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57화 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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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우웅--
하늘 위로 여러 개의 배들이 날아간다. 거대한 배들이 하늘을 자유자재로 돌아다니는 것을 보니, 이전에도 느꼈지만 정말 장관이 따로 없다.
"오랜만에 비행정이네요."
"비행정이 좋긴 하지."
우리는 엘린시아를 떠나 다음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로루닌 근처에 있는 작은 섬에 왔다.
섬이지만 바다에 있는 건 아니다.
여긴 섬이 하늘에 떠있는 천공 섬이니깐.
"... 어떻게 섬이 하늘에 떠있지."
"여긴 판타지 게임이잖아."
베린의 의문에 정설로 답해줬다. 판타지니깐 가능하다. 참 간편한 논리다.
중력이나 기타 물리 법칙을 싹 다 무시하니깐.
이곳은 주변 대륙이나 섬의 중간 교통로라고 봐도 무방한 곳이다. 대륙 내 이동이 아닌 이상, 바다를 건너려면 반드시 이곳을 지나쳐야 한다.
"줄이 엄청 기네요..."
"어쩔 수 없지."
"으....! 지겨워!"
NPC들이 하루에도 수백, 수천 명이 비행정을 타기 때문에 줄이 길 수밖에 없다.
물론 몇 분 만에 행성을 횡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나나 이랑은, 이런 느린 교통수단 따위 안타도 된다.
하지만 베린과 다윤은 그런 능력이 없으니깐.
"냥!"
아, 레빗도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행성을 돌 수 있다. 나나 이랑보다 빠를지도?
다윤이 줄을 기다리며 레빗을 쓰다듬었다. 레빗을 가르릉 소리를 내며 당근 마카롱을 갉아먹었다.
엘린시아에서의 레빗은 원활한 문화생활을 즐기기 위해 수인 형태의 모습으로 다녔지만, 단순히 이동 중이라면 대부분의 시간은 고양이 상태로 지낸다.
고양이의 모습은 레빗의 소원이기도 했으니깐.
"다 비켜! NPC들아!"
그 순간 줄 뒤쪽이 소란스러웠다. 세련된 두 자루의 총을 허리에 찬 카우보이 복장의 남자. 그는 길어진 줄의 NPC들을 치우며 전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거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어이! 거기 선원!"
"네네! 용사님!"
사람들을 통솔하며 배에 태우고 있던 직원이 급하게 남자 쪽으로 다가왔다. 직원이 다가오자 남자는 쓰고 있던 카우보이모자를 총으로 치켜 올리며 말했다.
"미르틱행 배는 어딨어?"
"아, 미르틱행 비행정은 3일 후 운행합니다."
미르틱이라... 200레벨 때 특수 지역인데 벌써 거길 갈려고 하다니. 게다가 미르틱은 유저가 먼저 당도하지 않았기에, NPC들이 활발하게 이동하지 않는다.
주변 마물이 잡히는 것에 따라 장비가 좋아지거나 나빠지는 것처럼.
모든 것은 유저의 진행속도에 따라 게임이 달라진다.
"뭐야! 장난해? 당장 배 편 준비해."
"네? 하지만 남는 배가 없..."
"그런 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세상을 구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그런 사소한 문제 따위 신경 써야 되나?"
남자는 마치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총구를 선원에게 가져다 댔다. 선원을 겁을 먹은 듯 덜덜 떨며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잠시 앉아계시면 바로 선장님을 구해보겠습니다."
"10분 준다. 빨리 처리해."
"아, 알겠습니다."
"진작 그렇게 할 것이지. 뭘 봐 NPC들아!"
남자의 호통에 주목됐던 이목은 한순간에 흩어졌다. 저거... 아주 막 나가는구만.
남자는 선원이 준비해 준 의자에 풀석 앉아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뭐 저딴 놈이 다 있어?"
"제가 가서 처리할까요?"
베린과 다윤이 진상에 화가 난 듯 장비를 집어 든 체 자리에 벌떡 일어섰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 반응에 다윤이 답답한 듯 말했다.
"아니, 아무리 유저라고 해도 저런 식으로 하면 안되죠. 가서 한마디 하고..."
"내 말뜻을 이해 못 했네."
"네..?"
"너네는 못 이겨. 저 녀석."
이전에는 그냥 흔한 유저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능력창을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 이름 : 콜트 / LV.147
특성 : 듀얼건 무장 (레전드리****)
직업 : 메카 거너 ( 에픽 )
스텟 : 체력 90, 마력 234, 민첩 80
무기 연마 : 직업 특성상 열리지 않습니다. ]
직업은 별 볼일 없지만 특성 하나는 볼만하다. 무려 레전드리 4성급 특성, 듀얼건 무장. 나도 알고 있는 특성이다.
[ 듀얼건 무장 LV.4 (레전더리****)
- 두 개의 총과 장비를 소환해서 사용합니다.
마력이 높아질수록 화력과 능력치가 매우 극대화 됩니다. ]
전 시즌 랭킹 5위였던 유저의 특성이 저 특성이었으니깐.
마력이 높아질수록 화력이 미친 듯이 증가하는 게 저 특성의 사기점이다. 내 이전 특성이었던 숨겨둔 힘의 몇 단계 높은 상위 호환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게다가 녀석이 끼고 있는 장비. 어디서 구한지 모를 온갖 마력이 깃든 장비로 무장 중이다.
'저 정도면 거의 마법사 장비라고 봐도 되겠는데?'
저런 특성이니깐, 혼자서 여기까지 온 거겠지. 물론 3개월이나 지나서야 도착했지만.
지금도 저렇게 여유롭게 앉아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마법 방어막을 항시 키고 있었다.
항상 기습에 대비하고 있군.
"그럼... 윤 씨도 못 이겨요?"
"난 이기지."
내가 나설 필요도 없이 레빗이 앞발톱 한방만 치면 날려보낼 수 있지만, 딱히 그러진 않았다.
"왜요?"
"그냥. 쓸모가 있을 거 같아서."
"?"
메카 거너에 빠른 속도로 이곳까지 도달해서 오자마자 '미르틱'에 간다라… 저 녀석 그걸 얻으려고 하네.
월드 어드벤처 최강의 히든 직업 중 하나를.
잘만 하면 쓸만하게 이용할 수 있을 거 같다.
"하아... 하아..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10분 동안 온 비행정을 다 돌은 듯, 땀에 흠뻑 젖은 선원이 돌아왔다.
"그래. 어디 비행정으로 가면 되지?"
"그.. 그게 당장은 안되고 한 5시간만 기다리시면 바로..."
"뭐? 5분도 아니고 5시간? 장난하나 이게!"
"죄, 죄송합니다! 최대한 빠르게 준비해서..."
"됐어. 내가 만들어서 타지."
네? 거리며 어벙한 표정을 한 선원을 지나친 뒤, 한 비행정의 줄을 무시한 체 무턱대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배의 입구 앞에 떡하니 선 뒤 외쳤다.
"자! 이 배는 미르틱으로 간다! 탈 놈들을 타고, 안 탈 놈들은 전부 꺼지도록."
"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용사님!"
"저희는 빨리 목적지에 가야... 으악!"
갑작스러운 남자의 선언에 사람들이 항의하자, 남자는 사람들 중 하나의 멱살을 잡아 그대로 집어 던졌다.
"쿨럭!"
"자, 반론은 받지 않는다! 탈 놈들은 타고, 아니면 꺼져라. 더 이상 나를 귀찮게 군다면 무력을 사용해 주겠다!"
...이미 무력을 사용하고 있지 않나?
기왕이면 눈감아 주고 싶은데 하필 우리가 탈려던 배다. 나는 별수 없이 내 옆에 있던 둘에게 말하며 일어났다.
"일단 너희는 여기 있고 내가 가서... 응? 베린은 어디 갔어?"
"그.... 돈 좀 가지러 간다고 하던데요?"
"엥?"
설마?
"넌 좀 돈이 많아 보이네?"
"?!"
어느샌가 남자의 뒤에 나타난 베린이 남자의 등에 손을 가져다 댔다. 짤그랑 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베린이 신난 듯 돈 주머니를 손가락으로 빙빙 돌렸다.
"오? 너 돈이 제법 많구나? 200만 원이나 들어왔- 우왁!"
"뭐야? 이 애새끼가 어디서 내 돈을!"
"흥! 남의 배를 멋대로 바꾸려 해놓고는!"
도둑들의 싸움인가?
팝콘이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거 같지만 없는 게 참 아쉬웠다.
쾅-! 쾅-!
남자는 두 자루의 총을 꺼내 베린에게 마구잡이로 쏘기 시작했다. 역시 레전드리 4성급 특성.
무슨 총을 쏘는데 대포 소리가 날 정도의 화력이 나가고 있었다. 심지어 연발에다가 마력탄을 쏘기 때문에 장전도 필요 없다.
엘린시아내에서 만든 마력 총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성능이다. 저 남자의 총이 바주카포라면 엘린시아의 총은 어린이 장난감에 불과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엘린시아는 어떻게 그곳을 지키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신이 없었다면 진작에 멸망했을지도...
갑작스러운 싸움에 사람들은 긴급히 대피했고, 그 장소에는 몇 명 외에 전부 썰물 빠지듯 사라졌다. 한방만 맞아도 바로 쓰러질 상황이지만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쥐새끼처럼 빨라가지고!"
"내가 좀 빠르지!"
촤자자작-!
그림자와 투명화를 번갈아 가며 빠른 속도로 단검을 내질렀다. 한 번의 공격에 수십 갈래의 단검이 튀어나와 남자를 밴다.
쉐도우의 특수 능력에 어둠 속성이 추가된 능력이다.
수십갈래의 단검이 일제히 남자를 베었지만 마법 방어막에 의해 전부 막히고 있었다.
"칫. 저런 사기 템이 다 있냐?"
"실력이라는 거다 꼬맹아!"
"헹! 그럼 나도 사기 템 쓴다!"
베린의 목에 걸려있던 제라드의 목걸이가 반짝이기 시작한다.
즈즈즈…
베린의 움직임이 비정상적으로 빨라진다. 나 또한 시각 강화를 사용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속도.
"크윽!"
촤자자자자작!!
수백 갈래의 단검이 온몸을 갈라내듯이 베어내자, 마법 방어막이 한계를 다하며 와장창 깨졌다.
"방어막이..?"
"드디어 깨졌구나! 간다!"
"고작 여기서 이런 걸 쓰다니..."
왼손에 있던 총이 철거덕 거리며 자주포처럼 변한다. 마치 공상설정의 게임속의 에너지 자주포를 연상케 하는 모습.
자주포의 안쪽 푸른빛의 에너지가 모여든다. 머리속에는 과거의 랭커가 사용했던 모습이 오버랩됐다.
죽는다. 쏘면 무조건 베린은 죽을 것이다.
"야! 피해!"
"어...?"
"이미 늦었다."
즈우우웅-
콰가가가가가 강-!!!
응축된 에너지가 일제히 베린을 향해 발사되더니 그대로 주변의 모든 것들을 쓸어버렸다. 휩쓸고 간 자리에는 먼지 구름만이 가득했다.
이래서 3성급 이상 특성들하고 함부로 싸우면 안 되는 이유다. 특성 하나만으로 웬만한 직업이나 특성은 그냥 씹어먹을 수 있기 때문에.
"콜록콜록! 설마 죽은 건 아니겠죠?"
"그림자로 살았길 바라야지."
물론 저 에너지포 가 그림자도 쓸어버리긴 하지만. 에너지 포로 인해 생긴 연기로 주위가 잘 안 보였다. 이윽고 연기가 걷히더니, 덜덜 떨고 있는 베린 앞으로 작은 몸체가 서있었다.
".... 명상 중인데 누가 깨우나 했더니만."
"여긴 꼬맹이들 천지야? 어이 NPC 꺼져라. 너 따위한테는 볼일 없..."
"말끝마다 NPC~ NPC. 아주 시끄러워죽겠네."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깐!"
남자는 충전 중인 왼손 대신 오른손의 총을 이랑에게 겨눠 발사했다.
탁.
이랑은 손가락으로 총알을 잡았다. 강화된 마력탄이라기에는 너무 허무하게 잡힌 탄알. 그대로 주먹을 쥐자 빠드득- 소리와 함께 마력 가루가 흩어졌다.
"어?"
"고작 이런 걸 가지고 난동 부렸냐. 꼬맹아."
쿠구구구구-!!
이랑의 주위로 거대한 기가 폭발하자 섬 전체를 짓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