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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7화 〉드래곤(4) (77/107)



〈 77화 〉드래곤(4)

“너무해. 연약한 나를 이렇게 짓밟다니...”

“칫.”

혹시 몰라 오러까지 담아서 밟았는데 놈은 멀쩡했다.
내 발밑에서 기분 나쁘게 꾸물꾸물 빠져나오더니 다시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왔다.

역시 본체이거나 그 일부라 그런지 굉장히 튼튼하다.

“너무하긴 뭐가 너무해. 네가 하도 장난을 치길래 할 말이 없는  알았지.”


“장난? 누가.”


“누구긴. 너지.”

“나, 장난친 적 없는데? 방금은 진심이었는데?”


“너...!”

끝까지 밀고 가려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해봤지만, 놈은 정말로 진지해 보였다.

“진심으로 그딴 말을 했다고?”

“누가 프러포즈를 장난으로 해? 진심으로 하지.”


정말로 그냥 장난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마치 나에게 따지듯이 하는 그 말은 아주 진지하다.
거기에 설마하니 상식적인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내 꿈은 말이지.  세계를 갈아엎은 뒤에 너와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사는 거야.”

그것을 그저 개소리로 취급하기에는 장난스러운 분위기가 없다.
물론 연기를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너랑 내가 언제 봤다고 결혼은 무슨 결혼...”

제발 소름 돋는 소리 좀 그만해...
몸은 여자가 되었어도 정신까지 여자가 될 생각은 없다.
이 녀석의 호의 그 자체가 민폐 중의 민폐지만, 그것을 제외한다고 해도 그 프러포즈를 받는 일은 없다.
설령 내가 죽다 살아난다고 해도.

“뭐, 나도 금방 너와 맺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모든 것은 일이 끝난 뒤의 일이야. 난 너를 정말로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정도 기다리는 것은 일도 아니지.”

“...아까 세계를 갈아엎는다고 했지?  목적은 그거냐?”

“맞아. 나는 신이 되어 이 세계를 바꿀 거야. 이미 그 준비는 해나가고 있고 말이지.”

말도 안 되는  같지만,  녀석이 지금까지 해온 일을 생각하면 분명히 밝힐 수 있는 일이리라.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무슨 불만이 있다고? 봉인된 거? 그건 네가 잘못을 했으니...”

“아하하! 잘못? 잘못이라...뭐, 잘못이라면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네.  빌어먹을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 내 잘못!”


악당이라는 것이 다 그렇긴 하지만, 이 녀석은 특히나 자신이 한 짓에 대해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이 녀석은 이 녀석만의 스토리가 있을 것이다.
말도  되는 자신만의 스토리가.


“리제. 너도 인간, 엘프, 수인, 드워프, 드래곤...이렇게 많은 종족을 만나면서 답이 없다고 느끼지 않았어?”

“그건...”

당연히 느꼈다.
한두 번 느낀 것이 아니다.

인간이 가장 문제가 많아 보이지만, 그것은 아마 숫자가 가장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모든 종족에 있다.

그리고  문제 때문에 각 종족은 서로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혐오한다.


“난 말이지. 용인들의 왕으로서 온 힘을 다했어. 점점 가면 갈수록 어떤 종족에게도 차별받는 우리 용인들을 위해서 말이지.”

“용인은 다른 종족에게 박해를 받았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야?”


“박해? 그런 말로 정리할  있는 게 아니야. 우린 그저 노예였어.”

점점 이야기가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간다.

“용인이 강인하다 전해지고 있지만, 강인했던 것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지. 나머지는 굉장히 어중간한 존재. 드래곤에게도 섞일 수 없고, 인간에게도 섞일  없는 어중간한 존재!!”


분노하며 말한다.


“점점 드래곤은 인간과 섞이지 않고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었고, 다른 종족들도 자신들만의 나라를 만들었다. 우리 용인은 그 사이에 껴서 노예로 지냈지! 모든 것은 우리 잘못? 그거야 당연하겠지! 우리가 패배자니까! 패배자가 승리자에게 죄인으로서 기록되는 것은 당연한 일!”


놈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만약에 저 말이 진짜라고 한다면.
이 녀석의 분노는 정당하다고 할 만했다.


한 짓이 전부 정당화되지는 않지만.


“이 세계를 아예 뒤집지 못하면 우리는 언제나 죄인인 채야. 하지만 난 그건 싫거든.”


“그래서  죽이겠다?”

“물론 나에게 복종하는 이들은 살려줄 생각이야. 물론 가축 이하로 지내야겠지만.”


“......”

놈이 나에게 보이는 집착 같은 것이 뭔지 이해했다.
이 녀석은 단지 나라는 용인 동료가 갖고 싶은 것뿐이다.
이 세계에 남은 용인은 아마 이 녀석과 나, 그리고 이 녀석 손에 있는 여동생.
적극 도와주고 있다는 것은 이 녀석 생각에 찬동하고 있다는 거겠지.


“즉, 네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은 세계를 쳐부수는데 도와달라는 거네?”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아. 옆에만 있어주면 돼.”

“.....”

아무리 그래도  집착은 무서운데? 전혀 기쁘지 않아.


나에게 어떤 것이 진실이고 어떤 것이 거짓인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는 이 세계가 멸망한다면 곤란하다.
얼마나 막장 같은 세계라고 해도 곤란하기 짝이 없다.

“미안하지만  제안은 받을  없어.”

“뭐, 리제. 너라면 그렇게 말할  알았어.”

“깔끔하게 포기하는 건가?”


“설마. 시간을 들여 천천히 설득할 거야.”

“난 너를 계속 방해할 건데?”

“그래도. 내 방침은 변함이 없어.”


“......”


끝까지 나는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다는 것이다.
재밌네.
거기까지 나에게 집착한다면 그것을 이용하지 않는 수단은 없겠지.
지키기 위해서 뭐든 한다고 정했다.
이런 걸로 양심이 찔릴까 보냐.
애초에 이 녀석은 적이니까.

“그래서? 이제 어떻게  거지?”


“이 모습으로는 아직  봉인을   없어. 어린 드래곤 놈들을 몇 마리 통째로 먹긴 했지만, 그것도 밖에 있는 녀석들을 상대하는 데 많이 소비했으니까.”

“그러니 도망가겠다?”


“후후,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내가 이렇게 있는 것 자체가 기회라는 거지.”


무슨 기회? 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도 먼저 녀석이 씨익 웃으며 말한다.


“드래곤 놈들에게 타격을  기회!”


봉인이 목적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단순히 드래곤에게 타격을 주는 것이 목적이었나.
아까 했던 대화에서 생각하면 아마도 녀석이 가장 증오하고 있는 것은 드래곤.
지금 같은 상황은 정말이지 신이 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놈의 몸이 단숨에 거대해지더니 수많은 촉수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것을 주변의 벽에 꽂아 넣었고 마나를 흡수하기 시작한다.
저것은 아마도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나를 흡수하고 있는 것일 거다.

“어린놈들 몇  처먹은 걸로는 모자란 거야?”

“어라? 동정하지 않는구나?”

“내가 왜? 날 엄청 싫어하고 있던 놈들인데. 기회만 있으면 죽이려고 들고. 애도는 하지만 동정할 여지는 없다고!”

검에 강기를 담아 촉수를 잘라버린다.
 녀석과 조종하고 있는 괴물은 분명히 연결되어 있을 거다.
마나가 들어간다는 것은 밖에 있는 드래곤들이 불리하게 된다는 것.

“쳇. 역시 상대하기 힘드네!”


“후웃!”

-서걱!

내가 유미네에게  맞으면서 준비한 것은 맷집도 맷집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민첩성이다.
짧은 시간에 상당히 큰 효과를 볼 수가 있었다.
어떻게 움직이면 좋을지, 오러를 어떤 식으로 사용하면 민첩성 향상에 좋을지.
그것들을 배우고 있었다.

놈의 촉수가 다시 벽에 박히기 전에 자르고 또 자른다.

당장에 흡수하는 것은 막고 있지만,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다.


[불타라]

“큭...”


놈의 본체에 불이 일어나 활활 타오른다.
당장에 미숙하기는 하지만 용언도 곁들인다.
다른 놈들이라면 브레스로 끝나는 것이지만, 저놈은 오히려 그게 먹이가 된다.


놈이 어째서 보스 그 자체를 다룰 수 있는지 굉장히 궁금한데, 질문하면 알려주려나?

어쩐지 시원스럽게 알려줄 것도 같다.


“너, 그것들은 어떻게 사용할 줄 아는 거야?”


“내 사역마니까!”

“역시 시원스럽게 대답해주네!”

“하하, 이쪽으로 오면 더 자세하게 알려줄게!”

놈이 공격으로 전환했다.
촉수가 나를 붙잡으려고 꿈틀거리며 다가온다.
그것도 대량의 촉수가, 내 몸의 자유를 빼앗으려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징그럽다고! [불타라]”


-서걱!

정면에서 오는 촉수는 잘라버리고 뒤에서 오는 촉수는 불로 태워버린다.
하지만 촉수는 계속 재생하고 새로 생겨난다.


시스티아가 너무 그리웠다.
당연히 보고 싶은 것도 있지만, 이럴 때 시스티아가 있었으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텐데.

하르마나의 약점은 신성력이니까.

아, 진짜! 나도 신성력 좀 쓰고 싶네!

나에게 신성력이 아예 없는 것은 여신과 연관되어 있다.
시스티아가 성녀가 되고 여신과 어떻게 접촉하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여신 쪽에서 나와 만나기 싫다나 뭐라나.

엄청나게 미움을 받은 것 같다.


내가 뭘 했다고?

“젠장!”

결국에는 누가 먼저 지치는지 치킨 게임을 해야 하는 건가.
아마도 우세한 것은 나.
녀석은 밖에도 신경 써야 하니까 말이다.

그렇게 판단하고 그대로 상대하려고 하면 갑자기 오랜만에 뜨는 메시지 창.

[??스킬이 발동됩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발동.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을 때는  검에 이미 기묘한 기운이 맺혀 있었다.


그대로 녀석의 촉수를 베었다.


베는 감촉은 똑같았다.

그렇지만,  효과는 달랐다.


“뭐, 뭐야 이거!?”

“엇!?”


베인 사람도 벤 사람도 놀라는 광경이 연출된다.
베이면 재생하던 것이, 베인 곳을 시작으로, 점점 색이 거무스름하게 변하며 그냥 바닥에 액체로 후두둑 떨어진다.


마치 완전한 죽음을 선사한 것만 같다.

“리제! 그게 대체 뭐야!”

“나도 몰라!”


?? 스킬은 내가 이 세계에 왔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거지만, 그 정체를 알 수 없었는데, 그게 지금 발동된 것이다.
영문은 모르지만, 이거라면 이놈을 처리할 수 있어!

“이거 진짜 뭐야! 비겁해! 이런 거!”

“비겁이든 뭐든 이기기만 하면 그만이지!”

어디를 베든 타격을 줄 수 있다.
재생을 아예 하지 못하게 해서 녀석은 속수무책이었다.

점점 녀석의 방해는 사라지고 마지막에는 본체만 남는다.


그리고

-푹!


내 검은 본체에 그대로 꽂힌다.
베인 곳과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거무스름하게 색이 변하며 죽어간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신기한 광경.
도대체 이건 무슨 힘이지?

“이게...뭐야...아직...시작도...못했...는데...”


놈은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굉장히 아쉽고 또한 조금 두려운 듯한 그런 목소리를 남기면서.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검에 맺혔던 수수께끼의 기운이 사라진다.

“으, 응?”

몸에 힘이 빠져 그대로 주저앉는다.
마치  안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빼앗아 간 것만 같은 느낌.

원인은 하나다.
??스킬이 발동된 것.

이거 아무래도 효과가 확실한 만큼, 소모가 엄청난 스킬인 것 같다.

발동조건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앞으로 녀석과의 싸움에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


“하, 한 발자국도  움직이겠다...”

그런 문제는 남았지만, 일단 모든 일은 끝난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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