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80화 〉 10. 이루어질 수 없는 (1) (180/318)

〈 180화 〉 10. 이루어질 수 없는 (1)

* * *

­

이그네아는 불의 정령왕이다.

언제부터 그가 불의 정령왕이 되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처음 눈을 떴을 때부터 그는 불 그 자체 였고.

“네가 마지막이야!”

“...'속성'을 가진 개체는 우리가 다인가.”

“그렇지. 우리와 비슷한 힘을 가진 생명체는 이게 다야.”

자신과 같은 이들을 만났다.

그들은 각자 바람의 '네메린느', 대지의 '스틸', 물의 '아리아'라고 불렸다.

그중 파란 보석처럼 아름답고 반짝이는 아리아가 물었다.

“넌 아무래도 '불'의 생명체인 것 같은데. 이름이 뭐야?”

이름.

'불'은 고민했다.

자신이 불이라는 속성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 외에 것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름이라는 것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름.

자신을 다른 이들과 구분할 수 있는 의미이자, 존재를 확실시할 수 있는 매개체.

그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이름을 생각해 냈다.

“...이그네아.”

그렇게 불은 '이그네아'가 되었다.

“어울리는 이름이네.”

물의 아리아는 웃으며 그리 말했고.

“난 이프리트가 더 어울릴 것 같았는데.”

바람의 네메린느는 퉁명스럽게 그리 말했으며.

“나쁘지 않은데?”

대지의 스틸은 팔짱을 끼며 그리 말했다.

이그네아는 분명 이들을 처음 봤음에도 굉장한 친근감이 들었다.

왠지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된 느낌.

떼어내래야 떼어낼 수 없는 사이.

그러니까 마치...

“가족?”

“““...”””

이그에나의 벙쪄있는 말에 세 속성은 떠들던 입을 다물고 그를 쳐다보았다.

혹시 실수라도 한 것일까?

어쩌면 나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이제 처음 만난 주제에 저들의 유대에 끼어드는게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아닐까.

그런 우울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그때.

파악! 하는 소리와 함께 다부진 스틸의 팔이 이그네아의 어깨를 둘렀다.

“그래! 형제여! 역시 너도 그렇구나! 그치 형제들?”

“왜 형제들이야? 나랑 아리아는 여자니깐 남매겠지!”

“...유치해.”

스틸과 네메린느는 말싸움을 하고 아리아는 머리가 아픈 듯 손을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좋은 반응들 인가.

“이그네아.”

“어, 어?”

“일어나 봐”

그는 한 겨울처럼 차가운 아리아의 말에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이그네아의 팔뚝을 더듬더듬 만지더니 거리를 붙여 천천히 관찰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리아는 절세미인이었지만 가족애 외에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 정령 」

이유는 모른다.

그냥 그랬다.

한참을 만지작거리던 아리아는 손을 떼었다.

그리고 그 손은 자신을 향했다.

“...역시.”

“?”

“스틸 말대로 나쁘지 않아.”

싱긋 웃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지만.

「 정령 」

그랬다.

­

100년.

처음 마주한 '가족'과 함께 살아온 시간.

척박한 행성을 살아가는 평범한 생명체가 장수해야 간신히 도달할 시간.

허나 우리들은 조금도 늙지 않았다.

“스틸 이 새끼야! 네가 네 땅 다 뒤집어놨지!”

“뭔 소리야. 내 땅은 동쪽...”

“동쪽이 내 땅이라고! 너는 서쪽이잖아!”

“아...”

산이 빼곡히 늘어선 땅에 씩씩거리는 네메린느와 큰 충격에 빠져 식은땀을 흘리는 스틸이 보인다.

저 남매는 맨날 싸우는구나.

“아니, 동쪽이나 서쪽이나 비슷...”

“정반대인데 뭐가 똑같아, 그냥 죽어!”

“야, 좀만 진정...”

땅이 날아가고 산이 뒤집힌다.

행성을 가꾸는 초월적인 존재라고 하기에는 그렇지 못한 인성.

그들의 여파에 스틸이 잘못 탄생시킨 동식물들이 죽어나간다.

한참을 싸우던, 아니 일방적 폭행을 치르던 네메린느는 씩씩거리며 부서진 땅을 이쁘게 꾸민다.

“내 '안뜰' 망치지 마. 다음에는 이 정도로 안 끝내.”

“...그래...”

바닥에 풀썩 앉은 스틸을 팅팅 부은 눈덩이에 달걀을 굴렸다.

저 남매는 잊을만하면, 아니 잊기도 전에 싸우지만 그리 이상하진 않다.

'남매'라는 것은 결국 가족이니 싸워도 미운 정이 들며 서로를 아껴주니까.

결코 서로를 해하거나 필요 이상의 감정을 가지지 않는다.

‘...’

「 정령 」

그럼, 나는?

­

시간이 좀 더 지났다.

한 3000년 정도.

“...”

길다.

너무 길다.

하나의 영혼이 살기에는 너무나도 긴 시간.

변화를 겪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은 시간.

“스틸 개자식아아아아!!!”

“아! 미안하다고!!”

근데 저 남매는 전혀 바뀌지 않는다.

마치 '변화'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듯.

‘...나도 마찬가지인가.’

분명 처음 아리아를 만날 때의 나와,

3000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같은 마음이다.

헌데, 어째서.

“이그네아.”

「 정령 」

“...아리아.”

“남쪽의 불이 각지에 퍼지고 있어. 아마도 네 불꽃이 통제가 잘 안되는 것 같은데...”

그녀가 말한다.

“...피해가 좀 있어. 이대로 가면 네메린느나 스틸 쪽에도 영향이 갈 것 같은데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허나 들리지 않는다.

그녀가 무어를 말하든 이그네아는 아리아의 얼굴만을 보고 있었다.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문제가 있으면 나나 다른 가족들에게 기대. 너는 너무 모든 걸 혼자 하려는 경향이 있어.”

멍하니 듣던 그의 귓속으로 단 하나의 말이 들려왔다.

내게 기대라.

비록 아리아는 자신을 포함한 '가족'에게 기대라는 말이었지만.

“...”

그에겐 의미가 달랐다.

“?”

어느새 이그네아는 아리아의 곱고 여린 팔목을 잡았다.

생각보다 작았구나.

어찌 이걸 3000년간 몰랐을까.

“왜, 뭔 일 있어?”

그녀가 묻는다.

그래, 지금이라면.

“난…”

「 정령 」

“...”

“? 심리적으로 피곤하면 잠시 잠을 취해도 돼. 네 일은 내가 대신해줄 테니까.”

“...아냐. 신경 써줘서 고마워.”

“고맙긴.”

그녀가 웃는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미소지만 이그네아의 마음은 지하 끝까지 추락한다.

“가족인데 뭘.”

아프다.

너무 아파.

­

그날 이후 이그네아는 남매와 그녀에게 '가족'으로서 다가갔다.

자신이 먼저 합류했으니 누나라고 부르라는 네메린느는 현재 무엇을 하고 무엇을 생각할지 단번에 알 정도로 친해졌고.

형제를 외치며 무(?)를 갈고닦는 데에 흥미를 느끼는 스틸을 따라, 수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련에 매진하기도 헀다.

그리고.

“잘 했어.”

그녀는 여전히 그대로다.

그녀는 나를 '가족'으로 대했고,

나 역시 그녀를 '가족'으로 대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 정령왕 」

이 빌어먹을 힘은 더 강해졌다.

더 이상 그녀를, 아리아를 향한 감정이 무뎌졌다.

허나 무뎌졌다고 사라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때보다 훨씬 아팠다.

마치 한계를 명확히 드러내는 것처럼.

넌 안된다는 걸 확고히 주장하는 것처럼.

“네 부탁... 인 걸.”

“덕분에 차원 분리가 쉬워졌어. 이제 더 이상 외부 차원의 존재에게 놀아나지 않을 거야.”

이미 놀아나고 있어.

“으음~ 오랜만에 다들 모여서 파티나 할까? 스틸이 수련을 끝냈으려나?”

내가 같이 있고 싶은 건 너 하나야.

“바비큐 파티는 어때? 네 불을 이용해서 모든 각도에서 불을 지펴서­ 이그네아?”

“...”

“왜 갑자기 끌어안고 그래. 표정은 또 왜 그러고.”

“...”

「 정령왕 」

그녀는.

여전히.

­

차원이 분리되고 초월을 깨우친 이들은 조금씩 변화했다.

가장 변화가 심한 건 네메린느 였다.

[다 꺼져...]

녀석은 심심함을 견디지 못하고 이짓 저짓을 반복했다.

어느 날은 수인처럼 변하더니, 또 어느 날은 사냥에 나선다.

그 다음날은 게임을 주구장창 하고...

[수련 중이다.]

가장 변하지 않은 건 스틸이다.

그는 여전히 수련을 했다.

초월을 하고 진실을 알았음에도 오히려 더 수련에 매진했다.

더 높은 곳으로 향하기 위해.

그는 계속해서 수련에 정진했다.

그리고 그녀는...

[바다 쪽은 이상없어.]

그대로다.

아니, 그대로인 척했다.

그녀 스스로 조차 의심하는 것이다.

'설마 일만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살아온 가족이 자신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평소같이 이그네아를 대하며 그의 마음을 회피했다.

“제길…”

이런 걸 바란 게 아니다.

변화가 있기를 바랐지만 이런 변화를 말하는 게 아니었어.

힘은 강해지고 육체는 초월에 달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제약'은 여전히 남아 우리를 강하게 압박한다.

도대체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건가.

이대로 고통받길 원하는 건가? 대체 뭘 위해서?

“으앗!”

쿠당탕!

“?”

“하핫... 안녕?”

그때, 검은 머리의 자안(??)을 가진 어린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령왕인 자신이 허락해야만 들어올 수 있는 왕의 집무실에.

감히 고위 정령은커녕 하급 정령인 주제에 이곳에 들어오다니.

당장에라도 쫓아내야 했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고통받고 있구나?"

"...!"

절대로 나와서는 안되는 말이 저 입에서 튀어나왔다.

검은 머리의 아이는 싱긋 웃으며 보석같은 두 눈이 둥글게 휘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평범한 하급 정령처럼 보였는데, 이제는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 보인다.

아이는 살포시 이그네아의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

"도와줄까?"

“뭐?”

“걱정마, 이그네아. 그녀를 네 손에 얻게 해줄게.”

아이의 자안이 화려한 빛을 내며 반짝인다.

그런 아이의 말에 이그네아는 울컥했다.

헛소리하지 말라고,네 까짓 게 함부로 말할 그녀가 아니라고.

당장 입 밖으로 내뱉고 싶었지만.

“...”

현실은, 쿵쾅거리는 이 심장을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었다.

만일 정말로 가능하다면.

가족이라는 개 같은 법칙에서 벗어나 그녀와 사랑을 나눌 수 있다면.

[날 정령왕으로 만들어. 그럼 그녀와의 경계가 더욱 허물어질 거야.]

저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

그래, 그랬지.

우리는 가족이니.

그런 감정은 허락되지 않는다.

"...아리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대로 순응하며 살아야 하나?

아니다.

「▼정령─ 」

"곧... 만나러 갈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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