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52화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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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랑은 엘린시아를 걷고 있다.
“아… 젠장.”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가능하면 만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김윤이 이곳에서 활동하면 반드시 엘프들을 만나면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것이다.
어처피 마주치게 될 일. 이랑은 매를 빨리 맞기로 했다.
“후우…”
도착한 곳은 푸른 지붕으로 둘러싸인 곳. 누가 본다면 푸른 버섯집을 연상케 하지만, 실상은 세련된 현대의 가택처럼 꾸며진 집이다.
띵동~
-누구…
이랑은 문에 걸린 검은색 판을 쳐다보았다. 이러면 집안에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이랑?
“나야. 문열어.”
-아니, 어째서 여길…
“문 열라고.”
철컹!
육중한 문이 서서히 열리고 이랑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새하얀 털을 가진 여우가 이랑을 쳐다보고 있었다.
“...”
어지럽혀진 집안. 이상한 원반형 물체가 돌아다니며 쓰레기를 치우고 있지만 끝도 없었다.
“개판이네.”
“난 개가 아니라 여우인데…”
“알면 잘 좀 치우고 살지 그랬어.”
이랑이 손을 한번 튕기자 바닥에 굴러다니던 쓰레기들이 전부 사라졌다.
“앗! 내가 먹다 남긴 허니치킨! 그거 2시간 기다려서 산 건데!”
“그럼 돼지우리처럼 놓지 말던가.”
이랑은 여러 소스에 잔뜩 묻은 소파를 여우불로 닦아낸 뒤 풀썩 앉았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여우는 당황스럽게 이랑을 쳐다봤다.
“그… 뭘 하러 온거야?”
“변신 좀 하지.”
“아! 아, 안돼!
여우는 기겁하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랑이 빤히 노려보자, 결국 포기한 듯 인간 형태로 변신 했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길게 내려오고 분홍빛의 눈은 반짝였다. 귀와 꼬리 또한 쫑긋 솟아올랐다.
이랑과 비슷한 모습. 하지만 얼굴과 풍겨져 나오는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무엇보다도 하도 많이 먹은 듯 배가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심하게 드러날 정도는 아니지만.
“이루. 살만 한가 봐. 아직도 이러고 있는 걸 보면.”
“언니가 이상한 거야! 엄마 자식들중에 그렇게 인간처럼 바쁘게 사는 사람이 어딨다고…”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막내만큼은 해. 여기서 몇년을 산거야?”
“...300년?”
딱!
“아!”
홧김에 이루의 머리를 막대기로 쳤다. 옛날 같으면 막대기가 아니라 주먹으로 쳤을 텐데, 그때 일을 생각하면 함부로 칠 순 없다.
한번 쳤다가 죽일뻔했으니깐.
이루는 손으로 머리를 싹싹 문질렀다.
“으...언니만 너무 쌘 거 아니야? 엄마 자식들 중에 언니만 강하잖아. 뭐, 엄마가 따로 준거라도 있어?”
“그딴 거 없어. 수련하면 알아서 느는데 네가 안 하는거지.”
사실이다.
이린이라는 고위신의 힘을 타고났기에 수련을 한다면 자연스럽게 그 힘은 강해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의 자식들은 수련을 자주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주어진 수명은 살해당하지 않는 한 거의 무한하고, 신의 자식들은 악마와 대적하지 않으니 강해질 이유가 없다.
수명, 혹은 강함을 위해 신이 되려는 영물들과 달리, 신의 자식들은 강해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영물들이 원하는 걸 가지고 태어났으니까. 이랑이 다른 자식들과 달리 별종인 것이다.
“언니는 수련을 왜 하는 거야? 해봤자 좋은 거라도 있나?”
“하면 격이 높아지지.”
“높아져봤자 뭐 하는데. 어차피 딱히 쓸데도 없잖아.”
“후우…”
흠칫!
이루는 이랑의 한숨을 보고 식겁했다. 분명 이런 전개라면 높은 확률로 주먹이 날라올 것이다. 그녀는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그, 그래서 무슨 일로 온 거야?”
“그 새끼 어딨어.”
“어? 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어, 언니. 그게 누, 누군데?”
“말 더듬지 말고.”
“그…”
이걸 어떻게 해야 적당히 넘어갈까. 그리 생각하던 찰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이루와 비슷한 외형을 가진 남자.
“이루~ 내가 새로 생긴 맛집에서 사왔-”
“그쪽도 살만한가 보네. 이진.”
남자는 이랑과 이루를 번갈아가며 상황을 파악하다 기함을 내질렀다.
“미, 미친! 야! 이루 튀어! 좆됐다!”
이진은 손에 들린 봉투를 내버려 둔 체 집 밖으로 후다닥 뛰쳐나갔다. 이랑은 한숨을 내쉬더니 그대로 손을 뻗었다.
힘없이 끌려오는 이진.
“으아…! 안돼! 죽기 싫어!!”
“안 죽이니깐 쳐 오세요. 오라버니.”
“오빠...그냥 포기하면 편해…”
이린의 자식 둘은 금세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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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이 이렌시아의 남편이라고?”
“맞아.”
뭐… 확실히 여기에 외부인이 많이 개입을 했으니깐. 이렌시아의 허락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 었겠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엘프도 아닌 인간이, 하이엘프인 왕과 결혼까지 한건 신기하네.
“그쪽한테 궁금한 게 많은데. 용사님.”
“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묘한 신경전이 흐른다. 뭔가 악마나 몬스터를 대적할 때의 느낌은 아닌데... 묘하게 거슬린다고 해야 하나.
그보다 아까부터 주황이가 난리를 쳤다.
-인간! 인간! 저 인간! 그 남자와 비슷하게 생겼다!!
‘뭐?’
-그 남자! 우리를 가둔 인간과 비슷하게 생겼다! 머리색도 똑같고! 얼굴도 비슷해!
‘확실해?’
-응!
나는 남자를 살펴본다. 하늘빛 머리카락과 전혀 판타지스럽지 않은 옷. 판타지보단 공상과학에 가까운 옷차림이다.
나는 보석과 최강자가 연관이 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남자를 보면 전혀 그와 연관되어 있지 않아 보인다.
어쩌면 세 자매를 보석에 가둔 인간은 전혀 다른 사람일지도.
그렇다면 나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는 건 무슨 말이지?
‘그러면 왜…’
“거, 머릿속으로 혼자 대화하지 말고 나랑 대화 좀 하지. 후배님.”
“...!”
어떻게 알았지?
딱히 티를 내지도 않았고, 이랑이나 레빗조차 보석 속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는데.
이피아는 피식 웃었다.
“그런 놈들을 많이 봐서 말이지. 내 고향에는 사람들과의 얘기보다 다른 특정 존재와의 대화를 많이 하거든. 너의 반응을 보니… 맞는 거 같네.”
고향…? 얘기를 들어보면 단순히 지구가 아닌 것 같다. 게다가 후배?
“뭔 소리야. 후배라니.”
“말 그대로. 난 전직 용사니깐.”
“용사? 유저였다고?”
“유저? 너의 고향에서는 그렇게 불리나 보네. 맞아. 유저.”
“언제부터 이곳에 왔는데.”
“글쎄… 한 200년 전쯤? 더 됐나?”
“고작 200년 만에 이렇게 바뀌었다고?”
나는 도시를 돌아봤다. 겉면만 제외하면 완전한 현대화를 이룬도시.
엘프들은 자연적인 옷 대신 정장과 현대 복장을 입고, 엘프 병사들은 슈트와 마력으로 만들어진 총을 들고 다닌다.
그 마탄의 파괴력은 웬만한 마법을 뛰어넘는다.
‘괜히 정령들과 계약을 안 하는게 아니지.’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상급 정령과 계약하느니, 제약 없이 강하고 편한 마법 총을 드는게 더 효율적인 것이다.
물론 최상급 이상과 계약하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난 나와 같은 세대 중에서도 특별하거든. 덕분에 나를 제외한 모든 용사가 사라져도 그 자리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지.”
“같은 세대… 너랑 같이 게임을 하는 유저들이 다 죽었단 말이야?”
“게임…? 그게 무슨 소리지. 여긴 게임 같은 게 아니야. 우리는 용사로 선택받은 거지.”
“...”
역시. 유저라길래 기대했는데. 어쩔 수 없는 건가.
가상현실인 만큼, 이곳의 NPC들은 아무리 이곳이 게임이라고 해도 믿지 않는다. 그것이 몬스터든 사람이든 마왕이든.
그리고 눈앞에 있는 저 자칭 선배도 마찬가지. 만일 유저였다면 나의 말에 부정할지언정, 의문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한 가지 가설이 떠올렸다.
만약 이전에 유저였지만 그 데이터가 남아있는 거라면?
그 데이터가 유저였던 기억을 배제하고 단순히 NPC로 남아있는 거라면?
‘가능성 있지.’
그렇다면 단순히 우리 행성에만 게임이 운영되는 게 아닌 건가?
어쩌면 나 또한 토벌에 실패하면 이렇게 기억을 잃고 갇히게 될지도.
“됐고. 바깥은 어떻지? 마왕이 세계를 정복하려 들진 않나?”
“평화로워.”
마왕은 성에 틀어박혀있다. 애초에 마왕이 마왕성에 나와서 용사들을 때려잡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니깐.
아니, 말이 안 될 것 까지는 없지만. 애초에 그렇게 되면 게임 진행이 안된다.
시작하자마자 마왕의 공격을 받고 죽을 테니까.
“다행이네. 시아가 많이 걱정해서 말이야.”
“시아? 아...”
애칭인가 보네.
엘프들의 왕의 남편이자, 도시의 주인. 생명의 위험도 받지 않을 테고… 수명의 제약도 사라진 거 같고.
흠… 기억을 잃고 게임에 갇혔어도 행복하게 사는 거 같기도 하고.
물론 이렇게 살 생각은 없지만.
가족을 냅두고 여기에 갇혀 살 생각은 1도 없다.
“아무튼 너에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
“뭔데?”
“이곳은 위대한 히아트 정령 신의 가호를 받아 세계로부터 분리된 곳이다. 나 또한 이곳에 들어와, 다른 용사들이 존재를 잃고 사라져도 나는 살아남았지.”
“그래.”
“이곳은 안전하지만 언제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 세계는 준동하고 있다. 전직 용사인 내게는 느껴져. 얼마 안 가 세계는 마의 힘으로 폭주되어 멸망할지도 몰라.”
거 말이 참 기네. 누가 3줄 요약 좀 해줬으면 좋겠다.
“나는 그것에 대비해 나의 고향 지식과 힘을 이용했고. 엘프들은 강해졌지. 하지만 이걸로 부족해. 지금 마의 힘이 강해진 걸 보면 만약 먼 훗날 이곳의 분리가 해제된다면 우리는 악마들에게 대적할 수 없을지도 몰라.”
“...”
“물론 우리도 약한 게 아니야. 이곳은 정령들또한 매우 강하고, 엘프. 그리고 나 또한 강하지. 하지만 기왕이면 전력이 하나라도 늘어나면 더 좋겠지. 그래서 제안한다.“
드디어 본론인가?
처음부터 본론부터 말해주면 좋았을 텐데.
“너와 동료들. 모두 엘린시아의 왕국의 병사가 되어줘. 물론 대우는 섭섭지 않게 해줄게. 너와 그들은 모두 기사단장급 직위를…”
“안해.”
“어?”
“안 한다고.”
왕위를 줘도 모자랄 판국에 고작 기사단장 직위라니. 용사가 뭐로 보이나 보다.
“그리고 뭔 말을 그리 길게 해. 그냥 마왕을 잡기 두려워서 이곳에 숨어든 거잖아.”
“...너.”
이피아의 주먹이 푸른 기운이 깃들기 시작했다.
“흠.”
싸울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 너무 길어져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모양이다.
개소리 받아주기도 힘들었고.
“후회 안 하나, 후배.”
“뭔 후회를 안 해.
“마왕은 장난이 아니다. 그는 강해.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의 발끝 하나 닿지 못할거다.”
“그건 너겠지.”
“...!”
“본인이 못 했다고 남들도 못할 걸로 보여? 그리고 너야말로 용사가 장난으로 보이나? 여신이 고작 기사단장 따위를 시키려고 용사를 소환한 게 아니야.”
이피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용사. 과거 그도 용사였다.
하지만 압도적인 적이 그의 의지를 꺾었고. 사랑하는 연인이 그의 여정의 발목을 잡았다.
그랬기에 도망쳤다.
그리고 지금, 과거의 의무와 현재의 삶이 맞부딪친다.
“난… 용사를 바란 게 아니다. 그저 행복한 삶을 살고 싶었을 뿐. 그걸 증명해 보이겠다!”
“허…”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고 이렇게 과몰입하는 사람으로 변하다니. 나도 저렇게 변할까 봐 살짝 두려워 졌다.
나는 이날, 반드시 마왕을 목을 따리라 맹세했다.
“으아아아!!”
이피아가 나를 향해 달려온다. 푸른 기운이 주먹에 넘실거린다. 그 외에 딱히 특별한건 보이지 않는다.
‘혹시 모르니까 지능 활성화는 키고…’
상대는 유저였던 전대 용사다. 나는 최대한의 변수를 줄이고 싶었다. 천천히 다가오는 그를 보며 사용할 기술을 생각했다.
‘일격을 사용하고 간을 볼까? 아니야. 괜히 치열하게 싸워주면 더 날뛸 수 있으니 한방에 보내게 풀버프로 이격을… 근데 그러면 엘린시아가 다 박살 날 텐데.’
한참을 고민하던 찰나. 이피아의 발걸음이 멈췄다.
“엥?”
시간이 느려져서 멈춰 보이는게 아니다. 스스로 멈췄다. 그러고는 살짝 뒷걸음질을 쳤다.
마치 누군가를 보고 겁을 먹듯이.
“주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