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다크엘프 (3)
다크엘프 마을에서 지내는 일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다.
내 예상보다 더 이들은 너무 폐쇄적이라 쉬이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뭐, 희망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이 부분은 정말 다행이라 해야 할 것이다.
시크리프의 말대로 완전히 노선을 변경한 나는 장로의 집에 와 있었다.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수많은 책장에 꽂힌 책들.
전부 어느 정도 시대의 흐름을 탄 흔적이 보이는 것들이었다.
엘프의 나라에서는 세피리아에게 부탁해 정보를 모아달라 부탁했지만, 별다른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드래곤 둥지에서는 아예 책 다운 책이 없었지.
그렇다면 남은 것은 이곳.
시크리프가 말했던 악마에 관한 정보나 그밖에 쓸만한 정보가 분명 있을 거다.
"야, 시크리프. 네가 말했던 책 어디에 있어?"
"나도 본지 오래돼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찾고 또 찾는 수밖에 없지."
"하…이런 노가다는 잘 못하는데."
"말을 할 시간이 있으면 하나라도 더 읽어라."
"어휴…"
그렇지만 제법 난항을 겪고 있다.
다크엘프 쪽에서는 일절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으로 나, 유미네, 시크리프. 이렇게 셋이서 이 많은 책을 뒤지고 있다는 것이다.
숫자로 생각하면 시크리프의 부하도 있지만, 그들은 내 노예도 아니라 강제할 권한도 없고 애초에 이곳 글자를 읽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유미네나 시크리프는 옛 다크엘프 글자를 읽을 수 있는 건 이해가 가는데 난 어째서 읽을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 세계에 오고 나서부터 여태까지 아무런 의문도 없이 썼는데 말하고 읽고 쓰고 하는 것을 전부 본래 쓰던 것 마냥 쓸 수 있었지.
어쩌면 이것도 창조신에게 받은 힘이라는 건가. 잘은 모르겠는데…
"장로도 뭐 할 얘기가 있으면 그냥 좀 해주지."
처음 대화했을 때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해줄 것같이 했던 장로이지만, 결국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이곳을 찾으시면 분명 많은 답을 얻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런 말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직접적인 협력은 하기 싫다는 걸까.
아니면…
"그 장로. 아는 거 별로 없는 거 아니야?"
그런 이유인지도 모른다.
분위기로만 보자면 아닐 수도 있는데, 어쩐지 이쪽이 더 맞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단 말이지.
그냥 내 비뚤어진 생각인가?
"그건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나도 현 장로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란 말이지."
"네 마을의 장로인데 왜 몰라?"
"난 마을을 나온 지 좀 됐다. 지금의 장로는 내가 나오고 나서 정해졌다는 듯하다."
"또 그런 사정이 있었군."
그런 사정을 알고 나니 문득 또 궁금해지는 것이 있었다.
"근데 넌 왜 마을을 나온 거야? 뭐, 다크엘프가 정기적으로 밖으로 나가 돈이라든지 필요한 것을 얻으려고 뭔가 한다는 건 아는데, 굳이 네가 나갈 필요가 있었어?"
"이래저래 마을에 박혀 사는 게 싫어서 나왔다. 뭐, 귀찮은 권력 다툼 같은 게 싫었던 게 가장 크긴 했다만. 일단 전 장로의 아들이기도 했고 말이지."
"아…그래서 끗발이 있었던 거군."
그 수수께끼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근데 잠깐? 전 장로의 아들이라면…어쩐지 귀찮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지금 장로랑 사이가 나쁘거나 하지는 않지…?"
"어떨지는 모르겠군. 난 관심이 전혀 없지만,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는 법이니."
"임마. 왜 그런 걸 그렇게 담담하게 말하는 거야…."
"…"
내 말에 시크리프는 그저 어깨만 으쓱한다.
딱히 엘프 때 같은 느낌은 없었고, 이곳에서 큰일이 벌어진다는 것도 못 봤으니까 문제없겠지?
"너희. 잡담할 시간이 있으면 얼른 한 글자라도 더 읽어라."
"네네."
거기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유미네가 있으면 그리 문제 될 건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다시 책을 읽는 걸로 돌아간다.
책은 정말 여러 가지 있었다.
다크엘프에 전해지는 잡다한 전설부터 소설책으로 보이는 것도 있다.
이건 엘프의 나라에서도 많이 있던 거였지.
다만 뭔가 내가 본래 있던 현대와는 다르게 진짜 진지한 역사책을 읽는 것 같아서 하나도 재미가 없지만 말이야.
소설의 탈을 쓴 교과서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나나 세아나 공부와는 그리 친하지 않아서 학생 때는 고생을 정말 했단 말이지.
집안도 좋지 않은데 공부도 바닥이면 주변에서 더 무시할까, 그래도 중간은 유지하려고 이를 악물었었지.
거기에 어떻게든 세아는 공부를 좀 시켜보려고 나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결국 내 성적 유지라는 목표만 달성되고 세아는 바로 공부랑 담쌓고 노래의 길로 갔었지.
지금 생각하면 좀 씁쓸한 기억이다.
"어? 이건…"
"뭐지? 뭔가 있었나?"
"아니요. 그냥 소설…인 거 같은데…"
다음 걸 집어 그 내용을 확인하고 나면 조금 의아한 내용이어서 자연스럽게 좀 놀란 목소리가 나왔다.
책의 내용은 마신에 관한 내용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마신이 주인공인 소설이라고 해야 하나?
"확실히 말해라."
"아니, 그게 있죠. 마신이 주인공인 소설인데 내용만 보면 확실히 상상 속의 소설 같긴 하지만 여기에 나오는 히로인이 용신 카르아로 나와 있단 말이죠…"
"뭐, 뭐라고?"
용신 카르아라는 말이 나오자 얼굴색이 바뀌며 나에게 다가온다.
내 옆에 바짝 붙어서 내용을 빠르게 확인하고 있다.
"아, 그 책 말인가. 나도 어렸을 때 읽은 적이 있다. 아마 마족과 교류하면서 만든 책이라 들은 것 같다."
"그럼 진짜라는 거야?"
"그건 나도 잘 모른다. 다만 최대한 사실을 바탕으로 만든 거라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군."
"사…실…이라고? 여기에 보면 여신이 마신에게 차인 원한으로 싸움을 거는 장면도 있다만…"
"어? 진짜다."
유미네가 보는 부분을 보면 딱 그 장면이었다.
여신은 마신을 좋아하고 있었는데 마신은 용신을 좋아해서 그 마음을 거절, 그에 대한 원한으로 마신에게 싸움을 거는 장면이 나왔다.
삼각관계라니. 이게 무슨 인간미 넘치는 모습이란 말인가.
"그들도 신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창조신의 힘을 나눠 받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지 않나. 관심은 없다만."
시크리프는 그렇게 말하고 흥미가 없는지 다른 책을 뒤적거린다.
그렇지만 나와 유미네는 다시 그 책에 집중했다.
어쩐지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만약에 이 이야기가 진짜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라면 확실하게 진실인 부분도 있다는 것.
여태까지 신경 쓰고 있지 않았는데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용신 카르아가 세라의 엄마라면 아빠는 누구일까?
신이니까 인간의 상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고 여겼기에 더 신경 쓰이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이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소설의 마지막은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마신과 용신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로 마무리되었다.
억지로 해피엔딩으로 하기 위해 끼워 맞춘 듯한 이야기다.
애초에 용신이 마지막에 존재하는 것만 봐도 이게 허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용신이 마신이랑 사귀는 사이였어요?”
“그, 그럴 리가 없다. 우리 드래곤에게 이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는 그런 건 전혀….”
허구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도 유미네에게는 꽤 충격적인 이야기인 듯하다.
굳이 충격을 받을 만한 내용은 아니라 생각하는데 말이야.
뭐, 나로서도 신경이 쓰이는 내용이긴 하다.
이 내용대로라면 세라의 아빠가 마신이라는 것이 되니.
거기에 여신과 마신의 싸움은 치정 싸움에서 번진 거라고 할 수 있고….
……설마. 아니겠지?
*
어쩐지 이상한 비밀을 알아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이 일단 조사는 중단되고 쉬기로 했다.
유미네도 이상한 정보를 머릿속에 넣어서 그런지 여러모로 복잡한 모양.
안절부절못하며 끙끙 앓는 것이 생각이 정말 많은 것 같다.
나는 일단 복잡한 생각은 접고 세라에게 가기로 했다.
내 마음의 오아시스. 힐링포션 등등 뭐든 회복 표현을 넣을 수 있는 우리 딸.
“아~ 아아~ 아아아~!”
“아니야. 그게 아니야. 아~ 아~아~ 아아아~~! 이거지.”
“우웅…. 세라는 똑같은 거 같은데….”
“아니야. 세라가 좀 틀렸어! 이 아줌마랑 쪼끔 달라!”
“맞아맞아! 아주 쪼끔 다르다!”
“야. 이 꼬맹이들이 정말! 자꾸 아줌마라고 부를래!?”
거기에는 세라와 세아. 그리고 다크엘프의 어린아이들이 모여있었다.
세아는 여전히 어린아이들에게 얕보여서 놀림을 당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만이 아니고 노래를 가르치고 있는 모양인데, 그 모습이 활발해 보여 다행이었다.
“세라야. 너무 실망하지 마. 괜찮을 거야!”
“히히. 난 세라가 부르는 게 더 좋아! 그러니까 힘내!”
“고마워! 세라 힘낼게!”
거참. 어느 종족이든 꼬맹이들이 꺅꺅거리며 활발히 노는 모습은 치유되네.
거기에 내 딸이 그 중심에 있다면 더더욱.
“음….”
그나저나 세라는 어느 종족이든 친화력은 좋았지만, 다크엘프는 더 친화력이 좋다고 해야 할까? 물론 탈피를 거쳐서 조금 성장했기에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가 힘든 부분이 있다.
세라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다크엘프 쪽에서 다가온다.
저 친근함은 마치 오랫동안 친구였던 것 같은 느낌.
방금 봤던 그 소설을 떠올리니 자꾸 그럴싸한 생각이 든단 말이지.
어쩌면 정말로 세라는 마신의 딸이고 그 때문에 다크엘프가 믿는 마신의 영향이 있는 거라고.
“스읍……하아~”
복잡한 마음을 안고 심호흡을 한 번 한다.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세라도 분명 그냥 넘어가기는 힘들 것이다.
알려지든 안 안 알려지든 분명 어디선가 그 문제가 부상할 것이다.
하긴 애초에 용신의 딸이라는 것부터가 범상치 않은 일이었지.
내 생각에 카르아는 그저 평범하게 컸으면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맡겨서 그저 평범한 드래곤으로.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카르아가 바라는 것이고, 그렇게 될 수 없는 건 본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 엄마~!”
연신 세아와 노래 연습을 하던 세라가 나를 발견하고 활짝 웃는 모습으로 달려왔다.
나는 내게 달려드는 그 작은 몸을 안아 들었다.
“엄마! 엄마! 이모 되게 노래 잘한다? 세라도 꼭 똑같이 부를 거야! 그리고 엄마한테 들려줄 거야!”
“그래. 기대하고 있을게. 우리 딸.”
“에헤헤~”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나를 올려다보는 세라의 볼에 뽀뽀해준다.
그러면 배시시 웃는 세라.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이 미소가 사라지는 일만은 없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반드시.
“조사는 다 끝난 거야?”
“아니, 아직 한참 남았어.”
“으…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는 거야? 여기 환경이 너무 열악해서 죽을 것 같아.”
세아가 허리를 두들기며 그렇게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곳은 저주받은 땅. 그렇게 불리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일반인이 이곳에 발을 붙인다면 살 가망성은 분명 제로일 것이다.
-땡땡땡!
“어!? 뭐, 뭐야!? 뭐야!?”
갑자기 마을 전체에 울리는 종소리.
세라도 놀랐는지 내 품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도망! 도망쳐야 해!”
“세라나 아줌마는 저쪽으로 가면 안 돼!”
“뭐라고?”
냉정하게 현재 상황을 파악하려고 하면 세라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이쪽으로 다가와 진심으로 걱정하는 얼굴로 그렇게 말한다.
나는 제외하고 두 사람만 가면 안 된다? 도망쳐야 한다?
그렇다는 건 분명히 이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긴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을 뒷받침하듯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몬스터다!! 몬스터의 대군이 쳐들어왔다!!”
역시 어디서든 위협 요소에서 빠지지 않는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