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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7화 〉 9. 6번째 정령왕 (5) (177/318)

〈 177화 〉 9. 6번째 정령왕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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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의 시험.

말 그대로 정령왕들이 시련이나 시험 같은 걸 내려주어 통과하면 원하는 걸 들어주는 이벤트다.

과거에도 있었던 이벤트지만 난 해본 적이 없다.

아니, 해볼 수 없었다가 맞겠지.

‘애초에 정령왕을 찾지도 못했으니.’

정령왕은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고, 정령왕의 시험을 받았다는 이들도 굉장히 적었다.

그 수가 30명을 안 넘을 정도.

수억 명이 하던 게임에 비하면 너무 적은 숫자였다.

때문에 나는 정령왕들의 정보를 설정집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자세한 내용은 하페루아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네메린느가 심각한 심심함에 빠져있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그녀가 가장 흥미 있어 할 게임을 들고 와 승리했다.

따로 시험을 내주지 않았지만 내기에서 승리했다는 ‘조건’이 이벤트를 성립하게 만들어 주었다.

“...”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왜 정령왕들은 시험을 치루고 원하는 걸 이뤄줄까?

“하.”

단순히 설정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리나라는 선례가 있다.

“그만…”

어쩌면 눈앞에 이 ‘강아지’ 네메린느 역시 다른 설정이 아닌 스스로 그러한 선택을 할 수─

“그만! 그만해라! 인간!”

“뭐든 해준다며.”

“이, 이건 너무 하지 않느냐!”

개 수인 형태로 변한 네메린느는 멍멍거리듯 내 앞에 쪼그려 앉아 소리쳤다.

그녀는 불편한 듯 목에 걸린 특수한 고리를 만지작거렸다.

“좀만 그러고 있어봐.”

개 목걸이는 아니다.

아무리 내기에서 졌다고 해도 그 ‘위대한’ 정령왕이 그런 것까지 허락할 리가 없으니까.

저건 그냥 수인화(?人化)를 도와주는 도구다.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어색한 표정으로 연녹색의 기다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다른 한 손으로는 쫑긋 솟아오른 강아지의 귀를 만졌다.

녹안은 폭풍이라도 몰아치듯 거칠게 회전하고, 등 뒤에 달린 꼬리는 제멋대로 좌우로 움직였다.

‘비슷하네.’

고양이는 하나 있어서 개는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는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원판이 워낙 뛰어나서 그런가.

“여, 역시 이 몸을 이 상태로 덮칠 생각이구나! 그럴 줄 알았다!”

“왜, 기대라고 하고 있나 봐?”

“무, 무슨 소리를!”

그녀는 벌떡 일어나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다들 자리를 비운 네메린느의 거처.

게임이 시작될 때부터 정령들은 채림과 함께 빠져나갔다.

바람과 관련된 님프를 통해 편법으로 들어온 채림에게는 이곳에서 정령 계약을 맺으려고 했으니까.

아마도 지금쯤 네메린느의 수발을 드는 아래 정령들의 도움을 받아 협곡을 돌아다니고 있을 거다.

말하자면 지금 이 거처에는 단둘만 있다는 소리다.

“...정말 이 몸을 원하는 거냐?”

“반 정도?”

‘정령왕’과의 계약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과거 정령왕과의 내기를 해서 이긴 사람이 여럿 있었으나 계약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그런 정령왕과 계약한다면 전례 없던 업적이라며 보상을 퍼줄지도 모른다.

‘더 이상의 보상은 별로 의미 없지만.’

이제 ‘정령왕과의 계약’ 정도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내 뜻을 단단히 오해한 듯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반쯤 걸치고 있던 상의를 스르륵 내렸다.

“...알았다. 다른 때였으면 결코 하지 않을 테지만, 내 수를 완전히 파악하고 날 이겼기 때문에 해주는─”

“아니, 그거 말고. 계약하자고.”

“......”

“이중계약되지? 속성은 상반이 안돼서 별 무리 없이 될 거 같은데 아무래도 네 격이 너무 높아서 그대로 흡수될 가능성...”

“개자식.”

“지금은 너가 더 개, 아니 강아지 같지 않니?”

“나쁜 새끼.”

­

후웅.

“...내가 느낀 건데.”

“응.”

“네 머릿속에는 참 많이도 사는구나.”

협곡의 가장 높은 곳.

바람의 정령왕, 네메린느는 내 어깨에 앉아 팔짱을 꼈다.

지금의 네메린느는 미야 정도의 크기로 몸을 줄인 상태였다.

아, 물론 수인화는 계속 유지 중이다.

“...변태 새끼.”

“어허, 취향 존중해 주세요.”

“그보다 나처럼 희생자가 왜 이리 많으냐?”

네메린느는 내 머릿속에 존재하는 의식들을 보고 혀를 찼다.

지금 당장 내 머릿속 직통으로 말을 걸 수 있는 존재들만 해도 여섯이나 된다.

그중 넷은 내 통제를 받고 있는 터라 웬만한 상황이 오지 않으면 말을 걸지 않도록 하게 했다.

만일 통제 없이 그대로 뒀다면 내 머릿속은 시장통이 되었을 거다.

“...난 네 노예가 아니다.”

“알아, 정령왕님. 원할 때 언제든 말해.”

“...”

사실 네메린느는 김윤과 계약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흥미를 가지고 게임을 임했고, 생각보다 뛰어난 실력자인걸 알았지만 ‘내기’를 진 이상 원하는 걸 이뤄줘야 했다.

원래라면 계약은커녕 그저 적당한 보상을 주고 돌려보낼 생각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생각보다 패배의 여파가 쌔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수백 년 전 이후로 한 번도 안한 계약을 하다니.’

그 망할 것이 만들어둔 제약이 참으로 거슬리는 날이다.

“아, 아트리 히츠리야? 걔가 너를 안다던데.”

“아트리?”

그런 자가… 있긴 했지.

한 700년 전쯤인가…?

초월을 한 인간 치고는 노인의 모습을 취한 특이한 존재.

허나, 그 힘은 결코 가볍지 않아 잠깐 곁에서 관찰하기도 했다.

다른 세계에서 온 그는 자신과 같은 정령왕보다도 뛰어난 실력을 가진 남자였다.

그녀는 문득 자신이 앉아 있는 어깨의 주인을 바라봤다.

이 녀석과 비교한다면…

“글쎄.”

“?”

애초에 비교할 거리가 못된다.

그는 ‘스스로’ 차원을 넘었고,

김윤은 스스로 차원을 못 넘었으니까.

“꽤 강한 자였지. 헌데 그 남자를 왜 찾느냐?”

“네가 세계의 진실을 알려준다나 뭐라나 하던데.”

“...진실?”

딱히 알려줄게 있나?

이미 머릿속의 존재들을 파악한 바로는 네메린느가 알고 있는 것은 김윤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과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존재가 하나 있기에.

“내가 알려줄 건 없다. 내가 아는 건 네 머릿속에 있는 여자가 다 알 것이다.”

“뭐, 그래도 알고 있는 건 다 말해봐.”

“...되게 맡겨놓은 것처럼 말하는구나.”

“뭐든 한다고 했으면 그 정도라도 해줘야지.”

김윤은 꽤나 긴 이야기를 들었다.

최초의 속성, 정령의 탄생.

무(無)에 가까웠던 행성의 보은.

탄생한 생명들의 관리.

자신과 같은 후대의 양성.

외부의 개입과 ‘새로운’ 다섯 번째 정령왕의 탄생.

“...해서 지금까지 이어졌다. 뭐, 그 외의 자잘한 내용은 불필요한 내용이다.

“음.”

역시 하페루아가 전해준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는다.

커다란 뼈대에 살이 붙은 느낌?

확실히 당사자에게 들으니 더 선명한 느낌이다.

“...그런데 아까부터 뭘 하는 것이냐.”

“세피드의 탄생이 행성에서 솟아난 게 아닌 어느날 나타난 거라면, 그가 외부에서 온 초월자라는 얘기야.”

“그야… 그렇긴 한데. 그 검은…”

김윤의 손에 들린 검은 창백한 빛을 내뿜었다.

아까의 전투만 해도 그리 강하진 않아 보였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 빛이 꽤나 거대했다.

그가 말했다.

“세피드가 일으킨 ‘진화’를 만들려면 다섯 정령왕의 동의가 필요해. 그중 하나는 이미 구했고, 남은 4개가 문제인데…”

“아니.”

“애들로 충분하려나? 다른 애들은 몰라도 어둠쪽은 조금 위험할지─”

“잠깐!”

휘익!

바람이 움직이더니 어느새 김윤의 눈앞에는 바람의 주인이 노려보고 있었다.

“...설마.”

그녀의 눈은 빛을 내뿜은 강대한 검으로 향했다.

“그걸로 6번째 정령왕을 만들려는 것이냐?”

“응.”

“불가능하다.”

네메린느는 말했다.

“과거의 일은 이례적이었다. 세피드는 불의 정령으로 시작해 이그네아의 동의를 얻고 그 뒤로 여러 정령들의 동의를 받아 정령왕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건 잘못된 일이었다.

“애초에 정령은 정령왕이 될 수 없다. 만일 그녀가 외부에서 온 초월의 존재라는 걸 알았다면 당연히 동의해 주지 않았을 거다.”

“왜?”

“우리도 예상하지 못했다.”

당시의 우리는 정령왕이라는 특수성에 둔감해져 있었다.

일만년이 넘는 시간을, 아니 그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살아온 정령왕들은 행성의 초월적인 존재로 살아갔다.

행성을 가꾸고 생명체들을 돌봄으로써 그들은 스스로가 위대한 존재라고 지칭하기에 충분했다.

아니 그들이 스스로 그렇게 정의하지 않아도 그 아래의 생명체들은 그리 말했다.

그래, 그렇게 정령왕은 ‘위대한 창조주’로 불리다 이변을 마주했다.

마왕 제르노스와 여신 엘레노아의 탄생.

그들이 언제부터 행성에 있었는지 모른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강함과 위엄을 자랑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들은 행성의 주인들이라고 불렸다.

‘어드벤처 행성의 대립하는 두 신들.’

‘제 아무리 고위신이라고 해도 그 둘을 결코 넘을 수 없다.’

‘정령왕 역시 그 둘을 혼자서는 결코 이기지 못한다.’

새롭게 등장한 위대한 두 신(?)에 정령왕들은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왜?”

“...이미 깨달았거든.”

그 둘이 나오기 한참 전에 그들은 스스로 초월했고, 외차원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러니 이 조그마한 행성의 주인이니 뭐니 하는 것은 그냥 골목대장 놀이나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진짜 외부의 존재가 나타났다.

“...우리는 외부의 존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차원을 분리했다. 문제는 이곳에서 살아온 시간이 ‘정령왕’이라는 의미를 퇴색시켰다.”

더 이상 ‘위대한’ 정령왕이라는 이름을 잃은 그들은 정령왕의 이름을 가볍게 여겼다.

때문에 감히 정령왕이 되겠다는 치기 어린 하급 정령의 말에 동의를 해주었다.

그렇게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자신의 세력을 가꾸고 어둠의 정령왕이 되었다.

“......나는, 아니 우리는 멍청했어.”

“...”

“스스로 초월해 진실을 알았다고 떠들어댔는데, 막상 가장 중요한 건 몰랐더라고.”

정령왕의 ‘이름’을 말이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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