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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7화 〉 용신 (97/107)

〈 97화 〉 용신

* * *

“제가 분명 이런 일로 일일이 부르지 말아 달라고 부탁까지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만?”

“에이. 너무 쩨쩨하게 그러지 마라. 또 금방 돌아갈 수 있잖아.”

차분하지만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 진지함이라고는 전혀 없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

그 두 가지의 목소리가 부딪친다.

커티스는 아디스만의 말에 관자놀이를 엄지로 꾹꾹 누르며 두통을 다스리려 애를 먹었다.

그는 힘을 갈구하던 인간이었을 때 엉겁결에 모시게 된 주인으로 부하로서 섬기기에는 너무 힘든 타입이었다.

“현재 마계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를 마왕으로 만들어서 마신을 끌어내는 일도 아직은 진행을 해야 하고 말이죠. 마족의 성녀인 헬레나도 아직 처리를 못 했고…. 아무튼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유능한 부하들이 많이 있다며? 그럼 걔들한테 맡기면 된 거지.”

“…지금 마계에는 그녀가 있습니다만?”

“그래서 더 좋은 거 아니겠어? 애초에 난 보스고 리제는 도전자야. 느긋하게 기다릴 줄도 알아야지. 시나리오에 맞게 말이야.”

“…….”

그렇게 콧노래를 부르며 경쾌한 발걸음을 옮기는 그를 보며 커티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너무나 제멋대로다. 그리고 너무나도 오만하다.

그는 확실히 왕이 맞다. 그에 맞는 힘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오만한 왕은 그 끝이 좋았던 적이 거의 없다.

자신이 아끼는 부하에게 죽거나 아니면 급부상한 다른 세력에 죽거나…아무튼, 끝이 비참하다.

물론 모든 경우가 그렇지는 않지만, 확률이 높은 것만은 확실하다.

커티스는 끝이 그렇게 되지 않을까 괜히 찝찝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지금 일만 마무리가 잘 되면 날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다 깨끗하게 청소하고 리제를 신부로 맞이해서 재미있게 사는 거야.”

“정말로 그렇게 되길 빌지요.”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는 뭐든지 하자. 이미 이 자의 줄을 잡아버렸으니 여기서 해나갈 수밖에 없다.

작게 한숨을 쉬며 그렇게 나아가기를 얼마 후.

그들은 곧 목적지에 도착했다.

위에서 내려다봐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절벽.

용신의 발톱자국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리제와 시스티아의 고향에 있는 것이다.

그런 곳에 이들이 온 이유는 무엇일까?

“호오. 완전 나락 같네. 나락.”

“희미하게 수많은 결계와 봉인이 느껴지는군요. 여기가 맞는 듯합니다.”

“그래. 리제의 동선을 생각하면 역시 여기밖에 없겠지. 역시 정보는 있어야 한다니까.”

아디스만이 그렇게 말하며 혀를 날름거린다.

마치 맛있는 것을 앞에 두고 입맛을 다시듯이.

“그럼, 기다리고 있어. 금방 다녀올 테니까.”

“하아…. 알겠습니다.”

역시 할 일이 많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커티스는 그의 말대로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다.

“야호~”

그것을 확인하고 아디스만은 망설임 없이 절벽에 뛰어내렸다.

마치 아이가 놀이하는 것만 같이 천진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떨어진다.

­파직! 파지직!

그런 그를 거부하려는 듯한 무언가가 가로막으려 하지만 그것은 씨알도 먹히지 않고 그냥 뚫려버린다.

마나를 흡수한다는 작용도 그에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

이윽고 그는 가볍게 땅에 안착했다.

봉인된 신의 성소.

삼대 신 중 하나가 봉인된 장소.

“어디 보자.”

【……왔나.】

그렇게 아디스만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으면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신 카르아. 이곳에 우연히 떨어지게 된 리제에게 힘을 주고 자신의 알을 맡겨 밖으로 내보낸 존재.

그리고 눈앞의 아디스만과는 나쁜 쪽으로 인연이 깊은 존재.

“어라? 별로 놀라지 않으시네요?”

【언젠가는 오리라 생각하고 있었지.】

“흠. 그런가요. 아무튼, 오랜만이라고 해야 하나요? 용신님.”

【겉치레는 필요 없다. 해야 할 것이 있다면 얼른 해라.】

“오랜만에 봤는데 너무 매정하네요. 감동의 재회 같은 건 없을지언정 인사 정도는 괜찮지 않나요?”

【난 할 말이 없다.】

“체.”

아디스만은 기분이 상했다는 듯이 혀를 찼지만, 정말로 기분이 나쁘진 않아 보였다.

다만 카르아의 단호함에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는 했다.

정보를 좀 얻고 싶었는데 그러지를 못해서.

오랫동안 누구와 만나지도 못하고 이곳에 갇혀 있다고는 하지만, 역시 옛날의 순진한 카르아가 아니라는 걸까.

그때는 정말 가지고 놀기 좋았는데.

그녀의 모든 것을 탐했을 때의 그 쾌감은 절대 잊기 힘든 것이었다.

“근데 저항은 하지 않아도 돼요? 이 뒤에 어떻게 될지 잘 알고 있으면서.”

【나에게 그럴 힘이 있었다면 진즉 했겠지. 네놈을 앞에 두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원통할 뿐.】

“흠. 말은 그렇게 하지만 별로 원통해 보이지는 않는데요?”

【멋대로 생각해라.】

그 뒤로 카르아는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은 당황이라도 할법한데 너무 평온했다.

너무 오랫동안 이곳에서 혼자 지내느라 포기가 빨리 온 것일까?

이곳의 봉인은 카르아를 봉인한다기보다는 그녀를 지키기 위한 장치에 가까웠다.

육체가 소멸하고 영혼만이 남아 연약한 그녀를 지키기 위한 것.

하지만 너무 견고하게 쌓아 올린 이 성에 들어올 수 있는 자가 없었을 것이다.

가장 최근은 리제가 있었지만, 그것도 오래 있지는 못했지.

아무튼, 조금 이상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어차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아디스만은 자신이 먹지 못한 반쪽을 먹으러 온 것이다.

빌어먹을 드래곤 놈들에게서 다시 반쪽을 찾아야 하긴 하지만, 이 일이 끝나면 그건 그리 어렵지 않다.

아니, 애초에 그 힘을 빌리기만 해도 어려운 일은 아니지.

다만, 일을 좀 쉽게 가려고 생각했을 뿐.

“뭐, 좋습니다. 저도 그리 시간을 끌고 싶은 건 아니니까요.”

아디스만은 그렇게 말하며 아앙~ 하고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러면 주변에서 하얀 빛 무리가 그 입에 밀려들어 갔다.

주변에 남아 있던 마나와 카르아의 영혼.

그 모든 것을 먹는 것이다.

신을 탐하는 행위.

금기된 행위.

‘이제부터가 시작이로구나…’

점점 소멸 되는 것을 느끼며 카르아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대로 사라지는 것은 별로 두렵지 않았다.

이렇게 되길 바라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예상은 했던 것이니.

다만, 자신이 준비하고 있던 것을 녀석에게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인데.

만약에 들키더라도 그 아이가 지켜내 줄 수만 있으면….

분명 앞으로의 일에 큰 도움이 되리라.

‘결국, 한번을 안아 주지 못했구나….’

떠오르는 것은 기나긴 시간 소중히 간직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아이이자 분신.

그 모습을 안아 주기는커녕 한번을 보지 못했다.

그게 너무나도 마음에 남는다.

‘난 네가 행복하게 지낼 수 있기를 빈다. 아가….’

그 생각을 끝으로 그녀의 모든 것은 소멸한다.

한때는 믿었던 이에게 육체를 먹히고 영혼을 먹힌 용신 카르아는 그렇게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것을 무엇보다도 기뻐하는 것은 바로 장본인인 아디스만.

“후….”

주변에 있던 모든 것을 먹고 만족스럽다는 듯이 배를 두들기는 그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렇게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곳에서 떠나려던 아디스만은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문득 들은 위화감.

분명 만족스러움을 느끼고 자신이 예상한 힘도 느껴졌지만, 무언가가 이상했다.

그저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어쩐지 이게 끝이 아니라는 느낌이….

“뭐, 됐나.”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다.

과연 이게 나중에 어떤 식으로 작용이 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누구에게 유리하게 작용 되고 불리하게 작용 될지를.

*

“응?”

다크엘프 마을에 남은 세라는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슴속에 갑자기 먹먹함이 들면서 동시에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슬프면서도 따뜻한 이상한 감각.

어린 세라에게는 쉬이 이해할 수 없는 감각이었지만, 그것이 굉장히 소중한 것이라는 건 어떻게든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안에서 천천히 피어오르는 이상한 힘에 관해서도….

“뭐야? 왜 그래?”

“이모…. 손….”

“?”

세아는 자기한테는 어리광 하나 부리지 않는 애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다.

언제나 거의 장난감 취급받는 상황에서 이건 상당히 당황스러운 부분이다.

“이러면 됐어?”

“응….”

그래도 어쩐지 심상치 않게 느껴졌기에 세아는 자신에게 내민 작은 손을 잡았다.

지금까지 몇 번 아무렇지 않게 잡았던 손이었지만, 어쩐지 지금은 더 작게 느껴지는 것만 같다.

세아는 손을 이은 채로 쭈그려 앉아 세라와 눈높이를 맞췄다.

“왜 그러는 데?”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응. 뭔가…여기가 이상해….”

세라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대고 그렇게 말한다.

그 몸짓과 표정, 그리고 목소리. 그것을 듣고 단순히 그곳이 아프다거나 하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았다.

가슴이 이상하다. 아프다.

그것은 즉 마음이 아프다는 것이다.

엄마가 곁에 없어서. 라는 이유는 아닌 듯싶다.

아까까지만 해도 정말로 씩씩하게 이곳에서 지내고 있었으니까.

정말로 본인으로서는 이유를 모르는 아픔으로 보였다.

‘나도 줄곧 느끼고 있는 것이었지.’

이 세계에 와서 ‘오빠’와 재회하고 나서부터 줄곧.

그리고 그것은 점점 진실에 다가가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 뒤에는 또 다른 고민으로 새로운 아픔이 생기고 또 생긴다.

그녀는 그것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면 너무 신경 쓰지 마. 괜히 지치기만 한다.”

경험에서 나오는 말을 아이에게 한다. 그것을 이해하고 행동할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말해야만 했다.

정말로 모르는 일에 좌지우지되는 것은 힘들다. 특히나 그것이 큰일이면 큰일수록 그 강도는 더해 간다.

그때는 어떻게든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 제일이었다.

세아는 그렇게 터득했다.

“…응. 어쩌면 나중에 알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래.”

세라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이 녀석 정말로 애가 맞나?

아이는 자라는 것이 빠르다지만, 세라는 그런 말로 어떻게 정의를 내릴 수가 없다.

단순히 자라는 것이 아닌 무언가에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 말이지 않을까?

“고마워. 이모.”

“천만에.”

건방지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미워할 수는 없다.

이모라 불리는 건 아직 조금 어색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겠지.

“그럼 얼른 가자! 나 또 노래 가르쳐줘.”

“그래 알았어.”

그렇게 금방 이야기가 마무리 지어지고 그대로 손을 이은 채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응?’

이어진 손을 통해 무언가가 전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연결된 것 같은 느낌?

‘기분 탓인가?’

너무 순간적이라 어떻게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세아는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걷는다.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는 변화에 눈치채지 못하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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