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화 〉 7. 선택의 결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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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식까지 6시간.
이른 새벽부터 대전장은 한창 준비에 들어가고, 거리는 다가올 축제의 메인이벤트를 즐기기 위해 준비 중이다.
달그락 달그락거리는 가게로부터 맛있고 고소한 내음이 가득 퍼진다.
불과 몇시간 뒤에 이곳에 피비랜내가 진동하게 된다면 아무도 믿지 않겠지.
내가 없다는 조건 하에 말이다.
“왜 불렀어요?”
온몸을 각종 변장도구로 꽁꽁 감싼 체 눈만 드러낸 여자가 조용히 내 앞에 앉았다.
...저게 더 티 날 것 같은데.
“아데르 리나.”
“조, 조용히 해요! 일부로 숨기고 왔는데 공개해버릴 셈이에요?”
“내가 볼 땐 그 모습이 더 수상해.”
아무리 리나가 남들의 눈에 잘 뜨일 정도의 외모라 할지라도 저 정도로 가리면 누군지 알 수 없다.
문제는 저렇게 가리면 다들 한 번씩 쳐다본다는 것이다.
“저인 줄 모르면 되죠. 이래 봬도 5년간 왕국 시찰을 할동안 단 한 번도 들킨 적이 없다고요.”
“어? 아데르 리나님?”
어느새 자리에 앉은 채림이 정체를 눈치챘다.
“...”
“들켰네.”
“이, 이건 아니죠. 이분은 당신이랑 같이 와서 처음부터 알고...”
“근데 리나님이 왜 여기 계셔요? 대회 준비해야하는거 아니에요?”
“......”
쪼옥.
탁.
“그래서.”
냠.
탁.
“왜 부른 건가요?”
“잘 먹네.”
“...성의를 거절할 수 없으니까요.”
얼굴이 살짝 붉어진 리나는 냅킨으로 입을 슥슥 닦았다.
아직 오픈 준비 중인 가게.
내가 돈 주고 잠시 빌린 곳이다.
당연히 가게 주인의 눈과 귀도 돈 주고 샀기에 여기서 뭘 하든 바깥으로 퍼질 일은 없다.
“혹여나 말하는 거지만 이런다고 대전을 바주진 않아요. 물론 당신이 날 이기긴 했어도 채림양한테 지지는 않았으니까요.”
“움. 저 봥중려공 부릉거에영?”
“...다 먹고 말해라.”
꿀꺽.
채림은 입에 가득 넣은 음식을 삼키더니 햄스터처럼 다시 입에 넣기 시작했다.
저 모습을 보니 마치 레빗을 보는 것 같네.
“국왕은 뭐하고 있어?”
“왕께선 티아랑 놀고 계시죠. 아론이랑도 가끔씩 노시고요.”
아델리나 왕국의 왕의 권한은 다른 왕국에 비해 제법 강하지만 그것이 왕에게서 비롯된 권력은 아니다.
왕국의 무력, 재력, 명성을 모두 담당하는 자신의 딸에게서 비롯된 권력.
때문에 왕은 만일 리나가 왕위를 내놓으라 한다면 언제든 왕위를 물려줄 것이다.
“물론 저는 결혼하기 전까지 왕을 할 생각이 없지만요.”
‘하필 진 것도 이긴 것도 아니게 돼서...’ 리나가 툴툴거리듯 중얼거렸다
아무튼 그런 절대 권력에 유일하게 도전하는 게 바로 장남이자 리나의 친오빠인 아데르 레진.
다른 왕국이었다면 레진이 별문제가 없는 한 1 계승권은 따놓은 당상이겠다만, 아델리나에서는 그 아래인 아론과 티아와 비슷한 처지가 되었다.
레진은 이런 상황에 제법 불만을 가지고 있는 중이다.
“엄청 잘 아시네요... 우리 왕국 뒷조사라도 하셨어요?”
입에 면 요리를 넣는 리나는 내 설명을 듣고 놀란 듯 자수정 같은 눈동자가 커졌다.
“어.”
물론 내가 안 하고 하페루아가 조사한 정보다.
“어떤 이상한 사람이 자기를 이긴 사람이랑 결혼하는가 궁금해서.”
“이상해서 미안하네요. ...혹시 그래서 나랑 결혼 안 하려 한 거예요?”
“설마.”
많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다윤이다.
딱히 할 생각은 없지만 굳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다윤이랑 먼저 한 다음...
‘그것도 좀 이상하네.’
하도 판타지에 절여있다 보니 생각 회로가 점차 변하는 기분이다.
우리 둘의 대화를 듣는 둥 마는 둥, 화려한 코스 요리에 정신 나간 듯이 먹고 있던 채림이 고개를 벌떡 들었다.
“겨겨겨겨결혼이요??! 두분 결혼하세요요요?!!!”
“...?”
“야, 너...”
“스, 스스스장님, 이미 결혼 상대가 여러 명 있으시자나요!!”
“아니. 무슨 헛소릴”
“그분이랑 주인님이라 하는 분도 그렇고 루아님도 사실 스장님이랑 그런 관계 읍!”
염력을 통해 입이 붙잡힌 채림이 반드시 더 말하겠다는 듯 아둥바둥 거렸다.
정신 나간 듯 먹는게 아니라 진짜 정신이 나간 거였네.
리나의 동공에 아주 조금의 혐오가 깃들었다.
“여러 명이요?”
“오해입니다.”
“근데 갑자기 존댓말은 왜 써요?”
“...오해야.”
머리 아프네.
하필 마법 인첸트가 된 음식이라 정신이 나가다니.
그래도 이 정도면 정신이 나갈 정도는 아닌데 내가 너무 방심했나 보다.
리나는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얼굴이 붉어지며 ‘뭐 그럴 수도 있지...’라며 중얼 거렸다.
원래 다른 걸 말하려 부른 건데 왜 얘기가 점점 산으로 가는 걸까.
“근데 왜 저는?”
“오해라고!”
대전식까지 2시간.
슬슬 거리의 북적거림이 잦아진다.
이미 해는 높이 뜨고 1년에 단 한 번만 있는 구경거리에 많은 주민들이 한 장소로 모여든다.
그리고 그렇게 모여든 만큼 아델리나의 외각은 이전보다 더욱더 한산했다.
끼긱.
칼날 사슬을 잔뜩 두른 남자는 붙어진 목이 적응이 안 되는 듯 꾹꾹 눌렀다.
꾸욱...
그에 호응하듯 남자가 밟고 있는 시체도 같이 눌렸다.
대략 20구 정도의 시체가 외각의 아무도 오지 않는 창고에 나뒹굴었다.
“이해가 안 되는군요!”
“...”
“그냥 말을 들었으면 살아서 위대한 분을 모실 수 있었을 텐데.”
뚜벅.
낮임에도 짙은 어둠이 드리운 곳.
그곳에는 3개의 형체가 각자의 위치에서 살아남은 단 한 명 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미쳤지.”
“네! 그렇습니다! 당신은 미쳤죠! 감히 위대한 분의 뜻을 거스”
“검성 길드라는 놈을 데려와놓고 막상 검을 제대로 쓰는 걸 제대로 못 봤어.”
큭큭.
의자에 꽁꽁 묶인 체 잔뜩 피투성이가 된 로즈는 자신의 앞에 소리치는 남자 대신, 저 뒤에 있는 형체를 노려봤다.
“..누님. 그러니깐 내가 말했잖아, 그놈이 수상하다고. 왜 따지러 가지 않은 거야. 그것 때문에 누님이 이렇게 돼버렸잖아.”
“지랄.”
“...역시 누님은 아이 모습 일때보다 어른 모습이 더 나아.”
레진은. 아니, 이제는 더 이상 레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카인이 로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특성의 최대 효율을 위해 성인 상태로 모습을 바꿨지만, 갑작스러운 3명의 사도의 기습에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로즈는 덜덜 떨리는 팔을 최대한 끌어올려 능력을 발동하려 했으나.
“불신자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답니다.”
저 상급자로 보이는 무언가를 두른 여자 때문에 능력이 사용되지 않았다.
로즈는 정말 보기 싫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싸늘한 죽음이 되어있은 길드원들.
“...하.”
이것이 내가 지금까지 죽여온, 혹은 앞으로 죽일 계획을 세워온 대가라면 대가겠다만.
“어딜 자꾸 눈을 돌리십니까!”
콰앙!
그게 저딴 놈들에게 대가를 치러야 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로즈는 처박힌 몸을 추스르며 이렇게 된 이유를 생각했다.
대전식까지 17시간.
길드원들을 숙소로 보내고 거리를 좀 걷고 있던 중이었다.
사라져 연락이 두절된 녀석들.
아마도 사고를 당한 것이라.
그렇다면 범인이 누굴까.
검성 길드에서 용병으로 데려온 카인이 세운 계획은 레진을 이용해 왕국을 집어삼키는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방해되는 무리를 탈락시키고 일부가 올라온다.
그게 계획이었다.
절대 살인 같은 게 아니었다.
그저 탈락시킬 정도만. 진행이 불가할 정도로만 만들거나 협박해 떨구는 수준.
대몰살도 결국은 죽이겠지만 훗날 있을 메인 퀘스트급의 히든 퀘스트를 통해 '단체 부활'을 시킬 생각이었다.
그런데 누가.
어째서.
복잡한 심정을 가라앉히지 못한 체 거리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로즈는 우연히 그를 만났다.
노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서양쪽 유저.
그가 시신이 되어 구석진 곳에 살해당해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 눈이 찢어질 듯이 놀랐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자신이 알던 '그'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령사는커녕 하급 정령의 능력도 담고 있지 않은 몸.
느껴지는 기운도 형편없었다.
‘흑마법에 당했어... 녀석은 처음부터 앤더 흉내를 낸 거야.’
아마도 앤더라는 이름도 이자의 것이라.
그렇다면 그가 앤더를 죽이고 앤더 행세를 한 건가?
...라고 1차원적인 생각을 할 수 있지만 뭔가 이상하다.
만일 정말 앤더를 죽이고 앤더 행세를 하려 했다면 이런 시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마법과 이능이 가득한 곳이니 시체 하나쯤이야 손만 까딱하면 없앨 수 있다.
하물며 이런 약하디 약한 육체라면 더더욱.
게다가 상흔이 흑마법이라면, 흑마법사에게 시신 처리쯤이야 정말 일도 아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건 마치...’
시신을 전시해 놓은 것 같지 않은가.
뚜벅.
“아.”
“카린?”
거리의 어둠 사이로 카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항상 온화한 표정을 띠던 모습과 달리 굉장히 어두운 표정.
얘가 왜 여기에...
“아아... 너구나?”
“...”
“어쩐지. 뭔가 이상했어. 갑자기 동쪽에 있던 마탑이 온 것도 그렇고, 갑자기 전혀 알 수 없는 강한 녀석이 혜성같이 나타난 것도 그렇고.”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간다.
마탑과 앤더 행세를 한 그.
애초에 그 둘은 같은 편이었을 것이다.
마탑은 처음부터 우리를 이용해 잡아먹을 생각이었겠지.
앤더라는 용병을 이용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카린이 그럴 리 없다 생각했지만 그날로부터 10년이 더 지났다.
카린의 성정이 변해도 전혀 이상할게 없지.
이 흑마법은 앨리스의 능력일 거고.
“그간 재미 보고 얼마나 웃음을 참기 힘들었어. 일부로 나한테 시신을 보여주고 또 속일 셈이었겠지만, 나 예전에 당하던 내가 아냐.”
“...”
“과거 부길드장 시절은 더더욱 아니고.”
“...”
“지금 나타난 건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어서야? 옷은 왜 또 그런”
“언니.”
...뭐?
방금 뭐라고...
“이해가 안 가겠지. 나도 이해가 안가. 정말 그들이 같이 게임하던 유저들이 맞는지.”
파직.
“그들이 '인간'이 맞는지.”
카린의 마력이 잔뜩 들끓듯 용솟음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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