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화 〉 7. 선택의 결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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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식이 시작되었다.
진짜 축제를 즐기기 위해 거리는 인산인해로 북적이고, 하늘에는 아델리나를 상징하는 남색의 깃발이 줄줄이 허공을 떠다녔다.
그리고 대망의 무대인 대전장.
대전장 정중앙에는 용찰검을 들고 있는 얇은 갑옷 차림의 리나가 보였다.
나와 싸울 때와는 달리 철저히 준비한 모습.
아무래도 이전에 비해 힘이 많이 떨어진 상황이나 준비를 단단히 한 거겠지.
저정도 장비면 어지간한 길드장보다도 뛰어난 수준이다.
“안녕하십니까! 이번 사회를 맡은 맥스입니다.”
중세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정장을 입은 남자가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부유 마법과 소리 증폭 마법을 이용한 모양이다.
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목소리에 대전장을 둘러싼 주민들이 환호했다.
“...후. 떨리네요.”
채림은 관객석에 앉아 무대를 바라봤다.
나는 그런 채림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네주었다.
“구슬 아이스크림! 어, 어떻게 사오셨어요?”
“직접 받아왔지.”
가게 주인이랑 안면을 튼 터라 적당한 돈을 주고 사 왔다.
채림은 고개를 꾸벅거렸다. 사회자가 짤막하게 설명하는 동안 무려 5그릇을 먹고 6그릇째에 숟가락을 푹 넣었다.
“그러다 배탈난다.”
“에이~ 능력치가 좋아서 배탈 안나요. 뭐, 나면 치료하면 되고!”
“그래.”
채림이 신나게 아이스크림을 먹는 동안 나는 관객석을 둘러봤다.
여전히 안 보이는 그들.
‘그걸 쓸 생각인가.’
어쩌면 계획을 좀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대전 시작에 앞서 도전자들의 순서를 뽑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자, 맥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동그란 돌림판이 허공에 생겼다.
스무 갈래로 나누어진 돌림판이 세차게 돌아가더니 어느새 단 한 칸 만을 가리켰다.
“첫 번째 도전자는! 빙 도드!”
대전의 시작이었다.
리나는 용찰검을 쥔 체 앞서 나온 상대를 바라봤다.
비록 예전 같은 힘은 없더라도 기술과 그간 수련해온 시간이 있다.
‘얼음을 쓰는 마법사… 는 아닌 것 같고 특별한 이능(?)이겠네.’
왕국의 주인이라고 불리는 리나는 대전식을 위한 선별을 보지 않았다.
이유는 좀 더 흥미로운 전투를 하기 위해서다.
만일 선별을 본다면 도전자들의 능력을 미리 파악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자연스레 대처법이나 상황 판단에서 이득이 생긴다.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갈고닦아 준비했지만, 굳이 남의 능력을 파악해서까지 이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닌, ‘싸움’ 그 자체를 원했기에.
“자~ 그럼 첫 번째 대전 시작합니다!”
맥스의 말과 함께 대전은 시작됐다.
바로 달려들지 않는 도전자.
‘이런 사람들이 꼭 있지.’
어떻게든 방어해서 나의 정보를 빼내려는 사람.
리나가 다가서자 그의 손에 얼음이 깃들고 하나의 방패를 생성한다.
“하.”
잡기술.
파캉!
“...어?”
단 한 번의 휘두름.
그것으로 경기가 끝났다.
“스, 승자는 위대한 아델리나 왕국의 아데르 리나!!”
와아아아! 함성이 들린다.
그러나 리나는 불편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시시해…’
고작 이런 것들을 상대하려고 단단히 준비한 게 아닌데.
그녀는 혀를 차며 바로 다음 상대를 불러냈다.
7번째 경기.
여전히 시시한 싸움은 계속된다.
도전자들은 똑같이 방어태세를 갖췄고, 리나는 한합만에 경기를 끝냈다.
축제에 비해 재미 없는 싸움들이 이어졌지만 리나는 광대가 아닌 공주.
굳이 관객들의 입맛을 맞춰줄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매해 100명씩 상대해왔기에 관객들은 이러한 양상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다음 경기는…”
다음 도전자가 들어온다.
이번엔 불을 쓰는 여자.
똑같이 방어태새를 갖춘다.
그리고 끝난다.
‘...뭔가 이상해.’
대충 얘기는 들었다. 같은 소속의 도전자들이 대거 참가했다고.
때문에 같은 전략이 계속해서 나온 건 전혀 이상한 게 아니지만, 문제는…
‘왜 다른 쪽 참가자는 나오지 않는 거지?’
벌써 11번째 참가자.
11번이나 전투를 진행할 동안 저 전략과 다른 전략을 가진 이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운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이상한 상황.
죽이진 않았지만 제법 상처를 입은 터라 굳이 저렇게까지 할 이유가 보이지 않았다.
“그분이 말한 게 이건가....”
레진이 참여했기에 안 좋은 수를 부릴 수 있다.
그러니 조심해서 대처해라.
언뜻 보면 그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걸로 보이지만 리나는 몇 년을 이곳의 지배층으로 생활해오며 정치의 주역에 있었다.
애초에 걱정을 했다면 내 힘을 가져가지 않거나, 아예 이 대전 자체를 무효로 만들어버렸겠지.
허나 그는 말만 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리나는 고개를 돌려 관객석에 하품을 내쉬며 앉아있는 김윤을 바라봤다.
도대체 무슨 생각 중인 걸까.
“다음 경기는 도전자, 에볼!”
이제는 작아진 함성소리와 함께 에볼이 올라온다.
짙은 흑색으로 물든 산발의 머리카락과 광기에 찌든 눈.
옷은 형체를 알 수 없는 재질이 무질서하게 놓여있었다.
리나는 용찰검을 쥐어들었다.
매번 시시한 경기가 이어졌다고 해도 방심은 하지 않는다.
방심을 유도하는 것이 저들의 계획일 테니.
맥스의 시작 멘트가 대전장에 울려 퍼지고 리나가 여느 때처럼 검을 쥐고 공격을 준비한다.
남자는 싸울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한 가지!”
“...?”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혹시 질문 좀 해도 될까요!?”
귀를 찌르는 하이톤의 목소리.
그래, 왜 이런 놈이 안 나오나 했다.
대전중에 대화를 요청하는 놈들이 꼭 있다.
“정 묻고 싶으면 막아보시죠.”
물론 대화는 하지 않는다.
“흠…”
아까보다 조금은 짙어진 용찰검이 울음을 내뱉으며 남자를 가로로 베어냈다.
드─득!
“...!”
검기는 갑자기 솟아난 어둠을 뚫지 못하고 바스러졌다. 어둠 사이로 웃고 있는 에볼의 표정이 훤히 보였다.
“흐흐… 이제 좀 대화가 될까요?”
“...재밌네.”
리나가 에볼를 향해 달려들었다. 쏟아지듯 그어진 용찰검은 남자를 가리고 있던 어둠을 가로질렀다.
콰득!
여전히 뚫기가 어려워 보이는 어둠.
리나는 과거에는 쓸수 없었던 용찰검의 힘을 끌어냈다. 용의 힘이 몸으로 스며들고 비워져있던 육체에 조금씩 차오른다.
“호오?”
쯔작! 어둠이 갈라졌다.
다시 차오르는 어둠. 리나는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어둠뒤편에 있는 에볼의 어깨를 배어냈다.
스각. 에볼의 왼팔은 그대로 잘려나가 대전장의 바닥을 굴렀다.
‘...심장을 노렸는데.’
어둠을 완전히 뚫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번 뚫어냈으니 다음에는 그보다 더 쉬울 것이다.
용찰검을 억세게 쥔 그녀는 자신의 기운을 갈무리하며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갔다.
에볼은 자신의 왼팔을 멍하니 보다 광소를 터트렸다.
“흐… 흐하하하하!!!”
“...”
“역시! 역시 리나님은 리나님이군요! 아델리나 왕국의 수호신! 왕국의 영웅!”
리나는 광소하는 에볼을 노려봤다.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아까 본인 입으로 내뱉은 것도 있으니 말 정도야 하게 둘 수 있다.
물론 그 말에 대답해줄 생각은 없었다.
에볼은 광소하다 뚝. 리라를 바라본다.
“하지만 실망… 이라고 해야할까요?”
“...뭐?”
“들은 것과는 좀 달라서 말입니다.”
뚜벅.
“뭐라 그래야 할까…”
뚜벅.
리나의 용찰검이 주춤하듯 움찔한다.
“알맹이가 빠진 육체라고 해야 할까…”
용찰검의 기운은 에볼을 보았다.
아니, 에볼 뒤에 있는 거대한 존재를 보았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어둠.
그의 뒤에 드리운 것은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짙은 어둠이었다.
어느새 리나의 코앞까지 온 에볼의 손이 리나의 머릿결을 만지려던 찰나.
“착검.”
푸확!
에볼의 머리가 양단되어 대전장의 바닥을 굴렀다.
“하아… 하아…”
그녀는 숨을 고르며 목이 잘려나간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방심.
갑작스러운 위압에 순간 긴장을 놓치고 위기에 처했지만, 상대도 자신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무언가에 취해 방심했다.
그리고 그 짧은 찰나의 순간은 눈앞의 남자를 배어 내기에 충분했다.
“후우…”
너무 과한 처사 같지만 자칫 망설이다 역으로 당해버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리나는 숨을 마저 몰아쉬다 의문을 느끼고 허공을 바라본다.
“맥스. 왜 끝내지 않…”
“하하.”
“...!”
있을 수 없는 일.
“너무 아팠습니다. 리나님.”
분명 방금 전까지 목이 잘린 시체가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와있었다.
분명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죽은 자가 멀쩡히 살아난다는 건.’
“어떻… 게?”
에볼은 멋쩍이게 웃었다.
“또 그분의 도움을 받아버렸군요. 하아… 나중에 아스텔님께 사죄와 감사 인사를 전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아스텔?”
“궁금하십니까?”
그가 웃는다. 이제는 바뀌어버린 질문자.
이를 꽉 문 리나는 긴장을 놓지 않으며 주변을 살핀다.
아까부터 지나칠 정도로 관객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사회자인 맥스의 말도 들리지 않는다.
대전장까지 퍼지는 거리의 소음도 들리지 않는다.
“...”
상관없다.
이게 술수라면 이기면 그만이다.
오히려 긴장감 없이 전투하던 이전 경기보다 차라리 이런 게 더 나으리라.
“리나…”
스각.
어둠을 뚫고 한 번 더 잘려나가는 에볼의 육신.
육신은 떨어지기 무섭게 시간이 되돌아가듯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후… 리나님은 모르겠─”
콰직!
용찰검의 무게를 늘려 압사 시킨다.
“모르…”
촤자자작─!
목이 안된다면 여러 갈래로도 베어도 내본다.
이래도 안된다면...
“모…!”
푸카카카카칵!!
투두두둑…
갈갈이 쪼개진 육체.
‘...너무 심했나?’
보기도 힘들정도로 잘려나간 육체지만 역시나 원래의 모습으로 재생됐다.
아니, 이걸 재생이라 보기도 이상할 정도다.
“뭘 해도 되살아 나는군요.”
축제나 다름없는 대전이기에 관객들에게 보여줄 수준은 아니다.
허나 지금은 무슨 수를 부렸는지 반응이 없는 상황.
아마도 관객들은 이 장면을 보지 못하리라.
“크흡... “
“...”
“프하하하하하하!!!!!!!!!!!!!!!!”
광소가 짙어진다.
역시 죽지는 않았다.
‘...효과가 있어.’
확실히 놈의 어둠이 더 짙어졌다. 그 어둠은 놈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거세져, 어느새 에볼은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드러누운 에볼은 끌끌 웃었다.
“흐흐… 제가 졌습니다.”
그의 항복 선언과 함께 어둠이 걷힌다.
“...미친.”
어둠이 사라진 자리에는 이질적인 빛이 그 자리를 메꾸고, 백의를 두른 여자가 리나를 향해 유려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 경기는 도전자, 에드노스 피아 아스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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