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외전] 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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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실패했군.”
모두가 죽어버린 대지.
그 위에 한 남자가 누워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 역시 그를 주시하듯 수많은 별들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천뢰의 주인이 안타까운 결말이라고 합니다.]
[경계의 뒤를 걷는 자가 다시 한번 도전하라고 합니다.]
[르뤼에의 주인이 결말에 만족합니다!]
[얼굴 없는 신이...]
‘거지 같군.’
그렇게 속으로 짓씹으며 하늘을 노려봤다.
수백 년 전, 어느 날 우리의 세상은 지옥의 게임으로 변했다.
수많은 괴물을 상대하며 하늘 위의 ‘성위’라 부르는 것들의 놀잇감이 되었다.
그들은 나를, 아니 우리를 이용하고 즐겼다.
우리가 죽든 말든 치열하게 싸우도록 유도했고. 결국 세상은 멸망했다.
[윤회의 인도자가 자신의 계약자의 행동을 종용합니다.]
[성흔, 환생을 사용하시겠습니까?]
“......”
사실 이 망할 게임을 진행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시도를 했다.
세상을 멸망으로 이끌지 않기 위해.
빙의, 환생, 회귀, 전생, 전승…
최대한 많은 사람을 대리고 최후까지 살아남기도 했고, 저 드높은 하늘의 별을 떨구기도 했다.
하지만 의미 없었다.
[얼굴 없는 신이 이 상황을 묵묵히 바라봅니다.]
애초에 저들은 ‘신’따위가 아니다.
저들 역시 놀잇감에 불과하다. 그것을 깨닫기까지 수백 년이 넘게 걸렸다.
‘저 별들은 그저 체스 말에 불과하다고, 진짜 신은 따로 있다고.’
그렇다면 누굴까.
대체 누가 이 망할 게임을 계속 운영하고 있는 걸까.
아무리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답이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그냥 이대로 죽어버리는 것도.’
어차피 지금 내가 가진 성흔은 회귀가 아닌 환생이다.
한번 계약한 이상 환생을 물릴 수 없지만, 다음 생에 별 볼일 없는 생물로 태어난다면 편안한 안식을 맞이 할 수 있을 거다.
[얼굴 없는 신이 제안합니다.]
“...꺼져라.”
얼굴 없는 신.
몇십 년 전부터 자꾸 나와 계약하려 드는 신.
그의 비정상적인 구애에 한두 번 계약하긴 했으나, 그다지 강한 능력을 가지진 않았다.
오히려 그를 선택한 회차는 불행하기 짝이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계획을 내세우며 일행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거나, 과도한 능력을 부여해서 페널티를 입기도 했다.
남자에게 이 망할 신은 꼴도 보기 싫은 신들중 하나였다.
[얼굴 없는 신이 이번에는 진짜라고 합니다!]
“뭐가 진짜라는 거냐…”
이젠 지쳤다.
10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정신은 마모됐고, 더 이상 나아갈 기력이 남아있지 않다.
진작에 포기해 했어야 했을 것을 여태까지 끌고온것은 내가 얻은 비정상적인 힘이었다.
「▼─ 」
이게 무엇인지 모른다.
허나, 알 수 있었다.
이건 저 하늘의 별들에게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것을.
지금까지 소멸하지 않고 수십, 수백 번을 되돌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이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계가 왔고…
“이제 마지막이다.”
[얼굴 없는 신이 이제는 자격이 된다고 합니다.]
“무슨 자격?
[얼굴 없는 신이 그런건 나와 계약하면 알게된다고 합니다.]
“...허.”
남자는 신의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어차피 마지막이니…
그가 정상적인 상태라면 방금까지 자신을 지켜보던 신들이 사라졌다는 걸 눈치를 챘을 테지만, 그는 그런 걸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계약… 해봐라.”
마지막이니.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계약을 허락했다.
[윤회의 인도자와의 계약을 끊어집니다.]
[얼굴 없는 신과 계약했습니다.]
‘계약을 멋대로 끊어내는 게 가능했던가…?’
불가능 한건 아니지만 그것은 상위급의 성위가 하위급의 성위의 계약자를 강탈하는 방법뿐.
멋대로 계약자를 뺏어내려 드는 것은 성위들간에서도 불법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게다가 윤회의 인도자는 수많은 성위 중,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강력한 신이다.
“......알게 뭐냐.”
남자는 의문을 가졌지만 그 의문을 유지시킬만한 기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어차피 얼굴 없는 신이 가진 권능은 만류귀종이다.
신이 가진 만개의 육체 중, 가장 뛰어난 육체로 태어나는 것.
곧 있으면 나는 새로운 몸으로 환생해 게임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그럴 텐데...
[성흔, 계승을 획득했습니다.]
이건 뭘까.
[초월의 영역에 들어선 것을 환영한다. 이름 없는 구원자여.]
“...!”
띠릭─
「▲차원 」
알 수 없지만 신비한 힘, 특이하지만 익숙한 힘.
그것이 내 몸으로 흘러들어 왔다. 그것은 내 몸을 넘어 그 이상의 것을 뒤바꿨다.
어느새 남자는 과거의 본인이 아니었다.
“...어?”
[왔군.]
낯선 대지.
새하얀 타일로 가득 찬 바닥. 눈앞에 펼쳐진 것은 푸른빛의 화면으로 둘러싸인 유리창이었다.
화면 속에는 그동안의 나와 나의 동료들의 행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는 검은 형체로 둘러싸인 무언가가 보였다.
“...당신이 ‘진짜’ 신이었나.”
[신, 큭...]
큭큭큭.
신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큭큭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광소(狂笑)에 남자는 당황했지만 이내 그의 웃음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끅끄… 역시 재밌어. 초월자가 되어도 아직도 그 사상에서 못 벗어난다니.]
“뭘 말이냐.”
[신은 없다.]
신. 아니, 초월자는 자신의 모습을 가리던 어둠을 걷어냈다.
에메랄드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 마법 세계가 수천 년이 지나 공상과학이 발전한다면 입을 것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내 이름은 로드 에르투스다. 에트루스 행성에서 온 초월자지.]
“에르투스?”
[마법 공학이 발달한 ‘창조세계’지. 앞으로 자주 갈 테니 알아두는 게 좋아.]
로드는 아직도 남자의 말이 웃긴 듯 큭큭 거리며 화면을 이리저리 만졌다.
그런 모습이 불편한 듯 남자는 그를 노려봤다.
“당신이 진짜 신이 아니라면.”
뚜벅.
“누가 이 망할 게임을 시작한 거지?”
남자의 분노가 공간을 메웠다.
눈앞의 로드에게 이 게임은 단순히 유희에 불과했지만, 나에게 있어 이곳은 평생 멸망을 막기 위해 노력한 세계였다.
[흐음… 한 가지 충고해 주지.]
로드는 녹색빛의 기다란 막대기를 꺼내 화면을 눌렀다. 그러자 한 행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의 세계와 비슷한 행성.
그 행성은 계속해서 멸망과 회귀를 반복하다, 결국 누군가에 의해 행성이 박살 나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충격적이었다.
행성이, 그것도 뛰어난 강자들과 별들이 있던 행성이,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조작이나 눈 속임 따위가 아니었다.
그냥 휘두름 한번. 칼도 아닌 무른 막대기를 휘두름으로써 행성이 박살이 난 것이다.
[초월자의 힘은 상상을 초월하지. 허나 자만하지 않는게 좋아. 초월자라고 다 같은 수준은 아니니깐.]
“...”
[이쯤 되면 눈치 챘겠지. 내가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오랫동안 피어 온 과실을 수확하기 위해서다.]
“그 과실이 나인가?”
[그래. 새로운 초월자이자, 우주의 12번째 이레귤러여.]
로드는 씨익 웃었다. 그런 그의 웃음에 나는 불쾌함을 느꼈다.
[너는 대단해. 초월자가 되기까지 긴 시간이 요구되긴 했으나 그 이상의 강함이 확보된 상황이다. 정확히 측정해 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5등위. 아니, 나의 지원을 받는다면 6등위까지 오를지도 모르지.]
“......”
[게다가 이레귤러의 능력이 합쳐진다면 7등위까지 노려볼─]
“왜 하필 나지.”
왜 하필 나일까.
나는 화면 속의 사람처럼 행성을 자를 수도, 게임을 클리어하지도 못했다.
그저 수없이 되돌아가며 이곳을 방황했을 뿐.
[그야… 너의 이름은 없으니깐.]
“...뭐?”
[그거면 충분하다. 특이점을 가진 논 네임(None Name). 완벽한 인재잖아?]
“......”
고작, 고작 이름이 없는 것으로 나를 이지경까지 몰고 간 것인가?
분노가 치밀었다.
허나 눈앞의 로드를 공격할 수 없었다. 그는 본인과 차원이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초월자의 능력을 얻고 특이한 힘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결코 이길 수 없다.
[흠… 논 네임은 뭔가 흔하고. 좀 더 어울리는 이름이… 아!]
로드는 좋은 생각이 돌은 듯 손뼉을 치며 나를 돌아봤다.
[무명(無名).]
“무명…?”
[너의 새로운 이름이지. 어때 마음에 드나?]
에메랄드를 연상케 하는 녹안은 앞으로의 일을 고대하듯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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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은 이름이 없었다.
어째서 이름이 없는지 모른다.
그의 부모님이 이름이 지어주지 않았을 수도 있고, 지어주었으나 원인 모를 이유로 이름이 없어진 걸 수도 있다.
그렇기에 무명은 이름이 없었다. 그는 과거 동료들에게 따로 이름이 불리긴 했으나 이제는 그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
“네이놈! 감히 이계인 따위가 천하제일인을 넘보는 것이냐!”
“자리를 내놓으면 목숨은 살려주마.”
“오만하구나!”
무림의 도복을 입은 남성이 자신의 주먹을 꽉 쥐어들며 무명에게 달려들었다.
그런 남자의 주먹에는 범상치 않은 내공이 느껴졌다.
이전에 뚫고 온 수많은 무림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격.
“...사과는 하지 않겠다.”
혈권무신(血拳武申)
혈조격(血條擊)
콰앙!!
단 한 번의 공방.
그것으로 승패는 가려졌다.
“쿨럭… 네 이놈...”
무명의 혈조격이 그의 주먹을 꿰뚫고 몸의 3할을 날려버렸다.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른 천하제일인 이라면 이정도 상처쯤 내공을 이용해 회복할 수 있었지만, 그걸 가만히 놔둘 무명이 아니었다.
“한탄스럽구나…”
그는 허망하게 눈을 감았다.
[입신의 유월, ‘천하제일인’을 이겼습니다.]
[이제부터 당신은 천하제일인 입니다!]
[해피엔딩 ─ ‘내가 천하제일인 이라고?’ 에 도달했습니다.]
“...”
무림을 기반으로 한 게임, ‘무림! 천하를 정복하다.’
초월자가 된 나는 로드의 말대로 차원에 있는 무수히 많은 게임들을 클리어하고 있다.
창조세계를 열쇠가 되는 ‘창조석’이라는 것을 모으기 위해.
[해당 게임의 관리자가 만족스러운 결말에 감동합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5개군.”
무명은 푸른빛의 돌멩이를 아공간 속에 집어넣었다.
[무림! 천하를 정복하다를 클리어했습니다.]
[%&, 계승에 해당 게임의 능력이 추가됩니다.]
[불러올 수 있는 게임.
1. 잊혀지지 않는 세계.
2. 갓 점프
3. 미트라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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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무림! 천하를 정복하다.]
“...더 모아야겠군.”
나의 행성의 멸망을 막기 위해,
창조세계를 만들어 내 동료들을 되살리기 위해.
그는 다음 게임으로 나아갔다.
[월드 어드벤처에 오신걸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