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108화 나아간다
-
“ 아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그럼 어떻게 하는데?!”
“좀 더 사물을 보지 말고 본질을 생각해 봐. 그거 볼 때까지 다음 수련은 없어.”
“......”
베린은 몇 주째 생고생을 하고 있다.
이게 다 한 달 전에 만난 이상한 헌터 때문이다.
한 달 전. 베린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누군가를 만났다.
자신을 S급 암살자 헌터라 소개한 여자. 나이는 대충 자신과 비슷해 보였다.
“강해지고 싶니?”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묘한 끌림이 있었다.
왠지 저 사람을 따라가면 강해질 거라고, 뭔가 극적인 변화가 생길 거라고.
그렇게 믿고 따라가 수련을 받았다.
그게 고생의 시작이었다.
몸보다 100배는 큰 물건을 100개 옮긴다든지,
단검 찌르기 동작을 만 번 반복한다든지,
그것도 모자라 C급 마수를 1000마리를 동시에 상대한다든지.
초인인 헌터 능력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난이도였다.
“죽겠어…”
“이 정도는 해야지.”
“으으…”
더 화가 나는 건 자꾸 한 번씩 신경을 돋우는 말을 한다는 것이다.
“아 그걸 그렇게 하네.”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
“이건 좀…”
화가 난다.
가끔씩 때려치울까도 생각해 봤지만 여기서 때려치운다면 그건 자존심이 용납을 못할 거 같다.
‘그래도 뭔가 있긴 한거 같으니깐…’
단순한 헌터는 절대 아닐 것이다.
뭔가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2주가 지났다. 그녀는 만족한 듯 웃으며 두 개의 음료를 내밀었다.
“자! 두개의 차이점을 알아내면 ‘진짜’ 수련을 시작할게.”
“...뭔 차이점.”
“딱 보면 보이지 않니? 나의 힘까지 나눠 줬는데 말이야.”
“......”
베린은 두 개의 음료를 뚫어져라 보았다.
똑같네.
“똑같은데.”
“그럼 뭐… 알아차릴 때까지 하는 거지.”
“......”
그렇게 3주가 더 지났다. 별 난리난리를 쳐도 둘은 똑같았다.
만져도 보고 마셔도 보고 흔들어도 봤지만 다른 건 없었다.
“아무래도 간절함이 없는 거 같네.”
“아, 아냐! 내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
“그래? 그러면 왜 아직까지 보질 못하는데?”
“그건…”
“그럼 포기할래?”
“......”
포기.
그 말에 베린은 시선을 돌려 눈앞의 여자를 바라봤다.
“포기할 거면 이대로 돌아가도 돼.”
“...아냐. 포기 안 해.”
“어째서?”
신은 물었다.
어째서 포기를 안 하는가.
차원 너머의 것을 보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애초에 신이었던 레빗, 특이점과 외부의 힘을 빌려온 김윤 역시, 그것을 보는 데에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베린은 그런 조건도 없다.
능력도 약할뿐더러 있는 거라곤 아직 능력 발휘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성흔이 전부.
앞으로 몇 달. 아니, 몇 년을 더 보내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포기를 안 할까.
“포기할 거면 시작도 안 했어. 이것도 못하면 그 녀석을 따라 갈 수도 없으니까.”
“......”
“반드시 녀석과 나란히 설 정도로 강해 질거야. ”
그렇게 말한 베린은 다시 시선을 돌려 두 개의 음료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그런 베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포기 안 해요. 신 이란게 대단한 것도 알고, 그 자리를 차지할 존재들이 많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포기할 거면 시작도 하지 않았어요.
─반드시 해낼 거예요. 제 능력이 부족하다면 10000년을 더 수련하고, 제 존재가 문제라면 다시 태어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해낼 겁니다.
“...너 닮았구나.”
“? 뭘─”
베린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 때문에.
자신과 비슷한 키의 여자는 어느새 장신이 되었고, 노란색의 단발머리는 백금발의 장발로 변모했다.
무엇보다도 이전과 다른 거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샛노란 강물이 흐르는 땅에 서있었다.
땅은 은은한 분홍빛을 내는 색유리로 저 하늘의 달에 비춰 아름다운 색감을 자아냈다.
“내 소개를 다시 할게.”
신은 자신의 과거를 내려다봤다.
“나는 위대한 로카팔라의 8개의 별 중 하나이자, 달의 신이기도 한 소마야.”
“어, 어어어어어어??”
“나의 존재를 일부 떼어내 너의 격을 잠시 올려뒀어. 하지만 머지않아 그 격은 다시 돌아가겠지.”
“뭐, 뭐?”
“자, 나의 ‘진짜’ 수련을 받을 준비는 되었니?”
소마는 아름다운 얼굴로 싱긋 웃었다.
-
“보여! 보인다고!”
“그래? 하긴 이 정도로 먹었는데 안 보이면 그게 이상하지.”
“우욱…”
3년째.
간신히 ‘다르게’ 보는 방법을 터득했다.
언뜻 보면 빠르게, 혹은 느리게 보일 정도의 시간이지만 그 방법은 매우 무식했다.
“배 터지겠어…”
“나의 음료는 먹어도 위장으로 흘러들어가지 않아. 배가 터질 일은 없어.”
“...말이 그렇단… 거지.”
소마의 일부분이자 성흔인 음료를 미친 듯이 마시는 것.
문제는 워낙 극히 일부분이라 별로 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한방에 주지…”
“한방에 주면 네가 한방에 골로갈걸?”
게임처럼… 아니 게임은 맞지만 아무튼 게임처럼 ‘소마의 음료’라는 것을 마시면 곧바로 능력을 얻으면 좋겠다만,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존재했다.
다만 그런 걸 마실 경우 인간의 영혼이 소마의 영혼의 일부를 감당하지 못해 터져나간다.
로카팔라의 격에 비해 인간인 베린의 격은 너무나도 낮기 때문이다.
결국 베린이 물처럼 마신 음료는 그 일부를 희석하고 또 희석해서 만든 액체에 가까웠다.
사실상 강물에 그 음료를 한 방울 떨어뜨린 정도라고 보면된다.
“후우… 이제 끝난 거야?”
“아니? 이제 시작인데.”
“에?”
본인이 생각해도 바보 같은 소리를 낸 베린을 뒤로하고 소마는 허공에서 뭔가를 뒤적뒤적 꺼냈다.
베린은 그것을 받았다. 적당한 크기의 단검.
손잡이에는 자주색의 유리 같은 보석이 박혀 있었고, 은은한 검신이 자신의 얼굴을 비추었다.
“수련은 간단해. 나의 본신에 단 한차례라도 공격을 성공시키면 돼. 본신에 대해서 설명해 줄까?”
“이미 100번은 더 들었어.”
“좋아! 그전에.”
순식간에 소마의 뒤를 공격하려던 베린은 소마의 손가락이 살짝 움직이자 그대로 유리바닥에 처박혔다.
“끄악!”
“말은 다 듣고 해야지.”
소마는 쪼그려 앉아 베린을 내려다봤다.
“한번 질 때마다 스승님이라고 부르기. 존댓말도 포함해서.”
“...싫은데…”
“싫으면 이기든가? 아니면 포기할래?”
“으으…”
“그럼 시작?”
“각오해!”
-
그렇게 대련은 계속 이어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지 모르겠다. 기절하고 깨어나다를 반복하다 보니 시간 감각도 이상해졌다.
적어도 6년은 더 있던 거 같은데…
“스승님.”
“응?”
“제가 얼마나 있었죠?”
처음에는 어색해 죽는 줄 알았는데 하도 부르다 보니 익숙해졌다.
여전히 존댓말은 어색하지만.
“흠…”
유리 의자에 걸터앉아 자주색의 음료를 음미하던 소마는 웃으며 말했다.
“65년… 아니 75년인가?”
“......실제로 그렇게 지난 건 아니죠?”
“당연하지. 아직 60일밖에 안지났어.”
지난 6년 동안 싸우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스승의 얘기도 제법 들었고 능력의 기원, 이곳의 정체, 외부 생물들…
뭐, 안 들어본 얘기가 없는 거 같다.
“스승님도 저처럼 이렇게 수련했다고 했죠.”
“응. 나는 단위가 만 단위 였지만.”
“......”
“오래전 일이지. 과거 평범한 음료였던 내가 이렇게까지 올라갈 줄은… 아마 그 누구도 상상 못했을 거야.”
“...왜 신이 된 거예요?”
“인정받고 싶었거든.”
“인정… 이요?”
인정.
평범한 액체에서 벗어나 자아를 가지게 되면서 소마는 조금씩 자신의 존재를 높였다.
그것은 피조물을 넘어 차원에 근접하고, 차원을 넘어 신에 서서히 가까워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뭘요?”
“나보다 잘난 놈들이 많다는 거.”
차원을 넘을 당시 그 누구보다 자존감에 차있었다. 하지만 알게 되었다.
우주에는 신에 근접한 생물들이 어마어마하게 많다고.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어. 나는 그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노력했지.”
“그게 로카팔라?”
“응.”
끝없는 노력과 주위의 자그마한 도움으로 인해 소마는 로카팔라의 별자리 중 하나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거기까지 도달하기에 억 겹의 시간이 요구됐지만.
그녀는 결국 인정받았다.
“너는 할 수 있을까?”
“...당연하죠.”
“좋아. 들어와.”
두 개의 동일한 힘이 맞붙었다.
베린이 그곳을 빠져나오게 된 시점은 20년이 더 흐른 뒤였다.
-
쿠궁-!
아그니의 침략 이후, 지구의 마수를 정리하던 베린과 차원 너머의 소마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붉게 물든 하늘.
아니, 저건 단순한 하늘이 아니다. 집어삼킬듯이 다가오는 거대한 무언가.
“운석?!”
[미친! 아그니님이 제정신이 아니야!]
차원 너머의 소마는 발광(發狂) 했다.
단순한 침략이 아닌 운석을 떨두다니. 제정신인가?
심지어 그냥 운석도 아닌 본신의 능력이 꽤나 들어간 운석이다. 저것이 지상과 닿는다면 그대로 지구가 쪼개지리라.
“어떡하죠?”
[기, 기다려봐! 우선 너라도 신계로…]
“...포기하지 말라면서요.”
[어?]
베린을 단검을 쥐어들고 하늘을 빤히 바라보았다. 소마는 갑작스러운 베린의 행동에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저, 저건 막을 수 없어!]
“그럼 그대로 포기하게요?”
[...전략적 후퇴일 뿐이야. 개죽음 당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야!]
“그럼 저한테 왜 이런 걸 가르치셨어요. 이렇게 허무하게 포기시킬 거면.”
─단순히 별자리를 차지했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뇨. 이럴 거면 왜 저를 도와주셨어요.
“전 포기 안해요. 이곳을 지켜내고 녀석에게 인정을 받을 겁니다.”
─포기 안 할 겁니다. 성운에 제 거처를 남기고 저의 위치를 똑똑히 각인시킬 거예요.
[.......]
싫다.
죽음이 뻔히 보히는데도 포기시킬 수 없다.
과거의 자신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서.
도저히 그 믿음을 배신할 수가 없어서.
[...진짜 짜증나...]
소마는 지구에 현신했다.
백금발의 머리카락이 베린의 앞에서 찰랑거렸고, 그녀의 주위로 나풀거리는 백색의 천이 맴돌았다.
“...스승님?”
“가자 멍청아.”
죽음이 코앞에 있다.
그럼에도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