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화 〉 6. 선별 (7)
* * *
“선택?”
카린은 마력의 운용을 멈추고 나를 노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앞서 놓아둔 두 장의 카드중 한 장의 카드를 집어 들었다.
“만일 네가 이 싸움을 원치 않는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돌아가게 해줄게. 물론 죽은 이들도 어떻게든 살려주지.”
“...정말입니까?”
“그래. 내 능력이 의심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너도 알겠지.”
이미 ‘소모’ 됐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불가능 한 일은 아니다.
게다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건 카린이 가장 잘 아는 일이다.
과거 고작 5명으로 100명이 넘는 마탑 정예와 카린을 부순 나기에.
그 누구도 불가능한 일을 이미 과거에도 행했었다.
백색의 면으로 가득 찬 카드가 빛을 발했다.
“이 카드에는 신성을 담아둔 힘이 있어. 이걸 사용하면 별 무리 없이 도망칠 수 있을 거야.”
이미 아델리나는 반쯤 장악당한 상태다.
알게 모르게 거대한 막이 아델리나 전체를 덮은 상황.
직접 고위신의 힘을 끌어다 썼기에 그 누구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리나가 힘을 빼앗기기 전이라면 눈치챘을 테지만…’
어차피 알아차린다 한들, 대적할 수도 없다.
고위신이란 그런 존재니까.
“...두번째는요.”
“지금처럼 계속 싸워야지. 싸워 이길만한 수단도 내어줄게. 단.”
나는 적색으로 뒤덮인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너의 동료는 살아날 확률이 매우 적어질 거야. 아마도 반드시 영원한 죽음을 맞이하겠지.”
“...”
“다시 살리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그날이 되면 죽음은 더 이상 아무런 제약도 되지 않을 것이다.
카린은 생각에 잠겼다.
힘이 부족하다고 느낀 적은 없다.
언제나 의지나 확신 같은 것들이 부족했을 뿐.
단 한 번도 그리 생각한 적은 없다.
‘아니, 아니다.’
눈앞에 있었다.
도저히 어떤 수를 써도 이기지 못할 것 같은 상대.
아무리 마법을 퍼붓고 수십, 수백 번을 다시 되살아나 맞서 싸워도 이기지 못할 것 같은 상대.
그런 상대가 다시금 찾아와 기회를 주겠다고 한다.
카린은 자신의 심안을 개안한다.
“...”
왜.
왜, 특별한 강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는 그저 정령의 기운을 조금 지닌 정령사 정도에 불과했다.
아니, 조금 더 강한 기운이 몇 개 보이나 그것이 자신을 뛰어넘는 수준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이자를 처음 만나 능력을 멋대로 판단하고 무력감을 겪은 것처럼.
“...아직도 그 갑옷이 있나요?”
“있지.”
남자는 순백의 빛이 발하는 백색의 갑옷을 드러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빛을 내뿜는 갑옷을 보니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듯 몸이 파르르 떨렸다.
“이젠 나 말고는 못 구하는 아이템이지만.”
새 시즌이 시작되고 통합 서버가 열린 이후로 레전드리급 아이템은 고유 장비가 되었다.
기존의 동일한 레전드리 아이템을 가진 인원이 두 명 있다고 가정해보자.
만일 누군가 먼저 통합 서버에 진출했다면 그렇지 못한 사람의 아이템은 자동적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왜 이런 식으로 바뀐지 모르겠지만 희소성이 올라가니 나쁘지 않은 시스템이었다.
카린은 김윤을 본다.
저 확고한 태도와 웃음.
“끄끅…”
“?”
“하… 어지럽네.”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다.
더 이상 과거가 과거가 아니게 되어버렸다.
마치 반파된 마탑의 길드성에 주저앉아 있는 느낌.
그러나 나쁜 느낌은 아니다.
“선택은?”
“알고 있지 않나요? 당신이 봐온 나라면.”
카린은 피식 웃으며 염동 마법을 이용해 붉은 카드를 가져갔다.
카린의 성정(??).
아무리 그녀가 사람을 죽이게 되고 그것에 대한 믿음과 주체가 흔들렸다 하더라도.
카린은 카린이었다.
“마음에 드네.”
「▼─ 」
그녀는 싸움을 택했다.
싸움을 택한 그녀에게 그에 걸맞은 능력을 쥐여주었다.
“이건…”
혼탁한 적색으로 가득 찬 카드.
아무런 시스템 정보나 마력이 들어가 있지 않은 아이템이지만, 매우 특별한 능력이 씌워져있다.
“단 한번, 1회용이니 정말 위급할 때만 사용해.”
“...또.”
알 수 없네.
아무리 노력해도 저 자는 결코 못 따라잡는구나.
카린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앨리스는 어둠을 걸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을.
“...”
보이지 않는다.
분명 어둠은 나의 영역일 텐데 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걸까.
“...흐.”
온몸이 잔뜩 물먹은 것처럼 무겁다. 힘이 하나도 없다. 마력도 운용되지 않는다.
그녀는 저 심연으로 빠져드는 무력함과 좌절감을 느꼈다.
이러면 안 된다.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마력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저 아래로 빠져드는 것뿐이었다.
마법사는 심장 부근의 서클에 자신의 마력을 두고 운용하지만, 간혹가다 서클이 망가지거나 처음부터 서클에 문제가 있는 이들이 있다.
모든 마법은 서클을 통해 행해진다.
그렇다면 그들은 영영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가?
그건 아니다.
스으으…
자연의 퍼진 마력.
그들은 자연에 퍼진 마력을 흡수해 사용한다.
“하아…”
평소에 몸에 담고 있던 마력보다 더욱 짙은 어둠이 그녀의 몸으로 스며든다.
그에 따라 가뜩이나 어둡던 머릿결은 빛 하나 드러 서지 않을 정도로 깜깜해졌고, 흑진주를 닮은 흑안(??)은 더욱더 짙은 어둠을 내뿜는다.
“하아아아….”
평소라면 절대 사용하지 못했을 방법.
자연의 마력을 운용하는 방법은 굉장히 위험하다.
무질서하게 퍼진 마력은 통제되지 않으며, 기존에 몸에 담고 있는 마력과의 충돌로 인해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혈액형이 맞지 않는 사람의 피를 그대로 주입시키는 느낌.
아니, 그보다 더한 상황이겠지.
하지만 현재의 앨리스는 그 어떠한 마력도 몸에 담고 있지 않았다.
서클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쁘지 않네.”
말 그대로 순수한 백지(白?).
그렇기에 처음부터 서클이 없는 이들처럼 자연스럽고 안정되게 힘을 흡수할 수 있었다.
물론 이만한 어둠을 몸에 담는 건 아무리 서클이 없는 자라고 해도 불가능하지만 그녀는 과거, 매우 뛰어났던 흑마법사.
이질적인 흑마법의 마력 운용이란 그녀의 특기 중 하나였다.
시야를 되찾은 앨리스는 주위를 둘러본다.
똑같이 어둠으로 물든 공간이지만 더 이상 어둠은 그녀의 시야를 가리지 못했다.
“...먹혔구나.”
예상은 했지만 좀 충격적 이었다.
암운 소속의 사도가 그리 강할 줄이야.
“마법은 내가 더 우위였는데. 망할 투기장.”
사도놈의 특성인 1대1 특화 능력인 투기장만 아니었다면 내가 이겼을 텐데.
하필 거기서 흑마법이 사용 안 될 게 뭐람.
때문에 흑마법이 아닌 다른 마법으로 상대하다 그대로 먹혀버리고 말았다.
퍽!
그녀는 애꿎은 영혼을 발로 뻥 찼다.
검은 형체의 사람 형상을 띈 영혼은 그대로 대굴대굴 굴러 영혼 무더기에 안착했다.
그녀와 같이 카인에게 먹혀 저당잡힌 영혼들.
아마도 이들은 흑마법의 재물로 사용되리라.
“대략 600명 정도… 대부분이 일정 수준 이상의 강자… 대전식 참여자.”
앨리스는 쪼그려앉아 중얼거리며 저당잡힌 영혼들을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기억 한구석. 흑마법의 재단식을 떠올린다.
분명 이런 식의 제물 숭배가 있을 거 같은데…
맘 같아서는 그냥 마력을 더 흡수해 뚫고 나가고 싶지만 이 영혼들을 그냥 두고 나갈 순 없다.
정확히는 아직 알 수 없다만 분명 안 좋게 사용되리라.
“...나가면 아주 암운을 박살 내 버려야겠어.”
그녀는 구체적인 해결방안이 나올 때까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마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선별이 끝났다.
통과자는 20명.
아니, 살아남은 사람이 20명이다.
마수를 가둔 이들이 하도 많아 경기가 끝나지 않았고, 그 사이에 30명이 전부 죽어 20명만이 남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의도된 결과라고 볼 수 있지만.
─대전식의 선별은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하루 뒤 아데르 리나님과의 대결이 있으니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살아남은 20명의 사람은 대부분이 하늘 길드원이었다.
하늘의 수장, 로즈는 통과한 인원을 하나씩 체크했다.
“밴시… 두드… 멜리사. 멜리사? 얘는 어딨어.”
“탈락한 게 아닐까요?”
“누구 멜리사한테 연락받은 거 있어?”
웅성거리는 길드원들.
분명 합격했어야 할 인원이 보이지 않는다.
24명의 인원을. 아니, 카인을 포함한 25명의 인원이 전부 합격하는 건 불가능.
때문에 2차 선별 때는 15명의 하늘 길드원들만 합격하기로 결정했고, 나머지 9명의 인원은 자진 탈락을 한 상황이었다.
문제는 멜리사는 합격했어야 할 인원이라는 것이다.
“길드 연락망에도 없어? 미리 숙소로 돌아간 애들은.”
“어… 연락이 없는데요. 길드장님.”
“길드로 돌아간 건…”
“아니, 끝나지도 않았는데 길드로 왜 돌아가.”
“그… 을쎄요?”
하.
도대체 뭐가 꼬인 거야?
로즈는 장밋빛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며 한쪽 구석에 멍하니 앉아있던 카인을 노려봤다.
“카인.”
“그… 어떻… 응? 로즈 누님? 무슨 일이야.”
“애들이 몇 명 안 보여. 네가 이번 계획 구상했잖아. 뭐 이상한 점 없어?”
합격한 하늘 길드원은 12명.
3명의 길드원이 안 보인다.
연락도 두절된 상황.
이 의문을 풀어줄 건 카인밖에 없었다.
카인은 전혀 모른다는 태도로 대답했다.
“사람이 빈다고? 그럴리가. 뭔가 착각한 거 아니야?”
“착각이 아니니깐 내가 왔겠지.”
짜증을 내는 로즈를 두고 카인은 심각한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고는 이내 손을 때었다.
“...아무래도 그 남자가 수상해.”
“그 남자… 앤더?”
“어. 생각 해봐. 동맹을 하자고 해놓고는 최종적으로 탑을 올라갈 때 빼고는 접점이 없잖아. 애초에 둘이 왔다는 것도 이해가 안 되고.”
“...”
“게다가 최상급 정령? 그런 걸 구하려면 적어도 정령 도시를 가야 하는데 지금의 정령 도시는 아무도 못 들어가는 곳이야.”
아직 홀리에린을 비롯한 오르바틴, 정령 도시 같은 초월적인 도시들의 문이 열리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 와중에 최상급 정령이라…
확실히 의심스럽긴 하다.
“그래서 뭐 어떡하자고.”
“동맹은 이번 선별 까지라며.”
카인은 한쪽 구석을 흘겨봤다. 자신이 데려온 여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김윤.
전혀 긴장감이 없는듯한 태도에 혐오감이 몰려왔다.
“뭘 숨기고 있는 건지 까봐야 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