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118화 차원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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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인간들의 도시구나.”
하페루아는 뿔과 날개를 숨긴 체 도시를 돌아다녔다.
이미 수백 년을 수련한 악마와 비슷한 강함을 가지고 있던 그녀에게 정체를 숨기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흐음…”
타박.
“흐음…”
타박.
하하 호호 웃는 어린 인간들.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들.
편지지를 잔뜩 든 가방을 메고 뛰어가는 배달부.
지팡이를 쥐어든 체 연구실로 뛰어가는 학자까지.
“평화롭네.”
평화로웠다.
전쟁 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물론 서로의 모든 걸 걸고 싸우는 전쟁은 아니었다. 이 행성에는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종족도 존재하니깐.
영물, 신이라 불리는 존재들.
중립을 자처하는 그들이 있었기에 힘의 균형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긴장감은 있을 줄 알았는데.”
항상 전투 훈련을 하며 긴장감에 서려있는 악마와 달리 이곳은 긴장감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페루아는 검에 잠시 손을 대려다 이내 손을 거두었다.
‘어차피 용사만 죽이러 온 거니깐.’
괜히 자신 때문에 전쟁의 불씨를 더욱 타오르게 만들 생각은 없다.
무고한 생명의 죽음은 더 큰 화마(火魔)를 불러오니깐.
‘도시내에서 죽이는건 안되겠어.’
용사들이 한둘도 아니고 그중에 강한 용사도 몇몇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전투가 길어진다면 암살이 아닌 침략이 될테니.
그건 하페루아가 원치 않는 일이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발걸음을 돌려 던전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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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잭슨! 물건을 다 챙긴 건가?”
“그래. 이제 빠져나가자고!”
쿠궁!
모험가 무리는 무너지는 동굴을 뒤로하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들이 뒤를 돌아봤을 때는 언제 동굴이 있었는지 모를정도로 입구가 빼곡히 막혀있었다.
동굴을 막는 이유는 이미 한번 들어간 던전을 다른 모험가가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역시 용사 출신이라 그런가 던전 생활이 수월 한가 보네.”
대검을 등에 찬 남자가 순백의 검을 닦는 남자를 보고 말했다.
남자는 그를 보지도 않은 체 답했다.
“아직 은퇴 안 했다.”
“풋, 그 몸으로?”
“야, 이 정도면 아직 거뜬해. 중급 악마는 한 손으로 잡는다고.”
“네네~”
“빨리 가죠.”
“맞아요. 저 쉬고 싶어요.”
그 뒤에는 활과 지팡이를 든 여자가 각각 서있었다. 이들은 모험가다.
모험가.
행성 곳곳에 숨겨진 던전의 보물과 유산을 찾아내는 무리들. 악을 물리치고 모험을 떠난다는 모습에 낭만스럽게 느껴지겠다만 실상 그냥 도굴꾼들이었다.
그리고 그 도굴꾼들이 터는 곳의 대부분은 오래 산 영물들의 것이다.
영물들이 수련을 떠나 이미 잊어버린 곳.
그외에도 괴수나 악마의 던전도 있었지만 흔한 용사 출신의 무리로서는 감히 넘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이거 팔면 얼마나 나오려나.”
용사 출신의 남자는 새햐얀 천을 꺼내들었다.
천의 중앙에는 분홍색의 여우 문양이 새겨져있었다.
“딱 봐도 주술이 걸린 천인데. 야, 마법사인 네가 보기엔 어때?”
“흠…”
마법사는 천을 받아 요리조리 지팡이를 꺼내들며 살펴봤다.
“오! 꽤 비싸 보여요! 딱 봐도 몇백 년을 산 영물의 주술에다가… 상태도 괜찮고, 한 100골드쯤 하지 않을까요?”
“100골드?!”
100골드면 도시에서 1년은 놀고먹어도 남아나는 돈 아닌가.
안 그래도 용사 지원금도 제대로 안 나오는 판국에 이게 웬 떡인가.
“크크… 역시 용사일을 때려치길 잘했어. 가자! 오늘은 회식이다!”
“와아!”
“가자~ 비싼 거 먹어도 되죠?”
“그럼! 아무거나 시─”
타악.
신나게 도시로 돌아가려던 용사 무리의 발걸음이 멈췄다.
눈앞에 나타난 순백의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 때문에.
“뭐야 꼬맹이?”
“...길을 잃었니 꼬마야?”
“근데 얘 특이하게 생겼지 않아? 꼭 영물 혼혈…”
“영물?”
“설마…”
여우 영물은 자신을 바라보는 모험가 무리를 바라본다. 그 시선은 그들의 얼굴을 한번 훑다, 남자의 손에 들린 천으로 향한다.
“내놔.”
“......뭐?”
남자는 천과 눈앞의 여우를 휙휙 번갈아봤다.
역시 이곳의 주인이었던 건가.
‘...영물이 얼마나 강할진 모르지만 딱 봐도 성체는 아니야.’
보통 영물은 나이를 먹으면 웬만해서는 항상 성인의 모습을 유지한다.
그렇단 소리는 저 영물은 적어도 100살은 넘기지 않았다는 얘기.
어느 정도 승산이 있다.
‘어린 영물도 꽤나 돈이 되니깐… 흐흐… 복터졌구만.’
아까 마법사의 말에 따르면 이 천이 꽤나 오래산 영물 만든것 이라고 듣긴했으나, 그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졌다.
그 자식이겠거니 하는 생각.
남자는 모험가 무리에게 신호를 보냈다.
셋을 세면 동시에 공격하라고.
하나…
“내놓으면 살려줄게. 어차피 쓰지 않는 동굴이었고...”
둘…
“근데 안 내놓으면.”
셋!
털썩.
“...어, 어?”
어느새 그들 모두기 땅을 기고 있었다. 여우는 허리를 숙여 천을 집어들었다.
“꼭 말로 하면 못 알아들어요. 그래도 허리만 살짝 충격 줬으니 몇 달 재활하면 나을 거야.”
“자, 잠깐!”
“도시로는 기어서 가든가 알아서 하고. 착하게 살아.”
쯧.
그렇게 혀를 찬 여우는 무너진 동굴을 잠시 바라보다 그대로 자리를 떴다.
푸확!
“...?”
멀리서 들리는 살육의 소리. 여우의 왼쪽 눈에 분홍의 빛이 발한다.
아까 쓰러트린 도굴꾼들을 죽이는 누군가. 자세히 보니 붉은 뿔과 보랏빛의 날개가 보인다.
‘...악마?’
여우는 잠시 그 장면을 돌아보다 관심 없는 듯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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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억!”
“살려…”
“제발─”
투둑.
“흐음… 이 정도면 됐겠지?”
하페루아는 35번째 용사의 목을 베었다.
용사는 강하며 그 하나하나가 수천의 병사와 맞먹을 정도라고 들었는데…
차라리 수천의 병사가 더 까다로울 거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용사들의 수준은 형편없었다.
물론 그들 각각의 수준은 격차가 심하게 날정도로 달랐으나, 하페루아에 비하면 턱없이 약했다.
‘그 여우는 뭐였지?’
한 5번째쯤.
용사를 죽이러 갈때 나보다 먼저 온 여우를 발견했다.
원래는 그냥 무시하고 용사만 죽인 뒤 떠나려고 했는데...
“...역시 세상엔 강한 생물이 많아.”
영물이니 신이니 그런 것을 제대로 본적이 없었기에 그들의 강함에 대해 알지 못했다.
던전들을 돌아다니면서 마주한 영물들도 그다지 강하지 않았고.
허나 그 여우만큼은 강했다.
아마 싸움을 걸었다면 반드시 졌을 것이다.
“악마! 네가 용사를 죽이고 다닌다는 용사 학살ㅈ─”
댕겅.
이제는 찾아도 안 보여서 살짝 흔적을 남겼더니 좋다고 쫓아온다.
이래도 용사가 한참 남았긴 했지만 이대로 간다면 두 달 안에 전부 정리를...
“공주님.”
“...리비엔? 무슨 일이야.”
붉은색의 망토를 휘감은 악마가 찾아왔다.
전투 선생이자 아빠의 사천왕 중 하나.
“마왕님께서 급히 부르십니다. 가시죠.”
“왜? 용사들 죽여서 그래?”
이게 문제 되는건가? 하페루아는 의문을 가졌다. 그러자 리비엔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잘하셨습니다. 다만…”
“다만?”
“외부의 존재가 나타났습니다.”
리비엔의 표정은 심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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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걸 말이라고!]
마왕은 자신의 왕좌를 쾅 치며 눈앞의 존재를 노려봤다.
알 수 없는 재질의 옷감을 두른 존재는 옅게 웃었다. 언뜻 봐서는 검은 형체가 허공에 떠있는 것 같았다.
[너희가 달라질 건 없어. 그저 세계에 더 나은 기술이 추가되는 것뿐이지. 이곳의 여신에게 허락을 받았어.]
[헛소리 하지말고 꺼─]
[어드벤처 행성의 마왕, 제르노스.]
[...]
[시스템 없이 스스로 ‘초월’한건 인정해 줄 만하다만… 이 이상은 힘들어.]
형체는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란 푸른 머리카락과 청안을 가진 여자.
그녀의 새하얀 장갑에 쥐어진 작은 막대기에는 푸른빛이 맴돌고 있었다.
[이곳을 ‘게임화’시킨다면 행성단위를 넘어서 차원너머로 갈 수 있게 해줄게. 이런 변방 행성에서 평생 살 건 아니지?]
[......]
[이게 마지막 기회야. 나는 착해서 너희들의 세계를 어느정도 유지시켜줄 생각이지만 다른 녀석들은 달라.]
그녀는 새하얀 손을 내밀었다.
[다른 초월자가 오면 이곳을 자기 맘대로 변화시킬 거거든. 막는 건 불가능하지. 이미 너희 행성의 정보는 ‘디드락’에 널리 퍼진지 오래야.]
[그런...]
[선택해.]
마왕은 그녀를 바라봤다.
[강제로 당할 건지, 스스로 정할 건지.]
마왕은 악(惡)보다 더한 악(惡)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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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말이 돼요?”
[...미안하다.]
“게임이라니…”
하페루아는 마왕의 말을 듣고 사실을 믿지 않았다.
우리의 이야기가, 우리의 삶이, 그저 놀이로 치부된다니.
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목적으로 살아간단 말인가.
용사에게 언젠간 토벌당할 부속품으로?
“...인정할 수 없어요. 그 여자는 어딨죠. 지금 우리끼리 싸울 게 아니에요. 행성 전체가 힘을 합쳐야…”
[...]
“...그럴 리가 없겠죠.”
이미 인간과 악마는 적대적. 힘을 합치는 건 불가능하다.
아무리 공통의 적을 두더라도 이미 사이는 극단적으로 치닿은지 오래다.
방금까지도 용사를 수십 베어내지 않았는가.
“그녀가 그렇게 강한가요? 마왕인 아버지와 다른 신들이 이기지 못할 정도로?”
생물이 있는 행성이 이곳만이 아니라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허나 고작 다른 행성의 한명이 이곳의 모두를 압도할 정도라고?
마왕은 자신의 우측에 놓인 대검을 만지작거렸다.
전투에 들어가기전 상대의 강함을 유추하던 그의 습관이었다.
[...강했다. 허나 그것은 단순히 강함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하페루아.]
“그게 무슨 소린가요.”
[그녀는 훨씬 더 고차원에 존재한다.]
마왕, 제르노스는 자신의 기운을 갈무리했다. 강함을 원했고 악마들의 제국을 더욱더 강성하기 위해 수련했던 게 독으로 다가올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일은 벌어졌고 수습을 해야한다.
[더 이상 어드벤처 행성은 ‘하나’의 차원으로 남을 수 없다. 내가 변화했기에 이곳은 차원의 격류에 휘말릴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해를 못 하겠어요.”
[이해가 안돼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훗날 시간의 흐름이 멈춘 이곳을 다시 가동할 수 있을거다.]
“......”
하페루아는 여전히 아버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무려 마왕인 아버지다. 비록 부속품이 되더라도 뭔가 방법이 있겠지.
그렇게 생각했으나, 그녀는 ‘필요 이상의 강함’이라는 이유로 차원 너머로 추방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