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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6화 〉 마계(3) (96/107)

〈 96화 〉 마계(3)

* * *

마왕 아스타.

게임에서는 최종 보스를 장식하는 인물.

칙칙한 붉은 머리에 보랏빛 눈동자, 타 악마와 똑같이 뿔과 꼬리가 있는 미남자.

역시 똑같이 생겼다.

거기에서는 상당히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지금 내 눈앞에 존재하는 녀석은 뭔가, 뭔가다.

“너, 이름은 뭐라 하지?”

“…….”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놀고먹기만 좋아하는 망나니 도련님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아는 카리스마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녀석이 그 마왕과 동일인물이라고?

아니, 이 무슨…. 그 간지 마왕은 어디 갔어? 아무리 이 세계가 게임과 같지는 않다지만, 이건 아니지!

“자기 이름부터 대는 게 순서 아니냐?”

약간 기분이 상해서 말이 좀 퉁명스럽게 나왔나?

녀석은 그런 내 말을 듣고 약간 몸을 움찔 떨었다.

조금 놀란 듯한 모습.

어떻게 해야 하는지 리리스를 힐끔 쳐다보지만, 그녀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나보고 알아서 하라는 것일까.

적당히 상대하라고 했는데 진짜 그냥 적당히 상대해보자. 뭔가 이상하면 무슨 신호라도 하겠지.

“넌 나를 모르는 건가?”

“그래. 그딴 걸 어떻게 알아.”

그렇게 이어진 내 말에 멍하니 나를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일그러트린다.

그리고는 곧 웃음을 터트린다.

“크하하! 그런가. 그딴 걸 어떻게 알아. 인가! 큭큭. 재미있군. 재밌어.”

폭소하는 놈을 보고 리리스에게 시선을 보낸다.

그녀는 더 하라는 듯이 손을 내 쪽으로 몇 번 밀어내는 동작을 했다.

가르쳐줄 생각은 있는 거야?

“마음에 들었다. 그럼 자기소개를 하도록 할까? 난 아스타. 곧 이 마계의 주인이 될 몸이지.”

“아, 그래. 난 리아제. 이쪽은 언니인 스니아. 동생인 사레나.”

대충 소개하는 모습에는 녀석은 즐겁다는 듯이 웃을 뿐이었다.

“리아제. 좀 더 경멸하는 눈빛으로. 쓰레기에게 하듯이.”

아니, 뭐가 좋다고 저리 웃는 건데?

그리 생각하고 있으면 리리스에게서 그런 말이 들려왔다.

이게 맞나….

“…뭘 처 웃어. 더럽게.”

“오호.”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더럽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면 그 얼굴이 환희로 물들었다.

이 녀석 혹시 매도당하거나 맞는 걸 즐기는 변태는 아니겠지?

낄낄 웃는 모습을 보며 소름이 돋는다. 양팔을 비비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냈다.

내 마왕에 대한 이미지가….

온화한 기분으로는 있을 수가 없었다.

“흠흠. 여기서 이럴 게 아니고 집으로 가서 자세하게 이야기를 나눠볼까?”

그래도 상식은 있는지 곧바로 제정신을 차리고 그렇게 말한다.

아무래도 유명한 놈이라 그럴까? 주변에는 많은 이들이 이쪽을 주목하고 있었다.

“야, 저 서큐버스들도 저러다 행방불명 되는 거 아니야…?”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지금의 마계는 그 녀석의 세상이니까.”

“저 녀석은 자존심도 없나. 근본도 모르는 녀석에게 빌붙어서 말이야.”

“야, 큰일 날 소리 하지 마…”

그렇지만 그리 좋은 이미지는 아닌 모양이다.

그를 보는 마족들의 시선에는 한결같이 부정적인 감정이 담겨있었다.

그들을 슬쩍 보며 아스타는 코웃음을 쳤다.

“행동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입만 놀리는 아둔한 것들.”

그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아마 일부 마족에게는 들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그저 조용히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그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는다. 비웃음이었다.

‘어쩌면 이 녀석, 방금 보였던 것이 본모습이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확신은 없지만, 그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는 마왕 아스타의 모습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자, 그러면 가볼까?”

“널 따라가면 행방불명이 된다는 거 같은데?”

“걱정하지 마. 다 헛소문이니까.”

“그래. 그건 좋아. 근데 우릴 데려가서 뭘 하려고?”

“오늘 이곳에 처음 온 미인들을 위해 대접이나 하려고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는 슬쩍 내 곁에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는다.

“만지지 마.”

“이런. 미안.”

손을 쳐내며 내가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양손을 들어 올리며 사죄한다.

평소 같았으면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데 역시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적응이 안 된다. 망할.

“대접이라고 해도 갑작스럽게 집에 가는 건 그러니 어디 근사한 가게에서 해주시는 건 어떠세요?”

“음. 뭐, 일리는 있군. 그럼 좋은 가게가 있으니 거기로 가볼까?”

리리스의 중재에 그렇게 정해지고 우리는 그의 뒤를 따라간다.

이 녀석은 중요한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하더니 혼자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을 감지하면 이쪽을 감시하며 따라다니는 존재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단순히 호위라고 하기에는 너무 살기등등한 것 같은데?

기묘함을 느끼며 우리는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가게에 도착.

처음부터 전세라도 낸 것 같이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다.

“당분간 손님은 우리밖에 없을 테니 편하게 지내라고. 아,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뭐든 시켜.”

“아, 그래?”

그럼, 그 말에 솔직하게 따라줄까?

“저기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술도 종류별로 하나씩 주세요.”

“네…? 이, 이걸 다 말입니까?”

“네.”

그렇게 주문하면 웨이터도 그렇고 아스타도 그렇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리리스와 헬레나는 그저 피식 웃어 보일 뿐이었다.

웨이터는 알았다는 말만 남기고 허둥지둥 달려갔다.

“그, 그걸 다 먹겠다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뭐든 시키라며.”

“그, 그랬지….”

“왜? 감당 안 되겠어?”

“그, 그럴 리가!”

내가 피식 웃어주면 자존심이 상한 듯 발끈하며 외친다.

…이거 뭔가 재밌는데? 자존심 긁으면 바로 넘어오는 거.

“뭐, 좋아. 따로 주문할 필요도 없으니….”

당황한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모양인지 헛기침을 몇 번 하며 뜸을 들인다.

그리고 확인을 하듯이 주변을 바라본다.

아무도 없다. 안쪽에서 열심히 주문한 것을 만들고 있는 이들을 제외하면.

이 분위기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적대하는 자와 만났는데 긴장감이 전혀 없었다고 해야 하나.

내가 속았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모르는 상황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스타는 꽤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향해 말한다.

“내가 상황을 만들어줬으니 이제 어쭙잖은 연기는 그만둬. 리리스.”

그런 말을 내게 말이다.

뭐? 리리스가 나라고?

“뭔 개소리야?”

“시치미 뗄 생각하지 말고. 그런 금방 덮치고 싶어지는 색기랑 괴롭힘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여왕님 속성이 한꺼번에 느껴지는 연출을 할 수 있는 건 리리스밖에 없으니까!”

“…….”

이번에는 내가 충격을 받을 차례였다.

내 현 상태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은 했는데 실제로 이렇게 열정적인 목소리로 듣게 되니 실감이 장난이 아니다.

“푸흡!”

“아하하!”

그렇게 내가 멍하니 있으면 리리스 장본인과 헬레나가 빵 터져서 연신 웃고 있었다.

이 녀석들 그냥 한 대 쥐어박을까…?

“아무튼, 이렇게 접촉해줘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나도 여태까지 오명을 뒤집어써 가며 연기를 한 보람이 있어.”

“아니, 이봐.”

“안심할 상황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떻게 힘을 합쳐서….”

“좀 닥치라고 했지!”

짝!

“커헉!?”

옆에서는 재밌다는 듯이 웃고 정면에서는 혼자 생각에 빠져서는 이야기를 들을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화가 난 나는 녀석에게 싸대기를 날려주었다.

시원스러운 소리와 함께 아스트가 날아간다.

그것에 약간 속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바닥을 구르는 녀석에게 다가가 멱살을 쥐어 일으킨다.

“이, 이게 무슨….”

“네가 애타게 찾는 리리스는 내가 아니고 쟤. 알겠냐?”

“거, 거짓말하지 마라! 여기까지 와서 거짓말을 할 필요가 어디에 있다는 거냐!”

“거짓말이 아니니까 말하는 거지! 이 멍청아!”

“으아악!?”

멱살을 놓고 다시 눕혀 그대로 밟는다.

최대한 자존심에 상처가 가게 머리를 집중적으로 아주 잘근잘근 밟는다.

“후욱! 후욱!”

어? 그런데 어쩐지 녀석의 상태가 심상치 않은 것 같다…?

처맞는데 왜 숨이 거칠어지는 건데?

“리아제~ 걔 진성 변태라 밟아주면 좋아할 뿐이야?”

“아 씨! 더러워!”

“컥!?”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이번에는 그냥 차버렸다.

저게…저게 마왕이라니.

내 간지 마왕 돌려내! 망할!

*

한 번 그렇게 흥분한 마음은 금방 풀리지 않았다.

우리는 조금 진정할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곧 주문한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먹으며 대화는 시작됐다.

“내가 뭔가 착각을 한 모양이로군. 미안하다….”

“아니에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음.”

인생사 새옹지마.

이번에는 그저 나쁜 일이 일어났다 생각하며 나는 그저 먹고, 먹고, 또 먹고, 마시고 또 마신다.

대화에는 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냥 먹고 마시며 기분이나 풀어야지.

비싼 곳이라 그런지 맛있기는 엄청 맛있네.

“아무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 헬레나는 녀석의 공격을 받아 약해졌다더니 정말인가 보군.”

“그래. 그렇게 되었다. 힘이 회복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지.”

“그러면 일단 너의 힘은 빌리지 못한다고 봐야 하는 건가….”

나에게 맞아서 벌겋게 부어오른 볼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기는 아스타.

쭉 저런 모습을 보이면 얼마나 좋아?

그냥 그때 보인 건 장난이었다고 해줬으면 한다.

“그래서 조력자를 찾아왔지. 여기에 있는 리제와 드래곤 로드의 힘이다.”

“드래곤 로드라고!?”

“그래. 이정도면 일단 충분하지 않을까 싶은데?”

“과연…. 이해했다. 네가 힘을 잃었음에도 이곳에 돌아온 이유를 말이야.”

그리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관계는 역시 적대라기보다는 라이벌 관계라고 해야 할까?

지금은 그렇다 치더라도 게임에서의 아스타는 어떻게 헬레나의 세력을 꺾고 마왕의 자리를 차지했는지 궁금한걸?

리리스가 그의 밑에 들어갔던 것과 헬레나는 왜 등장하지 않았는지도 말이야.

“쭉 궁금했던 게 있는데 넌 어떻게 그 녀석에게 죽지 않고 차기 마왕이라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지?”

“그건…나도 잘 모른다. 녀석은 갑자기 나타나 내가 가진 세력과 너의 세력을 빠르게 흡수하기 시작했고, 나를 마왕으로 올리려고 노력하고 있지.”

“으음. 목적이 뭔지 정확히 모르면 계획을 짜기가 힘들 텐데 말이지. 리리스.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도 정보가 너무 적어서 뭐라 확신하기는 힘든데, 아마도 놈들의 목적은 마신님의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

나는 그런 리리스의 말을 듣고 감탄한다.

내가 수기를 통해 알고 있는 미래 아닌 미래의 내용에도 놈들의 목적은 마신의 힘이라는 것이 판명 났다.

과정은 어떻든 결과는 같으니 그걸로 짜고 가면 된다.

다만, 그것을 말하기에는 정보가 부족했는데 이렇게 리리스가 주도적으로 말하다니.

“만약에 그렇다면 본인이 직접 마왕이 되면 끝나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아마도 뭔가 있는 거겠죠. 본인이 마왕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정확하게 짚고 있군.’

아마도 마왕이 되면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디스만의 특기가 먹어치우는 것이라고 한다면 충분한 이유였다.

마왕이 되어서 이 한 몸바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고 다른 이를 마왕으로 만들어 그것을 먹이와 같이 먹이겠다는 것이다.

토가 나올 지경이다.

그렇지만, 역시 놈들의 목적은 그것만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마왕이 되어서 마신의 힘을 노리는 것이라면 원래부터 직접 마신을 노리면 되는 것이 아닌가?

다만, 직접 노릴 방법이 없으니 지금부터 뭔가를 준비한다는 것일 거다.

“아무튼, 이걸로 제대로 된 준비를 시작할 수 있겠어요.”

“나는 현재 직접 도움은 주지 못해. 알아챘을지도 모르지만, 항상 감시가 따라다니니 말이지.”

“알고 있습니다. 간접적인 도움만 주시면 돼요.”

그렇게 마족들 간의 회의는 계속된다.

먹으면서 그것을 지켜보며 나는 나대로 생각한다.

이곳에서는 제국에서 일어났던 일 같이 피바람이 불지 않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이 어디 마음대로 되나?

아주 지겹게도 그런 말은 참 잘 들어맞는다는 것을 나는 다시금 깨닫게 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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