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100화 새어나온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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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그냥 방 정도의 크기지만.”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하늘과 저 너머의 산이 보이지만 여러 스킬과 특이점을 가진 나는 알 수 있었다.
저건 그냥 눈속임이라고.
지금 이곳은 20평도 채 되지 않는 땅일 것이다.
“특이점은…”
“그런 건 없어.”
이랑은 찻잔을 내려놨다.
“내가 받은 건 요 조그마한 공간이 전부야. 특이점이니 초월자니… 그런건 받지 않았어. 게다가 이곳에 들어오려면 아까 본 것처럼 창조석이 있어야 하고.”
“창조석… 그게 뭔데?”
“창조 세계의 문을 여는 열쇠.”
...뭔가 점점 심오해지긴 하네.
머리가 아파져 온다.
“함부로 창조세계를 열 수 없어. 뭐, 초월자가 되면 열었다 닫았다를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다던데... 나는 그런 힘이 없어서.”
“흠… 이곳이 있으면 좋은 게 뭔데?”
“글쎄. 우선 이렇게 방을 꾸밀 수 있다는 것과… 뭐 좀 강해진다는 것?”
이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일어나자 탁자와 의자 그리고 각종 다과가 모두 사라졌다.
“나도 완벽히 아는 건 아니야. 나도 헷갈린다구… 이 지식도 그 녀석이 몇 년 동안 알려준 거라-”
“그 녀석?”
“...몰라도 돼.”
이랑은 알듯 말듯 한 표정으로 손을 휙휙저었다.
뭔데 그래.
“뭔데 그래.”
“별거 없어. 그냥 나 도와주던 녀석인데… 짜증 났지. 하는 짓도 비슷해가지고.”
흐음… 뭔가 있는 거 같긴 한데… 뭔지 모르겠네.
나중에 특이점을 써서라도 과거를 한번 봐야겠다.
쩌적-!
공간이 무너지고 다시 환각 속으로 돌아간다. 한 줌의 재가된 거인들의 시체가 산적히 널려있다.
“오래는 못 열어서.”
그렇게 말하는 이랑의 손에 들린 보석은 전보다 훨씬 흐려져 있었다.
“그래서 게임에서 뭔 일이 있던 건데. 가장 중요한 걸 안 말했잖아.”
“진짜로 별거 없어. 너처럼 유저로 행동했고 게임의 클리어를 위해 계속해나갔지.”
이랑은 짧게나마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문명수준이 낮은 종족을 서서히 키워나가 전쟁을 벌이는, 그렇게 해서 단 하나의 최고의 종족만을 남기는 게임.
이랑은 ‘그녀석’ 이라는 사람과 공동 우승을 했고 보상으로 창조세계를 받았다고…
“안 알려줄거야?”
“응. 이건 너라도 안돼.”
“흐음…”
이랑은 왼손을 허공에 뻗어 분홍빛의 꽃잎이 휘날리는 막대기를 소환했다.
이전에 소환했던 것과는 다른 이질적인 힘이 느껴졌다.
“그게 창조세계 능력?”
“아직 미약한 수준이야. 그냥 이펙트 정도의 느낌이지. 실제 능력은 거의 없어.”
그렇게 말한 이랑은 막대를 들고 거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내질렀다.
화륵!
“...!”
“...!”
회전하듯 쏟아지는 거대한 분홍빛의 불이 그들을 뒤덮는다. 불은 거인을 뒤덮고 그들이 서있던 드높은 복도를 태웠다.
그리고 나는 느꼈다.
아주 미세하지만 느껴진다.
미르틱이나 무명 같은 특수한 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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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아니. 너희는 인간이 아니군.”
우리는 거대한 불의 거인 앞에 서있었다. 다른 거인보다 2배는 더 큰 크기. 아무리 고개를 올려봐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빌딩 앞에 서있는 거 같네.’
저 멀리 보이는 붉은 안광은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압박했다.
“마수.”
“그들은 위대한 로카팔라의 하수인인가?”
“로카팔라?”
이랑은 거인의 말에 고개를 까딱거리며 의문을 가졌다.
로카팔라(Lokapala)
이계의 신이라고 불리는 8명의 신들이다.
설정상 인도의 신화에서 따온 신들. 원작 후반부에 직접 현신해서 주인공과 대적한다.
물론 그들 중에 내분이 일어나 이리저리 개판이 나지만 뭐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되고…
“그렇다! 아그니의 하수인이여.”
“...역시.”
“??”
우리를 하수인으로 오해하고 있는 상황. 그렇다면 최대한 이용해 먹어야지.
나는 멍청하게 서있는 이랑의 어깨를 잡고 눈 신호를 보냈다.
“내 옆에 있는 이자는 너와 같은 아그니의 하수인이시다.”
그렇게 말하자 이랑이 기다렸다는 듯이 불을 내뿜었다.
역시 이랑.
거인은 이랑의 불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아그니님의 하수인… 그런데 너는 어느분의 하수인이냐.”
“나는!”
뭐하지.
로카팔라의 하수인이란 그들에게 직접 계약 받은 자들을 의미한다.
위대한 8명의 주신에게 인정을 받았기에 당연히 매우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속성을 대충 속이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지만 그만한 효율을 내야 한다.
저 깐깐한 SS급 마수는 단순한 능력 정도로 속아넘어가지 않을 테니깐.
뭔가 방법이…
아!
나는 여태껏 아껴둔 스킬을 사용했다.
파아아앗!
“...그 빛은…?!”
화려하게 빛나는 갑주.
다른 속성은 내 등급이 낮기에 효율이 떨어진다. 하지만 이 신성갑주 하나 만큼은 S가 몇 개가 있어도 모자랄 정도의 수준을 낼 수 있다.
그리고 이 빛을 보고 떠올릴만한 신은 하나뿐이지.
“수르야님의 하수인이라… 그분은 하수인을 잘 만들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만큼 내가 중요하시다는 거지.”
“...그런가.”
이 정도면 대충 속여 넘긴 것 같다.
“위대한 로카팔라의 하수인들이여. 무슨 일로 이곳에 찾아온 건가.”
“거래를 하러 왔다.”
“거래?”
거인은 몸을 숙여 우리와 눈을 마주했다.
역시 SS급 마수답게 위압감이 제법 느껴졌다.
“한 달 전 수르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계의 끝은 다가오고, 모든 생물들은 존재 이유를 잃고 사라질 것이니, 그것은 곧 새로운 시작이 될 것입니다.]
“...그 말은?”
“개변(改變)이다.”
나는 거인을 올려다봤다. 목이 아팠지만 지금은 최대한 뻔뻔하게 나서야만 했다.
“세계는 곧 다시 시작될 것이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사라질 것이고 다시 생겨날 것이다.”
“......”
“그리고 그것은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니겠지.”
나의 말에 거인은 침묵했다.
세계의 종말.
그것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저 말 역시 수르야가 주인공에게 직접 내뱉었던 말이고.
물론 주인공에 의해 막혀 실현되지 않았지만.
“나에게 제한한 거래라는 것은… ‘최후의 사도’를 의미하는 거겠지.”
“그렇다.”
‘잘들 노네.’
그렇게 생각한 이랑은 피식 웃으며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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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악-!
“후우…”
다윤은 게이트 바깥으로 나오는 마수들을 베었다.
SS급에 준하는 게이트라지만 그곳의 모든 마수가 그 정도 수준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도 먹이사슬은 있기에 아주 작고 약한 마수도 분명히 존재한다.
문제는 그들 역시 A급 이상의 능력을 가진 것.
한참을 베어내던 다윤은 몰려오는 수많은 마수를 보고 뒷걸음질 쳐 거리를 벌렸다.
“현신(現身).”
쿠웅-
다윤이 든 블랙드래곤의 검이 거대한 기력을 발휘한다. 이윽고 다윤의 주위로 검은 안개가 몰아쳤다. 안개는 곧 커다란 검은 용으로 바뀌었다.
검의 특수능력 중 하나인 마수의 힘을 불러오는 것이다.
“...!”
“...!”
콰아아아아-!
안개 형태의 용은 브레스를 쏟아냈다. 수없이 밀려나오던 마수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타닥… 타닥…
타들어가는 바닥. 다윤은 남은 마수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용을 해제시켰다.
“우으… 마력이 바닥이야…”
무려 SS등급의 블랙드래곤의 힘을 불러낼 수 있는 검이지만, 웬만한 헌터는 이것의 사용을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다루기 위해서는 꽤나 높은 수치의 마력이 필요하고, 방금처럼 ‘현신’ 시키는 건 어지간한 S급 헌터도 10초도 채 소환하지 못할 정도로 까다롭다.
다윤은 A급이지만 김윤이 건네준 마력 회복장비를 둘둘 둘렀기에 조금이나마 사용이 가능했다.
“다 끝났어?”
“응.”
뒤편에 숨어있던 베린이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는 같이 싸울 예정이었지만 지금의 베린으로서는 나오는 마수들이 너무 강했다.
“이따 윤씨 오면 다 말해줘야지~”
“...하지마.”
“그러면 도망가지 말지 그랬어.”
“.......”
베린역시 초반에 몇 마리 잡아내며 나름 잘 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마수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을 보고 뒤쪽으로 도망쳐버렸다.
“...미안.”
“됐어. 내가 다 잡았으니깐.”
“......”
“왜 그래. 장난인데.”
다윤은 침울해진 베린에게 다가갔다. 그런 베린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아, 아냐. 별일. 그냥…”
“그냥?”
“......”
왠지, 왠지 이대로 가면 나를 버릴까 봐.
환각 속 나처럼 돼버릴까 봐.
환각을 이겨냈지만 어째서인지 베린은 과거의 거짓된 감정을 떨쳐내지 못했다.
아니, 떨쳐냈다.
다만 그와 비슷한 일이 생길수록 가라앉은 감정들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베린 역시 다윤 못지않게 환각 속에서 시간을 보냈기에.
“흐음… 환각 때문에 그러지?”
“...어.”
“나도 이해해. 나 역시 환각 속에서 9년을 보냈거든.”
다윤은 그랬다.
과거의 감정이, 기억이 계속해서 살아난다. 하지만 다윤은 그것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도 나니깐.”
“......”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나는 그렇게 환각이 싫지않았어. 물론 그렇게 좋게 만들어놨으니 당연히 싫어하지 않겠다만, 그래도 이 감정은 내가 언젠가는 얻을 감정이었거든.”
환각은 자신을 투영해서 만들어낸다.
그것이 아무리 거짓된 것이라도 그곳에서 얻은 감정은 모두 자신이 미래에 한번 쯤은 겪을 감정이었다.
“난…”
“난?”
“난… 달라. 난 너희들과 다르다고. 나는 아니야. 너희들처럼 강하지도 않고! 너희들처럼 잘나가지도 않아!”
한번 쏟아낸 감정은 폭주하듯 터져나간다. 그렇게 토해낸다.
그것을 다윤은 묵묵히 들어주었다. 베린은 계속해서 토해냈다. 그것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하지만 끝이 났다.
“다했어?”
“하아… 하아… 넌 다르-”
“나도 그랬어.”
다윤의 진지한 눈빛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베린이 다윤을 바라봤다.
“어…?”
“나도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당했어. 길드에게 버려졌고, 사람들은 나를 손가락질했지.”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된걸까.
내가 무슨 잘못을 한걸까.
왜 나만…
과거 다윤에게도 있었던 일.
그 여파는 환각이 아닌 현실에. 아직까지도 남아있었다.
“난 네가 무슨 일 있었는지 몰라. 그리고 너도 내가 무슨 일 있었는지 모르겠지.”
“...응.”
“그만 울고.”
다윤은 손수건을 꺼내 베린에게 건네주었다.
“과거에 안 좋은 일이 있었던 어쨌든 난 지금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지금…”
“그리고 지금은 윤 씨가 있으니깐.”
다윤은 미소 지었다.
“윤 씨가 있으니 난 괜찮아. 과거에 일이 있었더라도. 좋은 기억으로 덮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해. 아니, 확신해.”
그녀는 새어나온 감정을 조심스레 들어 소중히 간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