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12화 자신감
-
"어서 오십시오. 공작님."
"그래."
테라딘 북부의 공작령을 다스리는 에덴 공작은 어쩐지 심기가 불편한듯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의 심기를 관찰한 집사는 공작이 좋아하는 차를 대령해 집무실 책상이 두었다.
집무실 책상에는 수많은 서류들이 빼곡히 싸여있었다. 에덴 공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일을 제대로 하는 놈이 없군."
"따로 서류 처리를 하는 자를 두는 게 어떠신지..."
"그놈들을 믿을 수 있어야지."
지금도 시시각각 다른 공작령의 공작들이 견제를 하며 이곳저곳 들쑤시는 마당에. 함부로 믿을 수 없는 자를 주요직에 놓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멍청하긴. 지금 마물들이 들이닥치는데 뭘 하고 있는 건지."
서류의 대부분에는 마물에 대한 피해가 빼곡했다. 누군가가 죽고 다치고 마을이 무너져내린 피해들.
".... 나가지 말라니깐. 말을 듣지 않는군."
분명 영역 밖으로만 나가지 않으면 마물이 다짜고짜 침공하는 일은 없다. 그런데 자꾸 영역 밖으로 나가 채집하고 마을을 짓고 그러니 사고가 나는 것이다.
에덴 공작을 한숨을 내쉰 체 황금빛 도장이 찍힌 서류를 집어 들었다. 황제 폐하의 서류인데...
"....."
"공작님?"
"용사라..."
그또한 분명 알고 있는 존재였다.
다른 차원에서 온 특별한 힘을 가진 존재들. 이들이라면 마왕의 세력을 줄일 수 있겠다만, 그들 자체 또한 문제였다. 지금도 서류 일부에는 용사의 만행에 의한 피해도 제법 있기 때문에.
"황제 폐하께서 무엇을..."
"용사를 이용해 북부 숲을 정리하시라는군."
"북부 숲이라면..."
"그래. 미친 녹색 괴물들이 있는 곳이지."
괴물은 괴물로 잡으라는 소리군. 테라딘에도 지금 용사 무리가 제법 있으니 그들을 이용해 처리하라는 소리다. 북부 숲은 테라딘의 주요 자원이 나오는 곳이었으니.
"잔인하시군요."
"그게 황제 폐하의 매력이시지."
분명 저 녹색 괴물은 황실 직속 기사단조차 상대할 수 없는 괴물들. 그리고 용사들은 그들에게조차 미치지 못한다. 둘이 싸우다 하나가 죽든, 둘이 죽든 어느 쪽이든 손해 보지 않는 일이었다.
에덴 공작은 도장이 찍힌 서류를 내려놓았다. 서류 한구석 그림에는 이빨이 길쭉이 난 못생긴 녹색 괴물들이 흉포하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
역시 이게 스토리 보는 맛인가?
오래간만에 보는 스토리에 나는 감격의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스토리 퀘스트를 진행하면 마치 그 장면을 눈앞에서 목격하듯, 내 눈으로 그 장면이 스쳐 지나간다.
나랑 같이 영상을 본 다윤과 베린이 한마디씩 말했다.
"이런 게 있었네요? 저는 스토리 진행 없이 해서 몰랐는데."
"우리 보고 싸우다 죽으라는 거야?"
"뭐, 비슷한 거지. 어차피 우린 죽어도 다시 부활하니깐."
아까 영상에서 나온 저 사람들은 우리가 진짜 죽는다 해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더욱 죽이려 들지도.
"용사님들이십니까?"
검은 정장에 반 안경을 낀 누군가가 다가왔다. 영상에서 봤던 집사였다.
"그래."
"신의 선택을 받은 용사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리긴. 지금 당장이라도 빨리 죽기를 기원하고 있으면서.
사실 대부분의 NPC들은 용사에게 호감을 같지만. 주요한 위치에 있는 자들이나 일부 고수들은 용사를 싫어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아무래도 세계 구한다고 이리저리 사고 치고 다니니 짜증이 나겠지.
실제로 전 시즌에도 한 길드 때문에 왕국 하나가 박살 난 전적도 있다. 여기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전, 남작 제른이라고 합니다."
"그래 제른아 어서 안내해주렴."
"네."
우리는 지금 퀘스트를 진행하기 위해 공작령 성에 와있었다. 원래는 이런 스토리 퀘스트 없이도 60렙만 찍으면 자연스레 메인 퀘스트를 진행할 수 있지만, 이렇게 스토리 퀘스트를 진행하면 굳이 60렙을 찍지 않아도 메인 퀘스트를 얻을 수 있다.
"이곳입니다."
남작 제른이 집무실의 문을 열자. 회색 머리의 검은색 눈을 가진 남자가 우리를 바라봤다. 나이는 한 30~40대로 보이는 외모. 실제로는 더 많을 것이다. 그는 수명이 줄지도, 늙지도 않는 존재니깐.
"어서 오게. 용사들이여."
"아, 안녕하세요."
"안녕. 공작아."
다윤과 베린이 한마디씩 대답했다. 베린의 무례한 반응에 살짝 심기가 불편해진 것 같지만, 이내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용사들 알다시피 세상에는 커다란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 뭐, 그대들이 더더욱 잘 알겠다만."
"그렇지."
"더 커다란 위험을 막기 전에, 작은 위험을 먼저 막아주길 바라는데..."
"작은... 위험이요?"
다윤이 아리송한 말투로 물었다. 공작은 고개를 한번 끄덕인 뒤 말했다.
"북쪽 숲에는 녹색 괴물들이 살지. 녀석들 때문에 이곳의 주민들이 계속 피해를 보고 있어. 그래서 자네들이 그곳을 처리해 줬으면 좋겠다만..."
"지원은 해줘? 밥은? 돈은? 무기는?"
"..... 물론 충분한 지원은 할 생각이다. 일이 마무리되면 더더욱 큰 지원을 약속하지."
베린의 말에 미간이 찌푸려진 공작은 애써 괜찮은 말투로 말했다.
저거 화난 거 같은데. 근데 솔직히 내가 공작이어도 화났을거 같다. 물론 지원은 당연히 해줘야 하긴 하지만.
나는 한 발짝 앞에 나선 뒤 말을 내뱉었다.
"그 공작님? 질문이 있는데."
".... 해라."
"솔직히 저기 너무 쎄서 우리 3명만 가기에는 좀 그런데, 기사단이 조금 지원해 주면 안 되나?"
"...?!"
"아니, 저기 고블린만 200마리가 넘고. 고블린 킹도 있을 텐데 우리로선 좀 무리라. 그 정도 지원은 가능하지? 아니, 하죠?"
공작이 고민하고 있다. 스토리상 황제의 명 때문에 내가 안 한다고 하면 문책을 받을 것이다. 용사들을 북쪽 숲으로 보내지 못했으니.
그렇다고 해도 기사단들을 함부로 보냈다 죽으면 전력의 손실이 올 것이다. 공작은 잠시 책상을 탁탁 친 뒤 말했다.
"좋다. 나의 기사들을 좀 보내주지."
"오케이~"
"그 대신 조건이 있다."
"어?"
"아무리 그대들이 용사라고 해도. 난 아직 그대들의 실력을 확인하지 못했다. 그대가 정말 신의 선택을 받은 용사라면 나의 기사단 정도는 가볍게 이기겠지?"
"?!"
"나의 기사단과 1 대 1대련을 해 이기면 지원을 해주도록 하지."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제법 머리를 쓴 선택이었다. 만약 우리가 기사단조차 이기지 못한다면 황제에게 변명거리를 말할 명분 정도는 만들 수 있겠지. 그리고 지금 상태의 기사단은 절대 보통의 용사들이 이길 수 없는 구조니깐. 손해 볼 게 없는 장사였다.
"좋아. 대련은 바로 하지."
물론 우리쪽이 손해를 안본다는 소리다.
- 스토리 퀘스트. C-1 / 기사단과의 대련
당신은 기사단의 지원을 받기 위해 기사단과 1 대 1로 대련을 해 승리해야 합니다. 만일 승리 하지 못한다면, 해당 퀘스트는 무효화되며 실패로 돌아갈 것입니다.
- 체력 80% 이상 유지한 체, 기사단 한 명에게 승리 (0/1)
-
"우리가 이길 수 있나?"
수련장에 도착한 베린이 걱정 된다는 말투로 말했다. 물론 정상정인 루트를 밟고 있다면 결코 이길 수 없는 수준의 기사들이다.
[ 테라딘 공작령 기사단 아인 LV.100
HP : 17800
설명 - 테라딘의 북부 공작령 기사단 중 하나인 아인입니다. 빠른 장검술을 사용하니 그의 칼날에 닿지 않게 주의해야 합니다. ]
100레벨 짜리 기사 NPC.
우리가 잡은 멧돼지나 박쥐보단 피가 낮다. 하지만 몬스터와 달리, 지능을 이용해 가지 각색의 전투 방식을 구사하기 때문에 쉽게 볼 상대는 아니다.
"너 정도면 질만한 수준은 아니니깐. 걱정 마."
"그럼.. 뭐, 그보다 너는 어떻게 상대하게? 전처럼 한방 쏘고 쓰러지는 거 하려고?"
"그런 건 안 써. 어차피 그런 걸 쓸 만큼의 상대도 아니고."
"자자! 그쪽이 용사님들이군."
소란과 함께 누군가 큰소리로 우리를 불렀다.
거대한 몸체에 사람만한 대검을 등에 차고 다니는 남자.
"반갑다. 나는 기사단장 루드라고 한다. 우리 기사단이 용사님과 대련한다고 하던데... 뭐, 나는 안 할 테니깐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남자는 큰소리로 웃으면서 말을 내뱉었다. 남자 주위에는 10댓 명의 기사단이 있었는데 아무도 자기가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루드는 한 발짝 나서서 우리를 보고 말했다.
"뭐, 그럼 그쪽 여자분부터 하실까? 이길 것 같은 사람 골라봐."
"네? 저요? 어... 음..."
기사단들은 부릅뜨고 다윤을 바라본다. 여기서 뽑힌다는 건 가장 만만해 보인다는 증거. 다윤은 살짝 고민하더니 아까 내가 살펴본 남자를 골랐다.
"전 이분할게요. 이름이 아.. 인 님이셨던가?"
".... 무모하군. 다쳐도 모른다. 용사."
"그거야 보면 알겠죠."
"크하하하! 재밌군. 재밌어! 기사단 중에서도 여성 기사가 있는데 굳이 그 녀석을 안 뽑고, 다른 녀석을 뽑다니!"
지금 보니 여성 기사가 하나 있긴 했다.
자기를 안 뽑아서 얼떨떨한 표정. 아마도 기사단에서 나름 배려해 준 모양인데.
'그거 큰코다치는 말인데.'
다윤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는 녀석들이나 할 행동이었다. 아인은 기가 찬듯한 표정으로 준비 자세를 갖춘 체 말을 꺼냈다.
"최대한 빠르게 끝내주지."
"자 그럼... 시작!"
루드의 말과 함께 아인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윤이 놀란 듯 뒤를 돌아보자마자, 나타난 아인이 그대로 검을 내질렀다.
카카가-강!
"음?!"
순식간에 나타난 검의 형태가 아인의 검을 막자, 당황한 듯 몸을 뒤로 뺐다. 다윤은 움직이지도 않은 체 검에 뭔가를 불어넣고 있었다.
"감히!"
전투 중에 준비 태세를 갖춘다는 것은 상대를 얕잡아 본다는 뜻. 아인이 흥분한 듯 빠르게 다윤에게 돌진했다. 위로, 또는 아래로, 사방으로 검을 내지르지만 아인의 검은 다윤에게 미치지 못한 체 계속해서 막히고 있었다.
'무형검..'
다윤의 직업, 월광 검사(月光劍士)의 고유 스킬이다.
무형의 검을 소환해 검의 역할을 하는것. 무협에서는 이기어검이라고 불리는 기술. 아직 전직 상태가 아니라 제대로 된 형상을 가지진 못했다. 검이라기에는 흐물거리는 뱀같은게 3마리 떠다니는 정도.
하지만 아인의 검을 막기에는 충분했다.
역시 사기 직업이다. 고작 40레벨에 전직도 제대로 안된 상태로 100레벨 때 전사와 맞먹다니.
'내가 할 말은 아닌가?'
"으아아아아!"
아인이 소리를 지르며 이성을 잃은 듯 다윤의 급소에 검을 내지르려는 순간. 기를 모으던 다윤이 수직으로 검을 내리그었다.
촤아아아악!!
착각이었을까? 한순간 초승달의 형상이 보인듯했다.
"이런! 아인!"
위기를 느낀 루드가 급히 난입해 아인을 공격 범위에서 빼내었다. 아인이 사라진 자리에는 바닥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아인을 빼낸 루드는 불편한 듯 말했다.
"이봐... 용사. 너무 심하게 한거 아닌가? 죽이려고 대련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
"이봐?"
"....아! 미, 미안해요. 힘 조절이 안돼서..."
"크흠. 아무튼 너의 승리다. 용사란 말이 괜히 붙은 게 아니군."
다윤은 극 집중 상태였는지, 진이 빠진 체 돌아왔다. 그도 그럴 것이 전직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로 큰 기술을 쓸려니 무리가 온 것이다. 간신히 죽음에 문턱에서 벗어난 아인은 벌벌 떨고 있었다.
...이거 정신적 피해는 우리가 보상해야 하나?
두 번째는 베린이었다.
베린 역시 따로 준비해둔 비슷한 또래의 견습 기사를 준비해 두었는데, 베린은 오히려 다윤이 뽑지 않은 여성 기사를 선택했다. 그리고 정말 야비하게 그림자 속에서 툭툭 때리며 체력을 깎아 승리했다.
...참 녀석 다운 승리 방식이다. 정작 당사자는 만족스러운 것 같지만.
"...."
"크흠...."
"나를 고르진..."
마지막인 내 차례가 오자 다른 이들이 긴장했다. 앞서 보여준 용사들의 실력을 봤으니깐 나도 엄청 강하다고 생각하겠지. 루드는 여전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자.. 마지막 순서 군. 누굴 고를 거지? 설마 저 견습 기사를 고르는 건..."
"너."
"...? 뭐?"
"너 말이야. 나는 기사단장 루드를 고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