”
드레이크 사체를 챙기려고 손을 갖다 대면 갑자기 드래곤하트가 뜨거워진다.
그러면서 갑작스럽게 내 머릿속에 한 장면이 떠오른다.
[크아악!!]
-으적!
“으아악!!!”
아니, 이건 장면이 떠오른다는 그런 미적지근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 드레이크의 죽기 직전 기억이며 그 고통이다.
분명히 내가 당한 일이 아닌데 나는 내가 한입에 씹힌 것만 같은 그런 고통을 느꼈다.
“우웁...!”
너무나도 끔찍한 기억과 고통에 나는 몸을 덜덜 떨면서 위에 있던 것을 쉴 새 없이 쏟아냈다.
그리고 하나의 생각이 든다.
그건 내가 생각하는 것 중에서 가장 끔찍하고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최악도 그런 최악이 없다.
“설마 그 녀석이...”
이건 절대로 가볍게 볼 사항이 아니다.
게임이 한창 유행했을 시절.
꽤 많은 종류 중에서 많은 사람 입에서 오르고 내린 보스 몬스터가 있었다.
그라니토.
게임에서는 아주 쉬운 보스 몬스터 중 하나였기에 그저 보너스로 생각하는 유저들이 많았었는데, 어느 한 유저가 한 말에 순식간에 불이 붙어버린 것이다.
[님들. 만약에 그라니토가 남모르게 풀려난다면 마왕보다도 셀 것 같지 않음?]
그 주제는 한순간에 퍼졌고 유저들은 스토리상에서 쉽게 당하는 그라니토가 아닌 단순히 그라니토의 설정만으로 생각했다.
그 결과 금방 마왕보다강할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물론 충분한 시간과 양식이 있다면 이라는 가정이지만 말이다.
그라니토가 게임에서 약하게 나오는 이유는 봉인되어 있다가 바로 풀리고 난 다음 용사와 싸우게 되는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라니토는 드래곤. 아주 먼 옛날에 존재했다는 드래곤이다.
막 봉인에서 풀려난 것과 성검에는 용살 속성도 있다는 설정이기 때문에 그냥 막 썰린다.
그렇기에 경험치와 아이템을 듬뿍 주는 보너스 몬스터인 것이다.
“하지만참 곤란한 특성을 지니고 있지...”
흔하디흔한 특성이라 할 수 있지만 참 곤란한 특성.
먹으면 먹을수록 강해진다는 특성이다.
먹은 것의 능력치를 흡수...같은 느낌일까?
조금 다를 수도 있는데 대략 그런 거다.
시간이지나면서 계속 무언가를 먹고 먹어 능력치를 올리면 나중에는 상대하기 힘들 정도가 된다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그라니토의 봉인을...?”
그라니토의 봉인을 푸는 건 당연히마족 측이지만 스토리에서도 중후반 정도에서 풀리게 된다.
애초에 그 봉인 자체가 아예 기록조차 없다는 설정이어서 마족도 아주 우연한 계기로 봉인된 장소를 발견하게 된다. 이게 지금 알려질 리가 없을 텐데...
“...여긴 게임이 아니고 현실이니까 누가 우연히 발견했거나 아니면.”
나 같이 이 세계에 대해 알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거나.
뒷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가장 생각하기 싫은 가능성이다.
만약 나랑 같은 편에 설 수 있는 사람이라면 괜찮은 전개이지만 그 반대라면 최악.
그리고 지금까지의 일을생각하면 그 최악의 전개에 훨씬 더 가깝다.
하지만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서야 그라니토의 봉인을 풀자는 생각을 할 수는 없다.
너도 죽고 나도 죽자는 생각으로 그냥 세계를 멸망시키자는 수준의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놈은 정말 통제 불가능의 괴물 중의 괴물이니까.
반드시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이 없는 이상은 자살 행위이기도 하다.
그라니토의 존재 외에도 세르니아가 한 송이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세르니아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즉, 내가 하려고 했던 일을 하려 했든지 아니면 그것을 방해하려고 했든지 그게 또 아니라면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하려고 했든지.
“아니, 그래도 희망을 아예 포기하긴 말자.”
전부먹어치워 진 것 같지만 그래도 모른다.
‘그곳’ 하나만큼은 공유된 적이 없으니까 아마 괜찮을 확률이 커.
거기에 모든 용종이 다 먹혔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젠장.”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 하고 있지만, 욕이 저절로 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골이 눈앞에 보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다.
이제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골을 찾아서 헤매야만 한다.
“난이도로 따지면 헬...아니 그 이상인가.”
게임에서 난이도 설정은 없었지만, 지금이 현실은 그 이상으로 설정된 것이 아닐까 싶다.
나 말고 이 세계에 대해 잘 아는 누군가가 있다고 가정.
누가 더 빨리, 효율 높게 앞지르기를 하는가.
더 좋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가.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시크가 말한 건에 대해서도 해결해야 하는데...일이 너무 많아져 가...”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그라니토의 대책부터 앞으로 내가 나아갈 길은 가시밭길 그 이상인 것은 확정으로 보인다.
하아...
계속 다른 아이들을 그냥 두고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일단 주변만 조금 더 조사하고 돌아갔다.
몇몇 다른 시체의 기억도 보게 되어서 엄청나게 정신적으로 괴로웠다.
여기에 출현한 것은 그라니토가 확실하다.
이후 어디로 간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 주변의 용종들을 먹어치우고 사라졌다.
다른 용종의 기억도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너무 괴로워서 그럴 기분이 들지 않는다.
카르아가 나에게 말하길 자신의 마나, 드래곤하트를 받아들였기에 지성이 강한, 흔히 드래곤이라 불리는 종류를 제외하면 웬만한 용종은 내 말을 따라 줄 것이고 친밀하게 다가와 줄 것이며 쉽게 동조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 모든 것을 시험해보기 위해 온 것도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상황이 이어질 줄은 몰랐다.
“나 돌아왔어.”
“뀨우! 뀻!”
“어이쿠.”
돌아오면 가장 먼저 세라의 거친 환영이 나를 반겨준다.
파닥파닥 날갯짓을 하며 나에게 날아온 세라는 곧바로 내 품속에 들어가더니 머리만 쏙 내밀어서 내 볼이나 목에 쉴 새 없이 비빈다.
세라의 감정상태를살펴보면 어지간히 나와 떨어졌던 시간이 싫었나 보다.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은 것을 알았다.
음, 앞으로 좀 더 신경을 써야겠다.
“아까까지는 리제가 간 방향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조용하더니 이제는 신이 났네.”
“아무리 달래주려고 해도 저희로는 안 되겠더라고요.”
“그랬구나. 어이구. 우리 세라. 그렇게 많이 쓸쓸해써요?”
“뀻♡ 뀨우♡”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너무나도 행복해한다.
이렇게 날 따라주는 아이를 어찌 의무감만으로 돌보겠는가.
나 자신도 놀랄 정도의 애정이 세라에게 쏟아진다.
[당신의 진심 어린 애정에 세라가 행복해합니다.]
[세라와 더욱 깊은 관계로 맺어집니다.]
[세라의 선(善)지수가 상승합니다.]
[모든 능력치 5가 상승합니다.]
그렇게 잠시 세라랑 놀아주다가 나는 그 로그를 보고 헉...하고 숨을 삼켰다.
세, 세상에...세라랑 놀아주기만 했는데 능력치가 올랐어?
이건 도대체 무슨 원리냐. 도저히 모르겠다.
‘세라랑 놀아주면서 능력치도 올라간다니 이거 너무 좋은 조건이어서 무슨 함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되네...’
그렇게 생각도 해봤지만, 로그는 그 이상의 메시지를 보여주지는 않았다.
“리제? 갑자기 왜 그래?”
“응? 아무것도 아니야.”
시스티아에게 그리 말하면서도 생각을 좀 한다.
이건 빠르게 능력치를 올리라는 말이지 않을까 하는 것 말이다.
나와 같은 존재가 또 있다고 가정하면 이 앞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지금의 힘 가지고는 아무것도 못 할 거로 생각한다.
최소 란델이나 후작 정도는 쉽게 이길 수 있어야 발을 내디뎠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가장 익숙한 게임에서의 용사 수준을 기준으로 삼자.
그리고 나 혼자만 크는 것이 아니고 동료들도 충분히 강해져야지.
레온의 경우는 게임과는 다르게 먹어야 할 것을 못 먹으니 신경을 좀 써야 해.
...이젠 느긋하게 뭔가를 한다든지 그런 걸 생각할때가 아니야.
애초에 내가 알던 대로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을지 없을지도 불투명하니까.
“그보다 저쪽은 어땠나요?”
“조금 있다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
그런 내 말에 둘 다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 전부를 아는 것은 아니지만 세라는 하루 대부분을 잠을 자는 데 사용한다.
게다가 한 번 잠이 들면 만족할 때까지 절대로 깨지 않는다.
우리는 그때 가기로 했다.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