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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8화 〉 9. 6번째 정령왕 (6) (178/318)

〈 178화 〉 9. 6번째 정령왕 (6)

* * *

­

“헤헤... “

“...”

“어때? 기분 좋아?”

“...아니.”

“그래? 그럼 여기는?”

주물주물.

“안 좋아!”

베린은 짜증이 났다.

그런 걸(?)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게 뭐 하는 걸까.

“왜 화내. 이 귀여운 슬라임이 좋지 않은 거야?”

세피드는 주물럭 거리던 어두운색의 슬라임을 들어 베린의 앞에 가져다댔다.

슬라임은 브에에─ 거리며 세피드의 손에서 떨어져 베린의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다행히 옷에 뭔가 묻지는 않았지만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다.

“...빨리 시험이나 내줘.”

“시험?”

“어.”

정령왕의 시험을 받아야 정령과의 계약에서 더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당연히 정령왕과의 계약은 되지 않을 테니 자신의 계약 정령인 다크가 고위 정령급으로 올라가지 않을까?

세피드는 고개를 까딱 거리며 베린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너무 가깝다.

“뭐, 뭐.”

“흐흥~ 귀여워서.”

“...누가 할 소리를!”

벌떡. 베린이 일어서자 몸을 타고 흐르던 슬라임이 브엑─거리며 바닥에 철퍼덕 떨어졌다.

살짝 물러난 세피드는 여전히 그런 베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베린은 귀엽다는 소리를 듣기 싫었다.

비록 실제로 살아온 시간은 얼마 안 되지만 환각을 포함한다면 꽤나 많은 시간을 살아왔으니까.

동료인 김윤 혹은 김다윤과도 비슷할 정도의 시간.

하지만 베린은 여전히 어린 몸이었다.

올 때부터 고정되어버린 몸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늙지 않았고, 억지로 나이를 바꾸는 아이템을 사용해 봤자 자괴감만 들어 금방 빼냈다.

결국 아이템을 끼든 몸을 변신하든 원래의 몸은 어린 몸일 뿐이다.

때문에 베린은 귀엽다는 소리가 싫었다.

차라리 멋있다 라면 모를까.

‘...’

여전히 애는 맞나.

솔직히 나도 자기 자신을 잘 모른다.

현실에서 보낸 시간보다 환각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아 뭐가 진짜인지도.

“흐음~?”

옆자리에 풀썩 앉은 그녀는 깜짝 놀라듯 박수를 짝! 치며 말했다.

“누가 할 소리를?”

“...?”

“그 말은 내가 귀엽다는 거야?”

“어? 그야…”

귀엽게 생기긴 한데…

아, 아니 내가 이걸 왜 생각해.

잠깐 얼굴이 붉어진 것 같다.

아니, 안 붉어졌나?

확신할 수 없는 얼굴이지만 여기서 한 사람 정도는 답을 알 것이다.

“으이구~ 말을 그렇게 해도 아주 귀여워 우리 용사님?”

“...놔.”

“흐흫. 보자~ 우리 용사님이 원하는 시험! 내줄게!”

“진짜?”

“응!

파직.

싱긋 웃은 세피드는 허공에 곡선의 선을 그리듯 쭈욱 뻗었다.

그러자 그 선 사이로 슬라임들이 통통 튀어나와 바닥을 가득 메웠다.

“...뭐 어쩌라고.”

“어쩌긴?”

으짜.

슬라임을 하나 끌어안은 그녀는 전처럼 서서히 어려지더니 5살도 채 안 될 정도로 어려졌다.

그녀는 혀 짧은 말투로 말했다.

“술래자끼야. 요사.”

쑤욱!

“...!”

─날 찾으면 통과야~

어느새 사라진 오두막.

베린의 시야에 들어선 것은 어두운 들판을 가득 메운 슬라임 들이었다.

“젠장.”

­

화륵.

“하… 얘도 모르네.”

─좀 더 찾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

“나도 그러고 싶어…”

다윤은 지친 몸, 아니 지친 정신을 이끌고 ‘정원’을 돌아다녔다.

불의 정령왕, 이그네아를 찾기 위해 높은 계위의 정령들에게 위치를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아니, 그들 또한 몰랐다.

다른 정령왕들과 달리 이그네아는 한 장소에 머물지 않고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

물론 과거에는 으리으리한 궁궐을 지어 살기도 했으나, 최근 몇백 년은 노숙을 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왜 정령왕이 노숙을 하는 거냐고…’

오래 살면 특이한 경험을 해보고 싶어지는 모양이다.

─우움… 더 이상 높은 정령은 없는 것 같은데?

슬라임 형태를 가진 불의 정령은 다윤의 머리 위에 통통튀며 정신을 사납게 했다.

하지만 이미 며칠째 이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이런 장난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

“왔어?”

“진짜 짜증나게 하네 이것들.”

이랑은 백색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크리며 자신의 쪽으로 걸어왔다.

행성에서도 손꼽히는 고위신의 자식이자 두 개 이상의 게임을 해온 반(半) 초월자.

어찌 보면 정령왕보다도 강할 수 있는 그녀지만 지금은 그냥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싹다 불태워 버릴까.”

“불의 정령이라 타도 멀쩡할걸…”

“후우…”

불과 2년 전만 해도 분위기 있고 기품도 제법 느껴졌었다.

그런데 베린과의 접점이 잦아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몸뿐만 아니라 실제로 어려진 것처럼 변했다.

물론 그 모습도 나쁘지 않고 꽤나 잘 어울려 귀엽게 보고있다.

“수확은?”

“당연히 모른대. 왕님은 자신 같은 아래 정령에게 말을 안건 다나 뭐라나...”

분홍빛의 불꽃으로 온몸을 두른 이랑은 갑자기 하늘로 훅 비상했다.

갑작스러운 이상행동에 따라가보니 어딘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왜? 저기 뭐 있어?”

“...아니, 착각인가.”

이랑은 눈썹을 찡그리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 녀석이 있을리가 없지.

이제 와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웃기고 말이다.

“가자, 이러다 평생 헤매겠네.”

“후우~ 윤 씨는 바로 찾았겠지? 빨리 찾아서 같이 다니고 싶은데…”

“...”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녀는 두 눈에 아른거리는 두개의 뿔을 이내 지워버렸다.

­

“안된다니까!”

“왜, 안돼.”

“하아…”

땅의 정령, 스틸의 영역이자 서쪽의 ‘태산’이라 불리는 곳.

그곳에 나와 네메린느가 입성했다.

기운을 감추긴 했으나 꽤나 주요인물이 둘이나 들어왔음에도 대지의 영역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태산에는 대지의 영역답게 바위 골렘처럼 생긴 정령들이 많이 돌아다녔다.

“하아… 한번만 설명할 테니 잘 들어라.”

네메린느는 몸을 키워 내 앞에 바로섰다.

여전히 수인화의 목걸이를 걸고있는 것이 사실 마음에 들어야 하는 게 분명했다.

“...정령왕이라는 것은 단순히 속성을 지닌 정령들의 왕이기에 그리 불리는 것이 아니다. ‘정령왕’이라는 특수함과 그 무게가 우리의 격과 외부로부터의 통제를 최대한 억제하는 것이지.”

“음.”

“과거에는 이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정령왕이라는 직함을 거리낌 없이 내어주었어.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의 격이 격하 당했고, 과거의 우리보다 현저히 약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심각할 정도로 약해진 건 아니지만 과거와 같은 힘을 잃은것도 사실이다.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도 있다. 정령이 정령왕이 된다는 것은 수만 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기에 ‘한번 해볼 테면 해봐라’라는 식으로 동의 한것도 있지.”

“안일했네.”

“.......그래. 그래서 더더욱 이다음은 안돼.”

내 멱살을 쥐어잡듯 바짝 붙은 그녀는 으르릉 거리며 나를 노려봤다.

“나는 너의 계약자로서 뜻을 존중해 줄 거다. 허나 다른 정령왕들은 아니야. 그들은 단 한 명도 동의해 주지 않을 거다.”

“세피드는?”

“자신이 어떻게 됐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아이 일텐데 허락을 해줄까?”

정령왕의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 힘이 약해진다.

그 이점을 이용해 정령왕에 오른 녀석이라면 당연히 거부하겠지.

“...그런데 반대로 말하면 수가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더 완벽해지는 거 아니야?”

“가족이니까.”

네메린느는 말했다.

“완벽해지자고 가족을 해칠 일은 없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미소지었다.

“좋아.”

“...난 안 좋다. 계약자.”

“이름으로 불러줘.”

“...별걸 다 요구하는구나. 그래, 김윤. 생각을 바꿀 마음은 없느냐?”

“응.”

아쉽지만 히아트의 ‘진화’는 해줄 생각이다.

이미 선입금을 받았고 말이다.

먹튀하면 그만이지만 의뢰라는 게 신뢰가 중요하기도 하고, 이번 일이 잘되면 두배 받을게 30배 정도로 떡상하는데.

‘이걸 그만두면 멍청이지.’

무엇보다 이쪽이 좀더 재밌다.

“하아…”

“한숨 좀 그만 쉬어.”

“네가 한숨을 쉬게 만들지 않느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다시 몸을 줄여 어깨에 안착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녀는 이윽고 고개를 들어 저 멀리의 산봉우리를 바라봤다.

“스틸은 무(?)를 좋아하는 남자다. 정령왕 중에서도 힘으로 그를 이길자는 없지.”

“...”

“녀석의 동의를 구하려면 적어도 나처럼 힘으로 꺾어 이겨야 한다. 만일 마법이나 그 외의 네 마법 검술로 이겨봤자, 패배는 시킬지언정 동의는 구할 수 없을 거다.”

얘기는 들었다.

주먹을 한번 휘두르면 산이 부서지고 바다가 갈라지는, 말 그대로 ‘대지’의 신이라 불리는 존재.

행성에는 대지와 관련된 고위신들이 제법 있지만 스틸과 비견되는 자는 단 하나도 없다.

그만큼 스틸을 강했고, 또 강대했다.

“듣자 하니 네 동료들이 동의를 구하러 다닌다고 하던데... 네 동료들은 얼마나 강하지? 다들 너만큼은 하는 거냐?”

“다들 밥값은 하지.”

어지간한 고위신 정도는 충분히 이길만한 정도.

문제는 딱 거기까지.

아무래도 정령왕을 1대1로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이들이 대다수 일 거다.

“...그런데 동의를 구하겠다고? 차라리 너 혼자서 움직이는 게 낫지 않겠느냐?”

“아니.”

나는 네메린느의 바람을 이용해 빠르게 중심지로 날아갔다.

휘몰아치는 바람이 창공을 갈랐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혼자서 할 거면 애초에 데려오지도 않았어.”

녀석들은 다 제 일을 해낼 걸 알기에 그곳에 배치한 거다.

동료들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까.

“다들 힘은 좀 부족할지 몰라도 계속해서 노력하고 성장하고 있어.”

처음 만날 당시의 그들.

그리고 2년전의 그들

그리고 지금.

다들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그리고 앞으로 더 강해질거다.

내 생각을 대충 읽은 듯 네메린느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렇다고 한들 여전히 정령왕은 이길 수 없다. 노력한다고 해도 힘이 부족하면 한계를 마주하기 마련이다.

“그런가?”

“게다가 스틸은 다른 애들과 단순하─”

─냐아아아아아!!!

귀를 찢는 고양이 울음소리가 네메린느의 뒷말을 잡아먹더니, 태산에 지진이 일어나듯 땅이 흔들렸다.

쩌적─ 거리는 선명한 굉음과 함께 갈라진 산봉우리 너머로는 너덜너덜해진 스틸이 보였다.

네메린느는 떡 벌어진 입으로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

“아! 근데 예외는 있어서.”

레빗은 이미 완성형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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