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 마신(2)
* * *
얼마 전까지는 제 몸과 같이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 갑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면 과연 어떨까?
여태까지 이랬던 적이 있었을까? 분명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이는데….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강하게 하려면 약해지고, 약하게 하려면 강해지고.”
“마치 말을 듣지 않는 아이와 같군.”
“……어쩐지 그렇게 말하니 청개구리 같네.”
“청개구리?”
“아니, 그런 게 있어.”
아무튼, 현재 너무 곤란한 상황이었다.
헬레나가 막타를 치게 하여야 하는 상황임에도 그냥 내가 쓸어버리는 상황이니까.
이곳이 중간층이긴 하지만 쭉 간단하게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면 확실히 내가 강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키우던 게임에서의 용사보다 몇 배는 더 강한 정도.
물론 실제와 게임은 다르니 확정 짓는 건 좋지 않지만.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지. 너무 날로 먹으려고 한 벌일 수도 있다.”
“음….”
뭐, 버스의 개념이라는 게 날로 먹는 거긴 하다만….
“그건 그렇고 너는 괜찮은 건가? 내가 보기에 녀석들에게서 나온 마기가 너에게 흘러들어 가 흡수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마기가 나한테 흘러들어와서 흡수된다고?”
내가 가진 것은 순수한 마나. 드래곤 하트가 원천으로 작용하는 힘이다.
마나, 신성력, 마기.
이 세계에서는 이 세 가지의 힘의 원천이 있고 이 세 가지는 절대로 섞일 수 없다.
그러니 마나를 원천으로 쓰는 나에게 마기가 흡수될 리가 없었다.
만약 흘러들어왔다고 해도 금방 빠져나갈 텐데?
게다가 그걸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 이상했다.
“이곳을 마족이 오른다는 것은 힘을 키우는 것과 시험 이외에 의식의 개념이 존재하지.”
“의식?”
“이곳에 있는 전대 마왕의 흔적을 없애고 자기의 색으로 물들일 준비를 하는 거다.”
용사가 오를 때는 마왕을 잡는데 방해되는 몬스터에 불과하지만, 마족이 오를 때는 그런 의미가 있나.
단순히 레벨업을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란 말이로군.
“내가 볼 때…아무래도 자격을 지닌 건 너인 것 같군.”
“마족도 아닌데?”
“…자격이 꼭 마족만 있으리란 법은 없지.”
“만약에 그렇다고 해도 난 마왕이 될 생각 없어.”
“너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마신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
“…….”
아…이거 괜히 분위기 안 좋아지게 왜 이래?
꼭 마왕이 되겠다는 애가 옆에 있는데 그걸 괜히 내가 옆에서 가로채는 거 같잖아.
헬레나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지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진행을 해봐야 알겠군. 모든 건 마신님을 만나 뵙고 나면 알 일이야.”
헬레나가 정말로 냉정하게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해도 어쩔 수 없나.
본래의 목적대로 마신을 만나면 알게 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 전에 헬레나가 말했던 걸 확인해볼까.
6층을 지나 7층.
처음으로 나타난 개와 비슷한 몬스터를 조절되지 않는 힘으로 끔찍하게 죽이고 인상을 찌푸리며 그에서 나오는 마기에 집중해보았다.
“…!? 진짜네….”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마기가 공중에 흩어지더니 아주 미약한 입자의 모양으로 나 몸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드래곤 하트에.
제대로 집중하지 않으면 보이지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
“이상하네….”
신성력과 마기는 마나와 다르게 누구나 다루는 건 할 수 없다.
신성력은 인간과 아인들에게는 누구나가 미약하게나마 존재하고 그중에서 여신에게 얼마나 사랑을 받느냐에 따라 그 힘이 강해지며, 사용이 가능하게 된다.
마기는 마족이나 다크엘프와 같이 마신의 권속의 전유물인 힘이고 말이다.
즉, 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힘이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는 건 마신이 나를 인정해주고 있다는 말인데….
인간, 드래곤의 하프지만, 여신이 나를 싫어해서 신성력이 하나도 없는 것이 뭔가 연관이 있는 걸까.
“단지, 쓸 수는 없는 거 같네.”
성질이 다른 마기가 어째서 드래곤 하트에 모이는지는 모르겠고, 따로 자리를 마련해 존재하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걸 따로 운용하는 건 불가능해 보이고 그냥 쌓이게 두는 것밖에 할 수 없다.
“도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거지?”
나는 진행을 서둘렀다.
*
마왕성은 게임에서는 최종 스테이지임에도 특별한 건 없다.
그저 몬스터를 잡고 또 잡고 올라가며 마왕에 도달하는 것이 전부인 곳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마왕은 없고 목표는 그 위라고 할 수 있는 마신.
마왕이 없는 최상층은 과연 어떨까?
그렇게 12층까지 진행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힘을 과잉으로 사용하기는 하지만 전부 어렵지 않게 죽이고 그 증거라 할 수 있는 마기도 드래곤 하트에 상당히 쌓였다.
차라리 이걸 헬레나에게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마 힘을 많이 회복시킬 수 있었을 텐데.
“드디어 도착했군.”
“마왕의 옥좌….”
게임에서 용사가 이 층에 다다르면 옥좌에 마왕이 앉아 있고 진부한 대사를 날리며 대화를 좀 하다가 전투가 시작되고 다시 스토리가 진행되고 게임이 마무리된다.
시간으로 따지면 그리 오래되지는 않는데 역시 마지막이라 그런지 기억에 깊게 남았다.
“여기서는 어떻게 해야 해? 13층이 있다며?”
“본래 가는 길은 막혀 있지만, 내가 있으면 쉽게 열 수 있다.”
그 말을 하며 헬레나가 앞서 나갔다.
그리고 멈춘 것은 입구부터 옥좌, 그 중간.
게임에서는 싸움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
헬레나는 그 중앙에 서서 잠시 가만히 있더니 엄지를 힘껏 깨물었다.
붉은 피가 뚝뚝 바닥에 떨어져 적셔갔다.
뭘 하는 건지 잠시 지켜보고 있으면,
우웅!
그 피가 바닥에서 움직이며 여러 가지 선이 이룬다. 그리고는 공명하듯 울리는 소리가 가득 퍼져 나갔고 이윽고 그 앞에 마기와 비슷한 무언가가 모이며 어떠한 형체를 가졌다.
“…검?”
자세히 보면 그건 검이었다.
전체적으로 검은색에 붉은색 장식이 있는 흉흉해 보이는 거대한 검으로.
그리고 그것은 바닥에 꽂혀있어서 마치 용사가 성검을 뽑기 전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건….”
“마검 그리샤다. 용사가 성검을 사용하듯 마왕이 사용하는 검으로 알려 있지만, 초대 마왕을 제외하면 사용한 기록조차 없는 물건이지.”
그것은 여태까지 저 검을 사용할만한 마왕이 나오지 않았다는 말로 들렸다.
아니면 주인을 엄청 따지는 녀석이든지.
“뭐, 쓰지는 못하지만, 이 녀석은 마신님과 이어져 있기에 이동수단으로 사용하기에는 딱 좋지.”
키이잉!!
헬레나가 검신에 손가락을 몇 번 튕기면 마검이 마치 만지지 말라는 듯이 울어댔다.
역시 성검과 같이 의사를 지닌 물건이로군.
“이동하는 건 금방이니 리제. 내 손을 잡아라.”
“그래. 아, 그 전에 너 그거 괜찮아?”
“그거?”
“엄지.”
“…….”
헬레나가 그리샤를 불러내기 위해 깨물었던 손가락에서는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헬레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몸도 슬쩍 부들부들 떨고, 굉장히 불안정해 보였다.
뭐…지금은 겉모습과 똑같이 아이와 같은 사고방식이니까.
“어, 어떻게 하지. 리제여. 피가 안 멈춘다…!”
“그야 그렇게 깨물었으니까….”
“본래라면 이런 상처쯤은 바로 회복이 되는데…! 으윽…. 아프다. 아파아….”
“…….”
아. 이거 웃으면 안 되는데. 헬레나 입장에서는 심각한 상황인데 자꾸 웃음이 나오려고 하냐.
세라랑 같이 있었을 때는 이래저래 눈물짓던 때도 있었었지. 마계로 오고 나서부턴 그런 모습은 일절 보이지 않았지만….
“자, 포션 뿌려줄 테니까 가만히 있어.”
“으으…. 빨리! 빨리!”
허둥지둥 내게 계속 피가 나는 엄지를 내밀고 폴짝폴짝 뛰었다.
나는 계속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고 인벤토리 안에 있는 포션 하나를 꺼내서 그 상처 부위에 뿌렸다.
“오…나았다….”
빨리 나으라고 중급 포션을 뿌렸더니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는 헬레나를 보며 결국 피식 웃음이 나왔고 깨끗한 천을 꺼내서 덕지덕지 묻은 그 피를 닦아 주었다.
“자, 됐다.”
“고맙다….”
세라도 그리 손이 가는 아이는 아니고 그건 지금의 헬레나도 마찬가지인데, 가끔 이렇게 돌보는 때에는 정말 흐뭇하다니까.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쑥스러운지 고개를 점점 밑으로 향하는 헬레나.
그런 그녀를 안아 올려 마검 그리샤 앞에 섰다.
그렇게 내 품에서 흠흠, 하고 목을 몇 번 가다듬은 헬레나는,
“(이동!)”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 아마도 신성 마법을 사용할 때와 비슷한 맥락으로 이어지는 말이겠지.
그 말을 하면 순간적으로 몸이 붕 뜨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주변 풍경은 아무것도 없는 검은 공간으로 바뀌었다.
이런 아무것도 없는 곳이 마왕성 13층이라고?
“리제. 이제 내려주어라.”
그렇게 놀라고 있으면 헬레나가 조금 긴장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을 해왔고 나는 곧바로 바닥에 내려주었다.
그러면 헬레나는 바로 바닥에 무릎 꿇고 앉더니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당신의 권속이자 무녀 헬레나가 마신님을 뵙기 청하오니…)”
그리고 또다시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기 시작하면 주변 공간이 이리저리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리저리 흩날리고 다녔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들은 전부 마기였다.
주변에는 마기가 충만하게 쌓여있었던 것이었다.
“무슨….”
그리고 그 마기가 한곳에 모여 형태를 이룬다.
방금 마검과 같이 귀여운 것(?) 아니었다.
내가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거대한 의자. 그에 앉아 있는 인간의 형상.
그리고 그 형상은 점점 모양을 갖춰, 한 거대한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마치 피와 같은 붉은빛이 진하게 감도는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
감고 있던 두 눈을 천천히 뜬다.
피와 같은 붉은 눈.
그것을 목격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몸집은 분명 평범한데 그렇게 보이는 건 눈앞의 존재가 얼마나 강대한 존재인지 나로서는 짐작할 수 없었다.
마신. 마신 오르사아드.
“잘 왔다. 용신의 수호자. 그리고….”
그가 나를 보며 마치 재밌다는 듯이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웃는다.
“우리의 창조주께서 초대한 이방인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