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75화 〉 9. 6번째 정령왕 (3) (175/318)

〈 175화 〉 9. 6번째 정령왕 (3)

* * *

­

렌드로의 전쟁.

보기에는 평범한 64칸의 체스 판처럼 보이지만 그 위에 올라가는 것들은 다르다.

[‘마법사’는 빼고 할 것이냐?]

“굳이?”

그가 웃으며 붙잡은 왕의 머리 부분을 틀자 순식간에 왕의 수하들이 판위로 생겨났다.

왕의 두 번째 칸 옆에는 지팡이를 든 마법사의 기물이 붉은 기운을 내뿜으며 상대 진형을 노려봤다.

체스라는 평범한 전쟁에서 마법이 추가된 게임이다.

말로만 들었을 때는 그냥 특수한 능력을 가진 말들만 추가한 게임 같지만…

[내가 먼저 두지.]

탁.

네메린느는 가장 맨 앞, 푸른색의 말을 탄 기병을 집어 들었다.

말은 순식간에 앞으로 전진해 붉은색의 늑대를 탄 병사의 앞으로 다가갔다.

­티각.

지축이 흔들리듯 시야가 뒤바뀌더니 어느새 초원에는 말을 탄 네메린느와 늑대를 탄 김윤이 보였다.

창을 길게 바닥에 꽂고 기사의 갑옷을 입은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나를 기대시켜놓고 바로 포기한다면 엄히 벌할 것이다.]

“흐음. 그럼 나도 기대에 부응해 압살해 주진 않을게.”

[...과연.]

후웅.

다그닥!

네메린느의 푸른 창이 허공을 가르며 빠르게 김윤에게로 돌격한다.

그는 붉은색의 대검을 위로 들어 창의 쇄도를 막아냈다.

‘...호오. 제법─’

콰득!

창을 튕겨내듯 밀어낸 그는 대검을 역수로 쥐어 기병의 발을 갈라냈다.

이히힝! 공격에 울음을 터트리는 말. 네메린느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빠르게 말머리를 잡아 뒤로 빠졌다.

후욱.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늑대와 그 위에 탄 김윤은 대검을 휘둘러 횡으로 베어냈다.

정령의 몸으로 피 한 방울 흘릴 리 없던 그녀의 몸에 피가 터져 나왔다.

‘...!’

지난 수백, 수천 년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렌드로의 전쟁 1차 전투.

─청()팀의 4번 낭병(兵)이 적(赤)팀의 4번 기병(?兵)을 잡았습니다!

─적팀의 4번 기병은 영구 추방됩니다. *

─청팀의 4번 낭병은 회생 1회가 부여됩니다. *

─청팀의 4번 낭병의 능력치가 강화됩니다. (1/5) *

─청팀의 선공하에 낭병과 기병의 전투는 낭병의 무조건 승리로 판정됩니다.

─전투를 종료합니다.

­

[...제법이구나.]

다시 돌아온 네메린느의 거처.

그곳에는 체스판을 두고 앉아있는 두 명의 참여자가 보였다.

아까와는 달리 체스판에는 하나의 기병이 몸이 갈라진 체 쓰러져있었다.

그 기병은 머지않아 체스판 밖으로 강제 추방당했다.

“이 정도도 못하면 그냥 접어야지.”

그는 씨익 웃었다.

[...]

렌드로의 전쟁.

말을 움직여 상대의 기물을 하나씩 떨어트리고 최종적으로 왕을 잡는 게임.

하지만 일반 체스와 다른 점은 실제 전투를 ‘참여자’가 한다는 것이다.

마성, 프렉티아 렌드로가 직접 만들어낸 게임으로 참여자를 가상의 공간 속에 가둬 대결을 치르게 만든다.

당연하게도 기존의 가진 능력은 사용 불가능.

오직 그 공간 내에서 주어진 역할의 능력만 사용 가능하다.

기병은 말과 창술의 능력을,

낭병은 늑대와 대검의 능력을.

언뜻 보면 공정해 보이지만 숙련도나 전투의 익숙함에 있어서 실력이 천차만별이기 마련이다.

특히 이런 대전류 게임은 네메린느의 특기 중 하나였다.

[하.]

특히 ‘렌드로의 전쟁’은 다른 정령왕들과 수없이 많이 플레이해온 게임이니까.

그래서 당연히 지기는커녕, 말 하나라도 죽을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허무할정도로 첫 전투를 빠르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녀는 체스판 밖에 나동그라진 기병을 다시 한번 보더니 웃음이 터트렸다.

[하, 하하하하하핫!!!]

“?”

[끄끅끅…...]

한참을 웃던 그녀는 탈락한 기병을 집어 가루로 만들었다.

[...아, 미안. 너무 오랜만이라.]

“뭐 그럴 수 있지.”

[너무 이런 상황이 그리웠나 봐.]

그녀의 표정이 흐리 멍텅한 눈에서 진지한 눈빛으로 변했다.

“해도 되나?”

[물론!]

“그러면...”

나는 낭병대신 새로운 말을 집었다.

이걸로 농락하면 재밌으려나?

­

폭풍이 몰아치는 사막.

그 한가운데에 창을 든 기병, 네메린느와 거친 옷감을 둘러입은 궁병인 내가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부러질듯한 활은 토끼 하나 잡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 너, 미친 거냐?]

“난 제정신이야.”

[궁병으로 기병을 잡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약화’까지 건다고?]

네메린느는 이해 못 한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맞는 말이다.

궁병으로는 절대 기병을 이길 수 없다.

적어도 잡으려면 3단계는 업그레이드돼야 간신히 비빌 수 있는 정도.

그런데 스스로에게 약화 버프를 걸고, 전장 페널티까지 설정한 상태다.

궁병에게 필요한 장애물이나 높은 지대가 전혀 없는 장소.

미치지 않고서야 초반부터 이 지랄을 떠는 건 생뉴비도 안 하는 행동이다.

“잔말 말고 덤비기나 해.”

[허… 그래. 아주 찢어 죽여주마.]

무시당했다고 느꼈는지 녀석의 기운이 아주 흉흉해졌다.

고삐를 억세게 부여잡은 네메린느가 빠른 속도로 내게 달려온다.

말발굽에 사막의 모래가 비산하고 허공을 떠다니는 모래는 안개를 만들듯 시야를 가린다.

시야를 중점으로 두는 궁병의 기본 상대 법이다.

‘상대가 내가 아니었다면 말이지.’

파악.

가볍게 궁병의 기본 스킬인 백스텝으로 뒤로 물러선 뒤 화살을 발사한다.

1단계도 안된 궁병이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의 제한 횟수는 전투당 1회.

그걸 지금 쓴다.

[...!]

푸푹!

일순, 나의 활에서 쏘아진 화살이 말과 네메린느의 왼쪽 팔에 꽂혔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두 개의 화살 모두를 빼냈다.

살짝 피를 흘리는 것 외에 전혀 대미지가 없는 모습.

하지만 이미 화살을 맞은 순간부터 그녀의 패배는 확정되었다.

나는 옆구리를 스치는 창끝을 잡아냈다. 그대로 찢어지는 나의 손.

평소라면 생채기 하나 안날 몸이지만 매우 약해진 궁병의 손으로는 조금의 붙듬도 허용되지 않았다.

내 오른손을 찢어발긴 그녀는 창을 물 흐르듯이 휘둘러 한쪽 다리도 베어냈다.

다행히 완전히 절단되진 않았다.

“으아~ 아파라.”

[제대로 하지?]

기껏 올라왔던 기분이 축 처진 그녀는 창을 내 목 끝에 겨눴다.

[난 지금 당장이라도 끝낼 수 있어. 그러니 네가 준비한 것을 보여보라고.]

능력으로서 수많은 이점을 가진 네메린느는 언제든지 이 판을 끝낼 수 있다.

비록 ‘같은’ 능력에서는 지긴 했어도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경기, 그리고 진심을 다하는 경기에서는 질 일이 결코 없으니까.

이전 싸움도 네메린느가 진심으로 임했다면 나 역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원한다면.”

하지만 오히려 능력의 ‘우위’에 있다면?

─약화 페널티 ­3단계의 보상을 사용합니다.

─전장 페널티 ­4단계의 보상을 사용합니다.

─두발의 화살 적중 / 조건 충족이 완료되었습니다.

─1회성 스킬, 일점 저격술(4단계)를 사용합니다. *

[...!]

그극─!

이변을 눈치챈 네메린느의 창이 서둘러 내 목을 꿰뚫는다.

허나, 허공을 가르는 창.

이미 내 몸은 저 멀리 떨어져 있었고, 내 활은 드높은 기력을 내뿜으며 단 하나만을 목표로 노렸다.

파앗.

물고기처럼 헤엄치듯 뻗어나간 화살은 그 어떠한 보조 없이 쏘아진다.

[...미친.]

“안녕~”

푸─콱!

화살은 그녀의 심장을 뚫고 사막의 모래를 파고들었다.

­레드로의 전쟁 2차 전투를…

­

“...여긴.”

베린은 어둠에서 눈을 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공간. 하지만 베린의 눈까진 가리지 못했다.

“정령들이 사는 도시구나.”

베린의 주위로 어둠의 정령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갑작스러운 이방인의 등장에 잔뜩 경계를 가졌지만 그의 주위에 있는 같은 어둠의 정령을 보고 경계를 풀었다.

어둠을 바라보니 도시의 풍경이 자세히 보인다.

거대한 면 위에 높게 높게 올라간 거대한 탑들.

탑 곳곳에는 수많은 정령들이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자기 할 것을 하며 보낸다.

어둠이라는 인식이 좋지 않은 느낌에 비해 이곳은 상당히 평화로웠다.

“세피드를 만나야 하는데…”

어떻게 만나야 할까.

김윤은 그들의 앞으로 데려다줄 순 없고 스스로 찾아보라고 했다.

분명 김윤과 그 여자의 능력이라면 어떻게든 위치를 찾을 수 있을 텐데.

‘...이번엔 또 뭘 하려고 그러는 건지.’

­계약자.

“뭔 일이야. 다크.”

베린의 정령인 어둠의 정령, 다크는 까마귀의 깃털을 휘날리며 어깨에 앉았다.

­왕을 찾고 싶은 거야?

“어. 왕이 어디 있는지 알아?”

김윤의 말에 따르면 정령왕, 세피드는 다른 정령왕들과는 달리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그가 마음먹고 숨는다면 아무리 뛰어난 초월자들이라도 쉽사리 찾기가 어렵다고…

­찾았어.

“어?”

방금 생각이 무색하게 다크는 까마귀의 입으로 말했다.

­정확히는 그분이 우리를 초대했어. 얼른 가자.

“...초대?”

­

“안녕!”

“어… 안녕?”

어두운 오두막에 보랏빛의 은은한 조명이 켜지더니 미소를 짓는 여자아이가 보인다.

흑발에 자안을 가진 베린과 비슷한 정도의 나이 때.

꽤나 귀품 있는 복장을 입은 것이 꼭 귀족가의 영애를 보는 것 같다.

“앉아, 앉아.”

“...”

“아?! 혹시 이런 모습이라 믿음이 잘 안가나?”

...솔직히 좀 그렇다.

김윤이 보여준 문에서는 인간의 형태도 아니었고, 이렇게 순수하게 생긴 여자아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게다가 이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기운.

“?”

거의 무(無)에 가까울 정도로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을 읽은 듯 세피드라고 주장하는 아이는 미소 지었다.

“헤헤… 똑똑하네.”

“...아니라는 걸 인정한다는 거야?”

“아냐, 맞긴 맞아. 정확히는 절반 정도.”

“?”

또각.

자리에 일어선 그녀는 베린의 턱을 조심스레 잡아올렸다.

순간적인 이상행동에 그 즉시 옆구리에 찬 단검을 뽑아 들려 했으나.

“큭!”

“어허! 우리 집에선 무력행동 금지! 야.”

두 손을 교차시켜 X자를 표시하는 그녀는 과할 정도의 발랄함과 해맑음이 보였다.

베린은 전혀 움직이질 않는 단검을 포기한 채 그녀를 노려보았다.

“뭘 하려고.”

“별거 없어. 지금 너 말고도 다른 동료들도 이곳에 와있지?”

“...!”

“아! 걱정하지 마. 난 너희들 편이니까.”

“......”

폭.

어느새 베린의 허벅지에 앉은 그녀는 꼼짝 않는 베린의 뺨을 쓰다듬었다.

둘의 몸은 어린아이가 아닌 성인으로 변해있었다.

“...?!”

“요즘 들어 무~척 심심하거든. 그래서 나랑 좀 놀아줘야겠어.”

세피드의 손이 서서히 아래로 움직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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