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 6. 선별 (3)
* * *
어드벤처 행성에는 수많은 정령들이 살아간다.
평범한 숲에 들어서기만 하면 다양한 속성을 지닌 정령들이 외부인을 반겼고,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정령과의 계약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마왕의 습격으로 얘기는 달라졌다.
마기(??)를 흩뿌리는 악마들과 마수로 인해 어둠의 정령을 제외한 정령들이 타락하기 시작했다.
사악한 기운을 버티지 못한 그들은 자연 깊숙한 곳으로 자취를 감췄다.
정령들은 엘린시아와 정령왕이 관리하는 정령 도시로 이주했지만 단 한 종류의 정령들만은 떠나지 않았다.
어둠의 정령.
그들은 마기에 침식되지 않았고 독자적인 속성으로 분류되었기에 떠나지 않았지만.
타락한 정령과 어둠의 정령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이 그들을 공격했고, 그들 역시 머지않아 자취를 감췄다.
“정령이네요?”
채림이 내 옆에 둥둥 떠다니는 팔뚝만 한 크기의 작은 정령을 보고 관심을 가졌다.
푸른색의 기다란 머릿결과 고귀함이 저절로 느껴지는 외형. 주위를 떠도는 물의 기운이 그녀의 위엄을 더욱더 돋보였다.
“보통 정령이면 동물 같은 형태라던데... “
“내 정령은 좀 귀하거든.”
“얼마나요?”
“음… 최상급 정도?”
“진짜요?!”
채림은 놀란 듯 아까 죽인 마수를 밟았다. 신발에 잔뜩 피가 묻은 그녀는 아! 거리더니 그새 마법으로 피를 지워냈다.
“응. 우리 길드는 기본적으로 정령을 하나씩 계약하는데... 너도 조만간 하나 해줄게.”
“오… 그래도 돼요?”
“이번 일 잘하면?”
고개를 끄덕인 채림은 잔뜩 기대를 가지며 ‘나는 무슨 속성 정령으로 하지…’ 하며 고민에 빠졌다.
그 모습을 본 물의 정령왕. 아니, 물의 정령왕의 위령(?)을 가진 미야는 한숨을 내쉬었다.
‘기운 빠지게 왜 한숨이야.’
계약자님은 너무 태평하세요. 지금도 저는 아리아님이 저를 죽이실까 심장이 마구 뛰는데…
수심에 잠긴듯한 미야는 탄식하듯 나에게 의사를 전달했다.
영혼이 묶인 계약자에게는 말이나 다른 수단을 쓰지 않더라도 의지를 전달할 수 있었다.
엘린시아에서 계약한 미야.
그녀는 아리아의 위령을 빼앗아 정령계에서 무려 1000년.
어드벤처 시간으로 10년을 보내며 육체의 부하와 자격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물론 나는 세계의 축소 때문에 얼마 안 기다렸다.
진짜 계약만 아니면 진작에 포기했을 거예요. 제가 다른 정령들한테 얼마나 눈치 보였는 줄 알아요? 가뜩이나 저 같은 물의 정령들이 엄청 많아서 고생고생을…
‘그래서 잘 데리고 다녀 주잖아.’
미야는 쓸만하다.
물론 무력적으로의 쓸만함 보다는 필요 ‘이하’의 강함과 신분을 쓸데로부터.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로 한 이상 나에게는 적당한 수준의 능력과 신분이 필요했다.
그런 의미로 아리아의 위령을 가진 미야는 정령술사라는 직업으로 위장하기에 딱 적절한 녀석이었다.
뒤처리하려고 1000년을 고생한 게 아닌데…
미야가 더더욱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녀가 아니더라도 이미 내 머릿속에는 말을 거는 이들이 하도 많아서 그다지 신경 쓰이진 않았다.
“길드장님. 도착한 거 같은데요?”
미야의 투정을 받아주는 사이 어느새 목적지에 도달했다.
선별시험의 하펠론에는 총 20개의 합격 아이템과 60개의 보상 아이템.
그리고 단 3개만 존재하는 특별 보상이 있다.
아델리나가 꽁꽁 숨겨둔 보상들.
리엔과 리진이 만든 마도구 만큼의 특수 장비들은 아니지만 나름 뛰어난 수준의 무구들을 숨겨놓았다.
나야 워낙 많아서 필요 없지만 그래도 주면 받지.
“여기 층인데… 선객이 있네.”
77층.
미로처럼 꼬인 탑인만큼 한층 한층 오른다고 쭉쭉 올라가지 않는다.
1층에 2층, 23층이 연결돼 있을 수도 있고,
47층에 12층, 89층, 31층이 연결돼 있을 수도 있다.
마법과 기기를 이용한 미로 트랩.
때문에 아무리 우리가 꼬인 경로를 통해 서둘러 왔다고 하더라도 ‘운 좋게’ 오는 사람이 한둘 있기 마련이다.
보상은… 벌써 저들이 손에 넣었다. 놈들은 자신들의 무기를 든 체 잔뜩 긴장한 듯 우리를 향해 겨누었다.
“어떡하죠?”
“뭐, 시험하나 해보지.”
포옹~
물방울이 잔잔한 호수에 떨어지는 듯한 경쾌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물방울이 저들을 덮쳤다.
갑작스러운 물방울에 해일에라도 쓸린 것처럼 이리저리 휩쓸린다.
“뭐야아아아 으아아아!!!”
“야 저 새끼 죽여!”
“넌 뒤졌어!!”
자신들을 공격할 줄 몰랐는지 욕설을 내뱉은 놈들은 벌써 허리까지 찬 해일을 가로지르며 우리를 향해 다가온다.
나라면 최대한 다른 층의 문을 찾아서 도망갈 텐데, 회심의 방안이라도 있는 걸까?
“파도풀이 생각나네요. 길드성에 수영장 있던데 거기에 이거 쓰면 완전 쩔 거 같아요!”
“...”
얘도 정상은 아니군. 우리 길드원은 왜 다 이런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내가 굳이 공격이 아닌 77층을 수영장으로 만든 건 이유가 있다.
“채림아.”
“네?”
“흡수해봐.”
나에게 걸린 ‘보호의 제약’을 일부 해제했다.
나를 감싸고 있던 무언가가 바스라지고 밑낯이 조금 드러난다.
“네.”
채림은 잠시 멈칫하다더니 이내 각오한 듯 목에 걸린 제어기를 비튼다.
스아아─
나와 연결된 정령의 마력의 일부가 어디 론가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그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77층에 퍼진 마력,
파도에 휩쓸린 세 놈의 마력,
하펠론에 흐르는 마력까지.
주위에 있는 모든 마력들이 한곳으로 쏠린다.
‘이런 느낌이네.’
무언가 빼앗기는 느낌이지만 그렇다고 위협적인 정도는 아니다.
드넓은 바다에 물 한 스푼 정도 푸는 느낌?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그 정도의 수준이었다.
“후으에에…”
“채림.”
“네에!!! 부르셨습니까 사장닙!!!”
“...”
벌써부터 어지럽네.
“워터 워터 슬라이드으으으!!”
“저 미친ㄴ…”
“꾸르르륵…”
채림의 가느다란 양팔이 놈들을 향해 뻗어지더니 그야말로 물의 세례가 열심히 수영하던 이들을 삼켜버렸다.
삼켜진 이들은 다시 허우적거리며 위로 올라오고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물의 세례가 이어진다.
이 정도면 거의 물고문 급인데.
누군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미안해지는 녀석들이었다.
“에휴.”
나는 손을 뻗어 기절한 남자 끌어와 보상 아이템을 회수했다.
그리고 다른 이들 역시 끌어와 파도에 그나마 휩쓸리지 않은 함정에 이들을 던졌다.
치직─
그들의 몸이 잠시 지직 거리더니 이내 탑 밖으로 퇴장당했다.
사람끼리의 전투의 피해는 퇴장이 안되지만 마수나 함정으로 인한 피해는 퇴장을 당한다.
즉, 사람끼리 죽이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는 소리.
아마도 리나는 이것을 의도했으리라.
‘강자만 뽑겠다는 거지.’
그녀에게 있어 어설프게, 혹은 머리를 써서 올라온 사람보다 치열하게 싸워 올라온 강자가 더더욱 좋을 테니까.
“사라져따.”
시원하게 파도 풀을 만들던 채림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정신 나간 것 마냥… 아니 정신 나갔지.
아무튼 고개를 휙휙 사방으로 저으며 나를 휙! 돌아봤다.
“없쓰요! 제가 이기꺼 가씁니다 쓰장님!”
“수고했어.”
“네에에에~ 감쓰아합니다아아아.”
채림은 폴더 인사를 꾸벅하며 시원하게 파도 풀을 일으키던 정령 마법을 꺼버렸다.
생각보다는 통제가 쉽네.
이 정도면 같이 술 먹고 헤헤거리며 하루 종일 붙어서 30cm 이상으로 절대 안 떨어질려고 하던 다윤이보다는 통제가 쉬웠다.
‘다시 생각하니 끔찍하군.’
하필 그때 하페루아가 와가지고 난리도 아니었지.
그때를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정신나간 채림을 대리고 그대로 다른 층으로 향했다.
“...죽고 싶어요.”
“죽으면 안 되지.”
해야 할 일이 많은데.
김윤은 그렇게 말했다.
그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듯 웃으며 넘겼으나 채림은 아니었다.
‘미쳤어 한채림!’
아무리 시켰다고 해도 또 정신 나가서 난리를 치다니.
다행히 사고는 안 났지만 이걸 안 났다고 봐야 할지 의문의었다.
물에 휩쓸리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크흠!”
채림은 고개를 흔들었다.
좋게 생각하자.
어차피 길드장님이 다 알고 영입하신 거고 이런 추태는 충분히 이해하고 계시니까.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
아니, 없어야 한다.
그래야…
“뭔 생각해?”
“아, 아니에요. 그보다 길드에 몇 명이나 있는거에요?”
채림이 본 다윤? 길드는 꽤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어림잡아 볼 때 수백 명 정도.
물론 전부가 하나같이 뛰어난 실력자들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꽤나 많은 숫자였다.
“길드에는 몇 명 없어. 대부분이 길드 건물의 관리나 운영을 도와주는 사람들이고 실질적인 길드원은 10명 안쪽이야.”
지금은 대부분 자리를 비웠지만.
김윤은 말을 덧붙이며 그렇게 말했다.
“아하…? 근데 왜 저는 들어본 적이 없죠? 전에 길드 모집소에 갔을 때 한 번도 못 본 거 같은데.”
“숨겨진 길드거든.”
다윤 길드는 비밀 길드다.
애초에 길드성이 위치한 천공의 섬은 엘린시아처럼 특별한 열쇠가 없다면 입장할 수도 없고, 설령 입장하더라도 수많은 문지기와 제약들을 뚫고 들어와야 한다.
“4대 길드가 최고인 것 같았지만 사실 진짜 최고는 따로 있었다! 라는 느낌? 최종 보스 인줄 알았던 보스가 알고 보니 중간 보스였고 진 보스는 따로 있었던 거지.”
“음… 그냥 처음부터 드러내는 게 더 좋을 거 같은데… 사실상 대부분의 점령 포인트를 다 내준 셈 아니에요?”
맞다.
다윤 길드는 강하지만 따로 점령한 세력 같은 건 없다.
이미 내로라하는 지역은 대부분 4대 길드한테 먹혔고 그들을 다시 빼앗기란 기존보다 훨씬 더 어려워졌다.
물론.
“괜찮아. 별 의미 없거든.”
“?”
그런 땅 따위 의미 없다.
손만 뻗으면 언제든지 얻을 수 있는 곳.
이미 그런 건 1년 전에 겪은지 오래였다.
나와 다윤을 비롯한 일행은 세계의 동기화의 어드벤티지 기간인 1년 동안 메인 퀘스트를 깨왔고, 그 과정에서 점령이나 레벨업 같은 부수적 인 건 이미 겪은지 오래다.
만일 하페루아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나 역시 땅따먹기나 하며 놀고 있었을 테지만.
‘그럴순 없지.’
진실을 안 이상 그렇게 여유로이 살아갈 수 없다.
어떻게 보면 나도 하페루아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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