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38화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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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다.
"하아..."
또 걷는다.
"...하.."
그만...제발...
나아간다. 끝없이 보이지 않는 길. 그리고 어둠.
난 여기 왜 있는가.
'걱정 마. 반드시 벗어나게...'
그래. 난 여기 갇혀있었지.
탁.
"....."
그제서야 멈춰 섰다. 뒤를 돌아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후우....꿈..."
생각을 바로잡는다.
난 이미 구해졌어.
용사... 아니, 윤 오빠한테.
"이건 악몽이야."
꿈을 자각하고 있다면. 나의 토끼 능력을 활용한다면.
자각몽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리라는 눈을 감고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을 가둔 존재와 마주한 기억. 어두컴컴한 시야가 들어서고 감은 눈에 빛이 쏟아진다.
힐끔.
리라는 눈을 살짝 떴다.
숲속이다. 뒤를 돌아보니 동굴이 눈에 보인다.
"....여기에 들어가면 돼."
"정말 이뤄 줄 거야?"
'......!'
동굴로 2명의 그림자가 다가온다. 리라는 서둘러 몸을 나무 뒤로 숨겼다. 그러고는 둘의 대화를 지켜봤다.
'하나는 나고, 다른 하나는....'
익숙한 얼굴. 하지만 누군지 모르겠다. 리라와 비슷한 토끼 영물인 것은 알겠다.
꿈속의 리라는 말했다.
"정말 여기 갇혀있으면 내가 의식에 사용되지 않아도 되는 거지?"
"그래. 내가 널 의식이 끝나면 꺼내줄게."
"...혹시 다른 영물이나 신들이 보복하지 않을까...?"
"......"
둘은 잠시 침묵에 갇혔다.
말을 꺼낸 것은 리라가 아니었다.
"상관없어."
"어?"
"내 계획만 성공한다면. 그딴 신들 따위 이길 수 있으니깐."
계획?
'난 그런 걸 들은 적이 없다. 대체 무슨 계획을 세우고 나를 가둔 것인가.'
둘의 소리가 작아진다. 대화를 듣기 위해 더욱더 다가가다.
바스락!
"아."
소리를 너무 크게냈다.
"......."
그녀가 리라를 바라본다. 꿈속의 리라가 아닌. 본인을.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얌전히 있으라니깐. 말을 안 듣네."
"...!"
꿀렁....
꿈속 세계가 뒤틀리고 의식이 흐려진다. 안돼...
"계획이 틀어졌지만... 뭐, 상관없겠지. 어처피 다 죽을..."
'뭐라...'
의식이 완전히 사라진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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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라!!"
"......."
"리라!리라!리라! 리...컥!"
깨어나자마자 시끄러운 무언가를 무심코 쳐버렸다.
"...덴트?"
"날 때리냐! 안 그래도 서러워 죽겠는데..."
리라는 고개를 숙여 사과를 대신한 다음 천창을 올려다봤다. 거대한 철창.
밖에서 보면 마치 거대한 새장처럼 보인다.
"이제 의식이 3시간도 안 남았어. 그런데 잠이 오냐? 꿈이라도 꿨나 봐."
"꿈..."
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이런 자각몽은 기억이 확고히 가지고 깨어나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치 누군가 기억을 지운 것 마냥.
그나마 기억나는 건 나를 가둔 토끼 영물. 아마도 이번 의식에 나오겠지.
리라는 철창에 기대앉았다.
'나쁜 영물 같지만... 그래도 괜찮아. 나한텐 윤 오빠가 있으니깐.'
용사인 오빠라면 반드시 나를 해방시켜 줄 것이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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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초원 북쪽. 세 개의 거대한 기둥이 올라가 있다. 마치 하늘을 떠받치는 듯이.
그 가운데 기둥 높은곳, 거대한 무언가가 초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로루닌의 삼신(三神) 호랑이신 비호 LV.340
HP : ???
설명 - 신의 영역, 로루닌의 삼신 중 하나인 호랑이 신 비호입니다.
현재 다른 삼신이 모두 부재중이기에 유일한 로루닌의 주인의 위치해 있습니다. ]
역시 다른 삼주 신들은 자리를 비웠군.
의식을 통해 신의 자리에 오른 자들과 달리, 저 신의 격과 강함은 진짜다. 그 수준만 놓고 본다면 이랑의 부모인 여우신과도 비견될만한 힘을 지닐 것이다.
그 곁에는 다른 하위 신들이 있었고, 자리의 구석에는 전에 봤던 늑대신 리르도 있었다.
리르는 나를 보더니 왼쪽 눈을 찡긋 거렸다.
'...넌 안뽑아 임마.'
"환영한다. 영물들이여."
쩌렁-! 하는 소리가 초원을 뒤덮었다. 초원 안에 있던 모든 영물과 조력자의 다리가 풀려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저것이 진짜 신(神)의 힘.
아무리 최상급 악마라 해도, 적어도 로루닌 안에서는 저 녀석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호랑이 신 비호는 천천히 일어나 말을 이어나갔다.
"이번이 410번째 의식이군. 부디 이번 의식에는 신의 자리에 오는 미물이 있으면 좋겠군."
그렇게 말하는 비호의 눈은 초원에 쓰러져있는 호랑이 영물에 닿았다.
호랑이 영물은 침을 꿀꺽 삼키며 자신이 도달할 경지를 바라봤다. 하지만 비호는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용사이기 때문에, 신들과 비슷한 위치의 장소에서 대기 중 이였다.
"그대들이 용사들이군. 얘기는 들었다."
"그래."
"....."
너무 세게 나갔나?
하지만 여기선 우리가 갑이다. 로루닌은 창조신의 뜻에 의해 만들어진 장소이기에, 절대 용사를 배척하거나 죽일 수 없다.
물론 먼저 공격하면 죽일 수 있겠지만.
비호는 불편한 표정을 띄며 말했다.
"창조신의 선택을 받은 용사들이여. 그대들이 이번에 참여한다고 들었는데... 누굴 고를 거지?"
"난 좀 볼게. 적어도 첫 번째 의식까지는 말이야."
".... 시작부터 골라야 한다. '공정성'을 위해서 말이지."
"공정성? 애초에 토끼와 거북이를 배척하는 것부터가 공정이 아니지 않나?"
한순간 의식장이 싸해졌다. 당연한 흐름이다. 금기를 말했기 때문에. 암묵적인 모두의 약속, 그걸 용사가 깬 것이다.
비호의 기세가 한층 거세졌다. 나는 삼주신의 위압감을 떨쳐낸 체 말을 이어나갔다.
"공정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지. 물론 그게 당연한 거고 창조신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겠다만, 적어도 그들을 배척하는 건 창조신의 뜻이 아니지 않나?"
"....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그러니 나중에 고르겠어. 그리고 조건이 있다."
삼주신의 진체가 부들거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한 발짝이라도 더 나가면 내 몸이 그대로 터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녀석은 날 절대 죽일 수 없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적어도 내가 참가하는 이번 의식에서는 토끼나 거북이를 의도적으로 힘을 합쳐 공격하지 않아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그들을 고른다는 소리는 아니야. 다른 영물을 고를 수도 있지. 아예 첫 번째 의식이 실패한다면 고를 수도 없을 테고."
"... 조건은 그게 다인가?"
"하나 더."
"무엇이지."
"이번에 참가하는 재물도 의식을 참가하게 해라."
"뭐?"
"그들도 영물이다. 충분히 자격이 있지."
"그 녀석들은 재물이다. 재물은 의식에 참여할 수 없어."
"보통의 의식이라면 그렇지."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재물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거대한 새장처럼 생긴 2개의 재물함에는 리라와 덴트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10번째 의식이다. 그리고 이 의식은 '영물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지. 어때? 해줄 수 있겠지? 싫으면 이대로 가고."
나는 오래전 월드 어드벤처를 할 당시. 이 3번째 스토리 인 '신의 의식' 스토리를 좋아했다.
유저가 직접 영물 중 하나를 골라, 그를 성장시켜 의식을 받게 하는 스토리.
당시 선택형 퀘스트가 몇 개 없던 시절이라 아무리 스토리를 안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꼭 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쓴 정보글이나 공략글을 자주 봤다. 어떤 영물을 해야 좋은지, 혹은 누가 봐도 이길수 없는 영물을 유저의 능력으로 끌어올려서 이기는 방법. 그리고 각 영물들의 정보.
나는 그런 설정들을 보며 재미있어 했고. 그것을 넘어 설정집을 사서 보기도 했다.
5년 전 일이라 까먹었었지만 최근 로그아웃을 했을 당시 볼 수 있었던 내용.
그것은 10번째 의식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10번째 의식은 다른 의식들과 달리 특별하지. 이유는 여러 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종족의 숫자에 제한받지 않는다.'"
"....."
"뭐라!"
"그런 말도 안 되는!"
"저 용사 님의 말이 사실인가요?
영물과 신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항상 하나의 영물만 출전했기에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니, 일부로 숨겼겠지. 10번째 의식을 원하는 방식으로 이끌기 위해.
"조용!"
비호의 소리가 의식상 전체를 타고 로루닌을 뒤덮었다. 한순간에 모든 소리가 잠잠해졌다.
"용사. 그런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지?"
"그건 네가 더 잘 알 거 같은데?"
"....."
아마도 창조신이 알려주었겠지. 정도로 생각하고 있겠지. 뭐, 맞는 말이기도 하다.
창조신이 운영자니까. 창조신이 알려준 거나 마찬가지지. 나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의미로 재물의 참가를 허용해 줘야겠어. 아! 걱정하지 마. 정의로운 용사가 여러 마리를 도와주는 행위는 하지 않을 테니깐."
"그렇다 해도 인정할 수 없다. 저들이 참가하면 재물은 누가 하지? 재물이 없다면 의식은 소용없다."
".... 흠, 이건 안 말하려 했는데 어쩔 수 없군."
비호의 눈의 이채가 깃들었다. 설마 하는 심정. 나는 영물들을 바라본 체 입을 열려 하자 비호가 벌떡 일어났다.
"그만! 더 이상 말하지 마라."
"허락해 준다는 의미인가?"
"..... 그래. 재물의 참여를 허락한다."
"?!"
"비호님?"
"말도 안 됩니다! 그럼 누가 재물을 한단 말입니까?"
신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재물 없는 의식이라니, 거의 팥 없는 붕어빵이나 다름없는 이야기지만 상관없다. 애초에 팥은 이미 있다.
영물들을 당황하며 신들을 올려다봤다. 비호는 자리에 앉은 체 말했다.
"그럼 1차 시험, '인내의 시험'을 시작하겠다."
"비호님?"
"... 내 말이 안 들리나?"
살기가 흉흉하게 나오기 시작하자 옆에 앉아있던 곰의 신이 식겁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그럼 1차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든 영물들은 자리에 서주시길 바랍니다."
신들은 다급하게 시험을 준비하자 베린이 파티 채팅을 쳤다.
[-베린 / 뭐야? 다들 왜 저래?]
[*김윤 / 내가 이 의식의 존재를 망칠만한 비밀을 알고 있거든. ]
[-김다윤 / 뭔데요?]
[*김윤 / 비밀. 아직은 비밀이야. 단지 재물이 의식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정도만 알고 있어.]
[-베린 / 뭐 이리 비밀이 많아.]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이 비밀은 나만이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루트에 도달할 수 있다.
나는 잠시 자리를 비운 뒤 으슥진 곳에서 천을 꺼냈다.
"자, 그럼 나오시죠."
나는 천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천에 새겨진 여우 문양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천속에서 한 마리의 여우가 나왔다.
여우는 모습이 점차 변하더니 작은 여자아이의 형상을 띄었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쫑긋 선 귀. 그리고 분홍빛의 보석 같은 눈.
그 눈은 앞으로의 일을 기대하는 듯 잔뜩 반짝이고 있었다.
"안녕?"
"오랜만입니다."
"그래. 얘기는 다 들었어. 로루닌이라... 오래전에 왔었는데 다시 오는 날이 오다니."
"아시죠? 우리의 목적."
"알지. 이런 계획을 세우는 건 너밖에 없을 거야."
"그럼 믿겠습니다."
"그래. 오랜만에 화끈하게 놀아볼까?"
이랑은 능력을 사용해 영물들 틈에 스며들었다. 그녀는 이번 의식에 참여해 중요한 역할이 될 것이다.
이로써 모든 준비는 끝냈다.
"냥?"
그래 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