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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9화 〉 9. 6번째 정령왕 (7) (179/318)

〈 179화 〉 9. 6번째 정령왕 (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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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 전 서쪽의 태산.

“여기가 정령왕의 거처...”

레빗은 몸을 숨긴 체 스틸의 거처로 침입했다.

가능하면 정정당당히 들어가는 게 맞지만 은밀히 들어갈 수 있는데 굳이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닌자 냥이다냐.’

게다가 은신과 암행은 레빗의 아이덴티티.

김윤은 자신에게 정령왕의 시험을 이기기만 하면 된다고 했으니 뭘 하든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도도도도도­!

레빗은 발을 빨리 굴려 미로 같은 거처의 중심부로 달려갔다.

당연히 저 도도도 거리는 발소리는 레빗을 제외한 그 누구도 듣지 못했다.

‘도착이다냐!’

휘릭!

고양이 모습을 유지하던 레빗은 수인으로 변신하며 스틸의 뒤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이대로 깜짝 놀래켜서 승리를 노려볼 생각이었다.

고작 놀래키는 정도로 무슨 승리를 논하냐 할 수 있지만, 제 영역에 칩입한 것도 모른 체 뒤까지 잡힌 상황이라면.

무(?)를 중시하는 정령왕의 입장으로선 패배라고 생각할 수 있다.

“...”

손만 길게 뻗으면 닿을 자리.

20살 후반쯤의 남자는 여전히 파악하지 못한 듯 푹신한 방석에 앉아 명상을 하고 있었다.

한 발자국.

레빗이 발을 뻗자마자 갈색의 머리칼이 꽤나 잘 어울리는 그가 황금색의 눈을 떴다.

‘히히... 깜짝 놀랐..?!“

“쥐새끼가 들어왔나 했더니.”

스윽.

거대한 바위를 닮은듯한 두 눈이 허공에 바둥거리는 레빗을 바라보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군.”

“놔라냥!”

“칩입자가 너무 당당하구나.”

콰앙!!

스틸의 손이 조금 까닥이더니 무형의 힘에 묶여있던 레빗이 그대로 날라가 벽면에 처박혔다.

마치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건물의 한쪽 벽면이 부서졌지만...

‘...!’

“왜 던지냥!”

“...어째서 멀쩡하지?”

전력을 다한 건 아니지만 팔다리를 못쓰게 만들 생각으로 던진 것이었다.

그런데 저 고양이 수인은 너무나도 멀쩡한 모습으로 잔해 속을 걸어 나왔다.

그렇다면 염력에 벗어나지 못하고 아둥거리는건 대체 뭐였지?

스틸이 눈앞에 나타난 강자의 정체를 유추하는 사이, 레빗은 표정을 찌푸리며 당근 꼬치를 베어물었다.

“뭐, 뭐 하는거냐.”

“응? 힘써서 간식 먹는다냐.”

레빗은 뭘 그런걸 물어보냐는듯 대답했다.

그녀에게 조금의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

그런 그녀의 모습에 스틸은 반드시 싸워보고 싶다는 호승심을 느꼈다.

“나와 싸우러 온 것이냐.”

“싸워?”

싸우로 왔던가?

레빗은 다 먹은 꼬치를 질겅거리며 툭 바닥에 뱉었다.

“뭐... 내기를 이기러 왔으니, 싸우로 왔다냐.”

“그렇다면.”

펄럭.

자리에서 일어난 스틸은 자신의 무구를 꺼냈다.

거대한 크기의 대지를 압축시켜 만든 정령왕의 창.

어지간한 영웅의 무기나 고위신의 무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격이 다른 무기다.

갈색빛의 화려하진 않지만 나름 특이한 형상을 지닌 모습에 레빗의 눈빛이 움찔거렸다.

역시 이 무기의 힘을 눈치 챘군.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전투를 받아주지. 싸움을 시작하기 앞서─”

콰훅.

순간, 하늘이 잠시 어두워졌다.

"...어?"

콰아아아아아아앙!!!!!!!

성처럼 거대한 스틸의 거처가 한순간에 박살 나고 그의 창은 공격의 절반의 절반도 막지 못한 채 고꾸라 졌다.

이윽고 성을 중심으로 거대한 지진이 일어났다.

­

“...그렇게 된 거다냐.”

“......힘 좀 살살 쓰지.”

레빗은 자신의 주인의 말에 머리를 긁적였다.

의도치 않았다.

그래도 간만에 제대로 된 상대와 붙는 만큼, 적당히 공방을 치러줄 셈이었지만...

‘그 창은...’

쿠베라와 비슷한 창을 본 순간 힘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냐. 쿠베라의 창이 생각나 그때처럼 힘을 써버렸다냐.”

“...음.”

확실히 쿠베라와의 그 기나긴 수련이 힘들긴 했지.

당시 나와 레빗이 십수 년간 기절을 반복하며 수련해왔다.

쿠베라는 우리의 편이었고 초월을 깨우치게 도와준 장본인이었지만 짜증 나긴 했다.

할 때마다 이게 훈련인지 그냥 처 맞는 건지 의문이 들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몸을 원래 크기로 돌린 네메린느는 쓰러진 스틸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죽었나?”

“...죽을 리가 없지 않느냐. 정령왕은 자신의 속성을 가진 정령이 모두 죽기 전까지 죽지 않는다.”

“오.”

그건 몰랐는데.

정령왕에게 '자연'은 자신의 정령들 인가보다.

예를 들어 바람의 정령왕인 네메린느는 모든 바람의 정령들이 죽기 전까지 무슨 수를 써도 절대 죽지 않는 것이다.

언뜻 보면 불멸이라 볼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자연신들이 죽고 부활하면 지배하고 있던 자연과 힘이 줄어드는 것처럼,

정령왕 역시 자신의 정령들과 힘이 줄어들 테니까.

그 아래 정령들에게는 불합리한 처사 같지만 애초에 그들이 없었으면 존재하지도 못 했을 이들이니.

그리고 정령왕이 개복치처럼 쉽게 죽는 자들도 아니고 말이다.

“...정확히는 죽기 직전이군.”

“쿨럭, 커억,커,커억...”

“스틸, 정신 차려라.”

“흐악... 네메... 린느...?”

“그래 나다. 몸은 추스를만 하나?”

그녀는 바람을 스틸의 몸에 둘러주며 상처를 치료했다.

대체 뭔 짓을 해놨는지 스틸의 오른 팔은 아작나 있었고, 복부에는 주먹만 한 구멍이 나있었다.

초월적인 존재인 정령왕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죽었을 상처.

“뭘 쓴거야?”

“별거 안 썼다냐. 그냥 두 대 때렸다냐.”

김윤과 고양이 수인은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이제 와서 보니 조금 오싹하기도 했다.

특히 저 고양이... 고양이?

콰악!

“잠깐! 설마 저 고양이 때문에 나한테 이걸 건 것이냐?”

“응, 밸런스가 맞아야 보기 좋잖아.”

“자, 잠깐 네메린느 살, 살 좀...!”

“...”

네메린느가 너무나도 뻔뻔한 그의 얼굴을 보고 질린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어쩌다 저런 인간하고 엮이게 된 건지.

차라리 세피드 때가 100번은 낫다.

“됐어. 이제 이 정도면 자가 치유력이 있어서 금방 나을 거야.”

네메린느는 손을 탁탁 털며 일어났다.

잠시 고통에 절어있던 그는 온몸을 휘감는 바람을 느끼더니 이내 상체만 일으켜 세웠다.

“...네메린느.”

“어.”

“그새 취향이 바뀐 거냐? 900년 전에는 토끼이이이익! 팔팔!”

따사하게 온몸을 감싸던 바람이 날뛰자 스틸의 상처 역시 날뛰었다.

바람을 다스리던 네메린느는 붉어진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입, 닥쳐… 스틸.”

“그, 아, 알았다. 네가 3600년 전에 젖소 코스프레를 한 것은 비밀…”

“그냥 죽어.”

그 뒤로 스틸은 무려 세 번이나 죽음의 경계선을 왔다 갔다 했다.

­

“...정령왕?”

죽음에서 돌아온 스틸은 아래 정령들의 요양을 받으며 우리를 바라봤다.

흰색의 침대위 탁자에는 과일 바구니가 산적히 있었고, 건물 아래로는 흑흑 거리는 정령들이 보였다.

“교주야?”

“아니, 왕님을 너무 사랑하는 것뿐이다.”

“그 왕님이 넌데.”

정령왕들은 왜 이리 뻔뻔 한건지.

내가 중얼거리자 네메린느는 ‘누가 할소리를’ 이라며 같이 중얼거렸다.

...저건 나중에 과거에 했던 코스프레도 시켜야겠군.

“그래서 정령왕을 만든다는 게 무슨 소리냐, 네메린느.”

“나도 몰라~ 계약자님이 그렇게 하고 싶으시덴다.”

“...그렇게 가벼이 말할 사안이 아니다.”

잠깐 병동에 냉기가 흘렀다.

네메린느 역시 진지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알아, 하지만 너도, 나도 내기에서 압도적으로 패배한 탓에 거절할 수 없어.”

“...”

“그리고 나도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결과적으로 세피드의 동의를 받을 수 없어서 우리가 해도 결국 되지는 못할 거야.”

세피드, 어둠의 정령왕.

그리고 외부에서 온 초월자(???)다.

아무리 이들이라고 해도 그녀를 압도적으로 이기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과거에 그녀가 정령왕이 되고 모두를 압도했던 것처럼.

“...확신하나?”

“아니. 그래도 믿어야지.”

그녀가 나를 돌아본다.

“700년 만에 맞이한 계약자가 우리를 이용해 먹으려는 '악인'일지, 아니면 반강제로 처박힌 이 무기력한 감옥에서 꺼내줄 '구세주'일지.”

“...”

“지켜봐야 알겠지.”

“그런가.”

“응.”

스틸은 잠시 돌아온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우리 쪽을 바라봤다.

잠시 관찰하듯 시간을 보낸 그는 다치지 않은 손을 들었다.

[나, 대지의 정령왕이자 태산의 주인, ‘스틸’은 6번째 정령왕 ‘히아트’의 빛의 진화에 동의한다.]

스륵.

그의 선언(??)과 함께 심장에서 갈색빛의 마력이 흘러나와 내 검에 스며들었다.

「─」

두 정령왕의 동의를 모으자 생긴 그 힘의 실체가 아주 조금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택도 없네.’

고작 이 정도로는 뭘 하지도 못한다.

그래도 이 정도면 순조로운 시작이겠지.

“다음은 어디로 갈 거지?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아리아 쪽이 좀 더 나을 거다. 이그네아는 자기 영역에 없을 수도 있다.”

“...”

“게다가 스틸의 동의도 얻었으니 상성상 아리아 쪽이 좀 더 낫─”

“불 쪽으로 간다. 물은 그다음이야.”

아리아는 그 둘이 있으니 충분하다.

이런 날을 위해 베타에게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어갔으니까.

오히려 힘이 부족한 곳은 불이나 어둠 쪽이다.

네메린느는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세피드 쪽이 위험하다 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녀를 제일 마지막으로 가려는 것 같구나.”

“힘이 부족한 거지 밀린다는 소리는 아니니까.”

이미 완성형인 레빗을 제외하고 다들 둘씩 보냈는데 베린만 혼자 보낸 이유가 있다.

아마도 녀석이면 그 이유를 찾아냈겠지.

전투에서 이긴 레빗은 스틸과의 계약을 완료했다.

다만 부상을 꽤나 입은 터라 네메린느 처럼 같이 다니지는 못하고 정신만 따로 다니기로 했다.

잠시 휴식을 취한 우리는 그대로 이동해 불의 정원으로 향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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