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화 〉 9. 6번째 정령왕 (2)
* * *
‘윤 씨랑 같이 못 다니다니.’
비록 재회를 하긴 했지만 거의 1년 만에 함께 여정을 떠나게 된 만큼 옆에 같이 있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
아쉽지만 윤 씨는 이런 일에 대해서 인연보다 효율을 중시하니까.
게다가 그 악마 기집애가 옆에 찰싹 붙을게 분명하다.
그러니 차라리 채림이라도 있어서 3명이 다니는 게 좀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러면 제멋대로 행동 못 하겠지.
“뭔 생각해?”
“아, 아냐.”
‘문’을 통해 들어오자 수많은 불의 정령들이 눈에 띄었다.
슬라임, 사슴, 토끼, 곰, 영물…
가지각색의 모습을 띈 불의 정령들이 ‘정원’을 가득 메우고, 하늘에는 불의 새가 푸른 하늘을 가로지른다.
그 아래로는 거대한 바위 거인이 천막을 치듯 그늘을 만들어, 아래 위치한 수많은 정령들의 휴식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여기는 불의 정령들만 모인 곳 이구나.
다윤과 계약한 슬라임 형태의 불의 정령은 친구들이 반가운지 금세 근처로 다가가 대화를 나누었다.
“그보다 이곳에서 어떻게 정령왕을 찾지?”
“흐음…”
여우신의 자식, 이랑은 허공에 둥둥 뜬 체 생각에 잠겼다.
일단 김윤의 말대로 오긴 왔는데…
‘정령왕은 신비한 존재들이란다. 그들은 우리 같은 신들과 달라.’
‘달라? 어떻게 다른데?’
‘넷, 아니 다섯의 정령왕들은…’
‘영혼’의 격이 다른 존재들이다.
언제인지 모를 어린 시절에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다.
정령왕들은 고위신과 같으면서도 다른 존재들이라고.
그들과 비슷한 시기에 모습을 드러낸 이린이지만 그녀조차 정령왕의 정체를 전부 파악하지는 못했다.
그만큼 정령왕은 ‘신비’에 가까운 존재들이다.
처음에는 그게 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여우신이라는 행성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의 말에는 그만큼의 무게가 실리긴 했으나, 그 당시 매우 어렸던 이랑은 달리 이해했다.
그냥 옛날 옛적의 동화를 읊어주는 정도일 거라고.
그 내로라하는 정령왕도 결국 이린을 이길 정도는 아닐 거라고.
“...천천히 한 단계씩 올라가야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다른 세계와 ‘초월’에 대해 깨우친 이상.
이랑은 그들을 쉽사리 볼 수 없었다.
“가자.”
다섯의 초월자이자 세계를 구성하는 정령왕.
어찌 보면 행성 최대의 전력이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곳에 이랑과 다윤이 왕을 찾아 나섰다.
“여기가 정령 도시…”
─후아…
리벤디아의 동쪽, 바람의 정령의 서식지이자 거처인 ‘협곡’.
그곳에 발을 들이자 덜덜 떠는 채림과 물의 정령 미야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이곳의 기운이 다른 곳보다 범상치 않기는 하다.
나 또한 마력의 흐름을 깊게 체감할 정도.
“긴장 풀어.”
─그래도 아리아님 쪽으론 안 갔네요…
“가면 너는 일단 죽을걸?”
북쪽에 위치한 아리아의 영역, ‘바다’에 들어서기만 해도 그대로 몸이 액체로 변해 바다에 흡수될 거다.
아무리 아리아가 위령(?)을 신경 안쓴다고 해도 제 영역에 들어간 걸 눈치 못 챌 리가 없으니까.
“여, 여기 드래곤이 엄청 많아요오…”
님프와 드래곤을 꽈악 껴안은 채림이 덜덜 떨며 하늘을 휙휙 돌아봤다.
지금 협곡의 하늘에는 서양의 드래곤과 동방의 용의 모습을 띈 바람의 정령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그 외에도 지상의 협곡 곳곳에는 공룡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영물들도 다수 보인다.
‘확실히 다른 곳보다 강하긴 하군.’
바람의 정령과 계약하지 않은 내가 굳이 이곳까지 온 이유는 단순히 네메린느를 만나기 위함이 아니다.
‘다른 이들로는 이곳을 공략하기가 어렵다.’
다섯의 정령왕 중 유독 바람의 정령왕은 남들보다 강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 힘은 상성과 숫자의 차이를 가뿐히 넘을 정도.
대충 파악한 정보로는 바람과 상성에 있는 땅를 제외한 다른 두 정령왕과 싸울 시, 별 어려움 없이 승리할 수 있을 정도다.
아무리 다들 어지간한 고위신은 가뿐히 이길 정도로 성장하긴 했지만 우리의 적은 더이상 그들이 아니다.
“괜찮아?”
“으으… 조조조금 어지러지러지 한거것빼고요오?”
“...”
나름 조절을 잘 해주고 있긴 한데…
아무래도 이곳의 기운이 채림의 마력을 더욱더 뒤틀리게 만들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채림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손을 통해 연푸른 마력이 흘러들어가며 엉킨 마나선을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매번 이럴 수도 없고. 이제 와서 말하긴 뭐하지만 길드로 돌아가 있으라고 해야 하나?’
“아…”
“이젠 됐지?”
스륵.
손을 때자 채림의 앞머리가 중력의 영향을 받아 살포시 내려온다.
채림은 어쩐지 말이 없는 듯 멍하니 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힘들면 말해. 위험하다 싶으면 길드로 돌려보내 줄 테니까.”
“...괜찮아요. 열심히 해볼게요.”
“그럼.”
김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정령인 미야와 함께 바람을 타고 어딘가로 날아갔다.
이동 명목으로 팔목 소매를 붙잡은 채림은 조금 붉어진 얼굴을 다른 손으로 가렸다.
물론 얼굴에 부딪히는 바람을 막는다는 명목이었다.
[청춘이군.]
용용이의 말이 속으로 들렸지만 애써 무시하며.
동쪽의 바람, 네메린느는 하루하루가 무료한 인생을 보내고 있었다.
[하. 거지같네에에...]
매번 똑같은 아침을 맞이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일어나자마자 아래 정령들의 시중을 받으며, 필요 없지만 오로지 맛을 위해 식사를 하고 밖을 나선다.
밖을 나서면 똑같은 풍경의 협곡을 돌아다닌다.
과거에는 다른 정령왕의 도시나 새로이 정령왕이된 ‘세피드’의 거처도 자주 갔다.
하지만 이제는 지겨워서 따로 찾아가지 않는다.
그렇게 돌아다니며 정령들에게 인사 좀 하고 다시 으리으리한 집으로 돌아온다.
한 번은 이 으리으리한 집도 지겨워서 노숙도 하고 그랬는데, 차라리 으리으리한 집이 더 낫다.
[하, 하하하하하하핫!!]
웃어본다.
음, 역시 억지웃음은 오히려 더 비참해진다.
[으음… 다음은 네 차례다.]
“...못 이기겠는데요?”
[에이씨! 제대로 좀 해봐!]
정령들과 게임도 좀 해본다.
...더럽게 못하네 진짜.
[됐다! 다 꺼져!]
“““예...”””
체스든 오목이든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게임들을 다 해보았지만 의미가 없었다.
자신의 실력은 너무나도 뛰어났고,
후손이라 할 수 있는 정령들은 너무나도 수준이 낮았다.
물론 이것은 네메린느 개인적인 기준이다.
실제로 방금 정령왕과 대결을 치른 이들은 지상의 어지간한 실력자들과 맞먹을 정도의 지식과 수준을 가진 이들이었다.
[왜 이리 다들 못 하는거야...]
하지만 네메린느의 실력이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물론 그녀는 봐주는 걸 극도로 싫어하기에 치열한 승부는 당연히 할 수 없다.
한 번은 봐줘가면서 해줬지만 게임의 시간만 길어질 뿐, 결과는 달라지지 않고 지겹기만 했다.
[흐아… 이그네아라도 찾아가야 하나.]
자신과 유일하게 맞먹을 정도의 실력과 머리를 가진 존재.
분명히 네메린느와의 치열한 대결이 될 것으로 예상되나, 이미 몇만 년 전부터 얼굴을 봐오고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따라서 지금 이그네아를 비롯한 다른 정령왕들이 뭘 먹고 뭘 하는지도 다 파악할 수 있을 정도다.
‘...그 연놈들 만나봐야 똑같겠지.’
하아.
네메린느는 처음에는 이렇지 않았다.
죽어나가는 생명에 눈물을 흘리고, 자라나는 생명에 미소를 짓는 신.
불의에 절대 용서치 않고 선한 이들을 구제하는 그런 신이었다.
하지만 벽을 넘고 ‘초월’을 한순간부터 달라졌다.
뭐라 그래야 할까.
모든 게 부질없다고 해야 하나?
이곳이 세상의 전부가 아닌 그저 ‘가짜’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자신이 만들고 가꾼 세상이 사실 더 높은 누군가에 의해 돌아가고 있었다면.
그렇다면 지금까지 해온 일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망할...]
그때부터 나는, 아니 우리를 달라졌다.
자애롭고 인자한 신에서 우물 밖의 세상을 알게 된 개구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정작 더 억울한 것은 그딴 걸 알아버렸음에도 그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몸 소 깨달았을 때.
우리는 세계로부터 모습을 감추었다.
이유는 정말 별거 없었다.
그냥 우리를 가지고 노는 게 아니꼬와서.
그래서 감춘 것 뿐.
문제는 그렇게 해도 그 ‘위’의 존재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오히려 우리의 존재들 더 떠벌리고 다녔다는 것이다.
[개에에에에에같은 새끼!!!]
화가 난다.
화가 나고 울분이 솟구친다.
[흐흐흐...]
하지만 더 비참한 것은.
[지랄 났네 진짜아…]
이런 감정까지도 최대한 이용해 이 ‘무료함’을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화남’을 충분히 느껴야 조금은 만족한 하루를 보낼 수 있다.
[후아...]
“정령왕이시여.”
[뭐냐.]
한참 즐기고 있는데.
갑작스런 아래 정령의 말에 감정이 싹 가라앉은 그녀는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노려봤다.
[뭐냐고.]
“누, 누군가 찾아왔습니다.”
[...? 누가? 이그네아? 아리아? 아냐, 그 둘이 인사치레를 할 필요가 없고. 그럼 스틸인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잘 됐다.
기껏 끌어올린 감정이 가라앉은 지금, 오늘 하루를 우울에 절여있지 않기위해 대화를 나눌 누군가가 반드시 필요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없는 것보단 낫겠지.
그런데 아래 정령의 다음 말이 이상했다.
“아, 아뇨. 그분들이 아닌 인간입니다.”
[? 뭔 개소리를 해. 인간이 어떻게 여길 어떻게 들어...]
“들어오라는 거 맞지?”
저벅.
건물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온다.
인간과 아리아를 닮은 정령, 그리고 님프와 용이라는 이상할 정도의 조합.
그러나 네메린느의 흥미를 돋우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인간?]
“안녕, 네메린느. 역시 설정집보다 실물이 훨씬 괜찮네.”
[그 조합은 뭐고. 여긴 또 어떻게 들어온 거냐. 아래 정령의 연극이냐?]
“연극은 아니고...”
여전히 무심한 네메린느의 앞에 체스판이 하나 놓인다.
체스판 앞에 털썩 앉은 그가 평소와는 색다른 말들 중 하나를 꺼내 왕의 자리에 탁. 올려놨다.
특별한 말의 정체를 파악한 네메린느의 눈빛이 반짝였다.
“할 거지?”
[...! 좋다!]
이젠 좀 흥미가 생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