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해야 하는 것(4)
내 생각이 닿아서 그런 건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영주 아들 녀석은 나와 경쟁하는 것을 포기했다.
결국 마지막에 말한 7000 성화로 경매는 마무리.
뜻하지 않는 지출이었지만, 큰 타격도 아니었다.
단순히 돈도 돈이지만, 돈을 대신할 물건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경매는 계속되었다.
이종족은 없이 다시 인간의 노예로만 이루어진 경매.
들어 올 때 셋이라고 했고, 그 뒤에 목록을 확인하니 세피리아가 마지막이었다.
“.......”
나와 경쟁했던 남자를 슬쩍 본다.
녀석은 마치 정서불안인 마냥 엄지손톱을 깨물면서 다리를 달달 떨고 있었다.
“그래...마지막...마지막만 잘하면 되는 거야...저 여자도 분명 돈을 많이 썼을 테니 여유는 없을 터...”
청각을 강화하면 그런 말을 계속 중얼거리는 것이 들려왔다.
어쩐지 다른 것은 관심도 보이지 않더라니 목적은 세피리아인 건가.
“아루르펜 영주는 어때?”
“적어도 아직 내 안에서 쓰레기로 구분되어 있지는 않군.”
“너에게 그 정도면 상당한 고평가 아니야?”
인간은 전부 악마 같다느니 하는 녀석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상당한 거다.
“하지만 이런 곳의 영주를 맡은 자다. 필시 정상은 아닐 테지.”
“흠...”
즉, 시크리프가 아는 한에서는 상당히 평가를 받아도 될 인물이지만, 이런 미친 곳이 열리는 곳의 영주인 이상 뭔가 있을 거로 생각한다는 건가.
“시크리프. 이번 경매가 끝나면 저 영주 아들놈 주변을 좀 싹 뒤져봐 줄래?”
“그건 왜지?”
“어쩐지 냄새가 나서.”
세피리아를 저렇게 불안해하면서 간절히 원하는 이유.
그것이 단순히 귀하디귀한 하이엘프라 그런 거라면 문제없지만, 만약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어떨까?
영주 아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을 거다. 영주 본인이라고 한다면 이유는 생각해도 복잡하게 생각하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그게 내가 가장 최악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내린 것이라면?
제국에서 벌어진 일도 있다. 여기라고 없으라는 법은 없다.
어디에 얼마나 침투했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마르티나 왕국의 왕가에도 있는지도 모른다.
“...알았다.”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아마도 잘 해내겠지.
이 녀석 한번 시작한 일은 어떻게든 완벽하게 끝내려고 하는 완벽주의 같은 경향이 있으니까.
[자, 그러면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 엘프 중에서도 몇 천 년 주기로 단 한 명만 나온다는 하이엘프 입니다!]
“오오...”
“저게...”
그 말과 함께 무대 뒤에서 끌려 나오는 것은 누구나 한번 보면 감탄을 쏟아낼 정도로 아름다운 엘프였다.
그 자체만으로도 예술이라고 불릴 만한 아름다움. 시스티아도 포함해서 다른 이들을 볼 때도 생각했지만, 역시 실물은 전혀 다르다.
세피리아는 훨씬 더 그렇게 생각하게 될 정도였다.
다만, 세피리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중요 부분이 노출되는 천박한 옷에 목에 걸려 있는 목줄이 눈에 거슬렸다. 저런 것보다 세피리아에게 어울리는 것은 정말로 많을 텐데.
거기에 세피리아 역시 다른 노예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내려놓은 눈빛이었다.
“쯧...어쩌다 하이엘프가 저런 모습이...”
다른 때는 표정 변화가 거의 없던 시크리프가 노골적으로 분노한 표정을 지었다.
주변에 적이 있었으면 분명히 곱게 죽지는 못했겠지.
[자, 그러면 시작가는 100 성화입니다. 경매 시작하겠습니다.]
곧 경매가 시작된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세피리아를 갖고 싶어 하는 눈빛을 보였다.
마음이 죽어 있는 듯한 세피리아지만, 많은 이들에게 그런 눈빛을 받으니 몸을 움찔 떨었다.
얼마나 괴로울지는 내가 아무리 상상한다고 해도 모르겠지.
더 이상 저기에 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저런 더러운 곳에 두고 싶지 않다.
“5000...!”
“10000 성화.”
“뭣...!?”
그러니 얼른 끝내자.
*
경매장 측에서 화끈하게 달아오를 거라고 예상했을 마지막 경매는 내 한 마디에 끝을 맞이했다.
나는 곧바로 세 사람을 받기를 원했지만, 그것은 이루지 못하고 경매장의 지배인이 있는 곳에 오게 되었다.
아마도 워낙 큰돈이다 보니 내가 낼 능력이 있는지 파악하려 하는 걸까.
거기에 내가 이곳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인물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무런 기능도 없는 가방을 마법 가방으로 보이며 인벤토리에서 현금으로 꺼내 보였다.
방을 가득 메우는 백금의 향연.
그렇게 값이 모두 치러지면 그제야 세 사람을 데리고 왔다.
세피리아는 경매에서 봤던 복장 그대로 목줄로 끌려왔고 묘인족 자매는 여전히 짐승화한 모습으로 작은 우리에 넣어져서 말이다.
나는 곧바로 예속의 의식을 진행했고, 이 세 사람은 이제 정식적으로 내 노예가 되었다.
난 그들을 받은 즉시 이곳에 더는 있기 싫어서 바로 나가기로 한다.
아, 그 전에...
“저, 혹시 이 아이들의 부모는...?”
“수컷은 최근에 어딘가에 팔렸다가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암컷은 이 둘을 낳고 죽었지요. 뭐, 그전에도 많이 낳았으니 할 일은 다 했다고 봐도...”
“알겠습니다. 그럼...”
“에? 아, 네. 감사합니다. 자작님!”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을 이유는 없기에 말을 끊고 경매장을 나서기로 한다.
과연 저런 생각을 하는 자들이 이 세계에 살아있을 가치가 있을까?
이 때의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말발굽의 소리와 마차의 바퀴 소리만이 들려온다.
여관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는 나를 포함해 아무도 말이 없다.
어떤 식으로 말을 시작해야 할까.
아마도 이곳에 있는 모두가 인간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느 정도 신뢰는 얻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많은 상처를 입고 닫힌 마음을 열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렇게 계속 침묵이 감돌고 마차는 우리 잡았던 여관 앞에 섰다.
의외였던 것은 그 영주 아들놈이든 누구든 방해하려고 들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었다는 점.
“이러면 안 돼....이러면 안 된다고...!”
특히나 세피리아를 낙찰하고 났을 때 놈의 표정은 벼랑 끝에 몰린 자의 절망감을 보이고 있었다.
역시 냄새가 난다.
“주인님께서는 저희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방에 들어서면 놀랍게도 세피리아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덕분에 나도 말문을 열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전 성노예로서 팔려왔으니 밤시중을...여성을 상대로 하는 법도 배웠기에 문제없습니다.”
감정이 하나도 담겨있지 않은 말이었지만,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말이어서 무심코 뿜을 뻔했다.
노예 상인 놈들 그런 일까지 시키는 거냐...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미리 말해두자면 그런 일을 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알아둬. 그리고 딸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마.”
벌써부터 밤시중이 뭐냐는 듯이, 눈을 호기심으로 빛내며 나를 보고 있잖아...
안 돼. 그런 거 아직 빨라.
“힝...”
안 된다고 생각하며 바라보면 세라는 울상을 지었다.
굉장히 서운하다는 생각이 전해져 온다. 굉장히 마음이 아프지만 이건 어쩔 수 없어...
아이에게 아기는 어떻게 생기냐고 갑작스럽게 질문받는 부모의 마음을 잘 알았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하...! 모든 엘프의 위에 서야 할 하이엘프가 밤시중? 웃기는군. 그렇다면 평생을 개돼지처럼 인간들에게 사육당하면서 다리나 벌리며 귀여움받고 살아라.”
그렇게 이야기가 끝나는가 싶었는데 방 주변의 확인이 끝난 시크리프가 비웃음이 섞인, 짜증이 섞인 말로 세피리아를 매도했다.
그것은 그저 잡혀 오게 된 그녀에게는 부당한 말이었지만, 웃기게도 그 말이 죽은 마음에 자극되었는지 세피리아의 눈빛이 살짝 돌아왔다.
“누구 때문에....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데!!”
세피리아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그것에 묘인족 자매도 따라 울었다.
지옥 같은 나날이 떠올랐던 것일까. 앞으로의 희망도 없는 새까만 미래가 보인 것일까.
“너희 인간들 때문이야! 너희 때문이야!!”
세피리아는 그렇게 저주하듯이 외치고 더는 말을 잇지 못하며 구슬피 울기 시작했다.
시크리프는 그런 세피리아에게서 시선을 떼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에는 약간의 안도감이 있었다. 아직은 마음이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것이 안심이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세피리아를 따라 울기 시작한 묘인족 자매까지 세 명이 우는 것을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 감에 걸리는 기척이 있었다.
“역시 왔나. 급했던 모양인지 빠르군. 좀 더 밤이 깊어지면 올 줄 알았는데 말이지.”
“처리는 잘 부탁해~”
“칫. 나와라.”
내 말에 혀를 한 번 차며 이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이들을 부르는 시크리프.
그러면 방에 검은 복장에 복면을 착용하고 있는 이들이 그림자와 함께 나왔다.
엘프와 똑같이 귀가 길며 뾰족하고 피부가 검은색인 다크엘프. 시크리프의 부하들이다.
“처리해. 곧 나도 나가마.”
“알겠습니다.”
시크리프가 명령하면 그들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림자같이 주변에 스며들 듯이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세피리아는 눈물을 멈추고 당황한 표정을 보였다.
“다, 다크엘프...!?”
“참고로 나도 다크엘프다.”
“힉!?”
시크리프가 마법을 풀고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주면 세피리아가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에 시크리프가 약간 몸을 움찔 떨었고 동공이 조금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저 녀석 충격받았구나.
동족은 아니지만, 동족에 가까운 이가 자신을 보고 겁을 먹은 것이.
“왜 겁을 내지?”
“다, 다크엘프는 사악한 힘에 몸을 판 잔인한 자들이라고...”
“누, 누가...!”
“!”
급하게 반박하려고 하면 더 몸을 움츠리는 그녀를 보고 말을 멈추는 시크리프.
그리고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다른 다크엘프들과 마찬가지로 그림자처럼 스며들 듯이 사라졌다.
“다, 다크엘프가 저렇게 따른다는 것은 주인님도...?”
“어, 음. 뭐, 인간은 아니지.”
보여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다가 나는 용화를 해서 내 정체를 보이기로 했다.
앞으로 계속 같이 다녀야 하는데 숨기는 것은 있을 수 없으니.
그렇지만 걱정도 되었는데, 세피리아의 반응이 예상되었으니까.
용화가 되어 인간의 모습에서 용인의 모습이 된다.
그러면 아까 시크리프를 봤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겁을 먹은 표정을 짓다가 황급히 납작 엎드렸다.
“위, 위대하신 드래곤을 뵙습니다!”
드래곤이 오랜 시간 엘프에게 해왔던 일들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겠지.
엘프에게는 유전자 개념으로 드래곤에게 두려움이 심어져 있다고 하니.
거기에 묘인족 자매는 시크리프에서는 별로 반응이 없었지만, 지금은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이 바들바들 떨었다.
이렇게나 겁을 먹은 모습을 눈앞에서 보니 충격이 컸다.
시크리프가 왜 그런 행동을 보였는지 알 것 같았다.
“엄마...”
오로지 나를 위로하듯 세라만이 그 조그마한 손으로 나를 쓰다듬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