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화 〉 10. 이루어질 수 없는 (4)
* * *
하나의 선이 번개로 가득 찬 공간을 갈라내고 영역을 단절시킨다.
단절된 영역은 양쪽에서 파고드는 물과 번개의 칩입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았다.
[오호…?]
어둠으로 몸을 감싼 세피드는 허공에 떠 이 상황을 유유히 지켜보고 있었다.
‘바다’ 한복판에 와있는 그녀지만 어둠을 이용한 차원 분리를 통해 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저 선을 그어낸 자와 비슷한 기술.
허나 세피드의 차원 분리는 그녀보다 훨씬 격이 높은 기술이었다.
‘...그래도 반(半) 초월자 치고는 꽤나 쓸만해. 나중에 완전히 초월해 다시 한번 저 기술을 쓴다면…’
하나의 월광이 만들어낸 기술을 상상한 세피드는 순간 오싹함을 느꼈다.
허나 아직은 도래하지 않은 미래.
지금 당장은 그저 초월자 껍데기를 걸친 우물안 개구리에 불과하다.
[짜리리리….릿...릴릿….]
[으에?]
[우으으으으에에에...]
파드드득!!!
[...저건 좀 신기하단 말이지.]
반 초월자도 아닌 존재가 진짜 초월자의 힘을 사용한다.
심지어 이레귤러도 아니다.
그런데 마력 제어기 좀 건드렸다고 이름 모를 초월자의 힘을 끌어쓰고, 특이점을 사용한다.
「▲─ 」
아마도 저 비상적인 힘에 뭔가가 있으리라.
세피드의 시선에는 온몸에 푸른색과 하늘색의 스파크로 가득 찬 여인이 있었다.
머리는 아리아의 것처럼 허리까지 올 정도로 길어졌고, 눈에는 거대한 전류를 담은 듯 보기만 해도 짜릿한 시선이 느껴졌다.
마치 3개의 뿔처럼 솟아난 백청색의 창은 그녀가 알고 있는 초월자의 무구다.
물과 번개의 신, 네르토르.
스스로 초월해 온전한 제힘을 얻게 된 초월자지만 두 개 이상의 차원을 넘을 정도는 아니다.
외부 차원을 기준으로 한다면 오히려 한참 약한 수준.
그러나 지금 저 창은 그 ‘네르토르’의 무기나 맞나 싶을 정도로 강한 위력을 내뿜었다.
문제는.
‘대체 어떻게 되먹은 몸뚱어리야?’
더 놀라운 건 저만한 힘을 몸에 담고 있음에도 전혀 몸이 부서질 기미가 안 보인다는 것이다.
이상이 생긴 건 그녀의 정신뿐.
그 외의 육체나 영혼의 주체가 흔들리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영혼의 격이 그리고 높아 보이지도 않는데.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든 건가? 그렇다면 누가?’
세피드는 의문에 잠겼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도망자.
변방 행성에서 모습을 숨긴 채 힘을 기르는 중인 상황에 굳이 외부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신경을 안 쓴다고해도 이곳의 주인은 꽤나 높은 수준의 초월자니까.
‘장난’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세피드!!!]
쩌적─
허공의 번개가 일순 갈라지더니 화염을 두른 남자가 튀어나왔다.
얼마나 급하게 이곳에 도달했는지 몸의 절반 이상은 까맣게 물들었고, 손은 전류에 의해 벌벌 떨렸다.
아니, 그냥 이 상황 때문에 떨리는 것 같기도 하다.
[이그네아. 왔구나?]
[너, 너…]
덥석!
어느새 이그네아의 타들어가는 손은 세피드의 멱살을 붙잡았다.
싱글벙글 웃던 세피드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뭐 하는 거야?]
[너야말로 뭐 하는 거야! 내 아리아를 어떻게 한 거냐고!]
이그네아의 불이 주위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불의 정령의 능력 중 하나인 ‘분노가 할수록 불의 힘이 점차 강해진다.’
지금의 이그네아는 전성기 수준의 네메린느와 맞먹을 정도로 강해진 상태였다.
[흠...]
물론 세피드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힘이다.
어둠으로 분리된 공간의 격(?)이 이그네아를 짓눌렀다. 그에 분노한 이그네아가 더욱더 강한 힘을 발휘했으나 어둠을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끄윽...]
[우리 건방진 네아. 내가 언제까지 오냐오냐해줄 것 같아?]
[처음… 부터 이럴 생각으로...]
[흥.]
투욱.
무게가 서서히 줄어든다. 허나 이그네아는 다시 달려들지 않았다.
힘의 격차를 현저히 느꼈기에.
이그네아의 손을 떼어낸 세피드는 옷을 정리하며 그를 흘겨봤다.
[걱정 마. 아리아는 멀쩡하니까.]
[...! 정말인가?]
[그래. 지금 그녀는 이곳에 없어. 위험을 감지하고 몸을 뺀 상황이지.]
[...하지만 정령왕의 힘은 지금 저 인간에게...]
이그네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 바다, 아니 이제는 바다라고 보기도 힘들 정도의 전류의 파도 속, 괴물 같은 인간이 보였다.
어찌어찌 끌어 오르는 분노를 연료 삼아 이곳까지 도달하긴 했으나 그 이상은 절대 무리였다.
‘지금 상태로는 조금만 더 나아가도 영혼채로 갈리겠지.’
세피드는 겁에 질려 분노가 사그라드는 이그네아를 보고 히죽 웃었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닐 텐데. 네가 한 말에 뜻을 모르는 거야?]
[뭘 말이지?]
[아리아에게 ‘물의 정령왕’에 힘이 없다. 라는 소리 말이야.]
[...!]
순간 뭔가가 이그네아의 머리를 강타했다.
아리아는 더 이상 물의 정령왕이 아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녀에게 제약이 없다.
본인에게 걸려있는 ‘가족’과의 사랑을 나눌 수 없는 제약도, ‘아리아’가 가족이 아니게 된 덕분에 의미가 없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 정도의 감정을 가진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리아를 향한 마음.’
그것을 가로막던 제약이 사라지자 그에 대한 분노가 미친 듯이 상승한 것이다.
[아리아는 예비 차원으로 갔어.]
[예비 차원?]
[너는 몰랐겠지만 차원 분리를 가장 먼저 시도한 게 아리아였거든. 그녀가 임시로 만든 공간 중에는 미개발된 차원이 몇 개 있을 거야.]
[...그곳들 중에 아리아가 있다는 건가.]
[응.]
세피드는 자신의 손에 검은 구슬을 소환해 이그네아에게 건네주었다.
작은 쇠구슬만 한 크기의 흑공(??).
[여기에 마력을 주입하면 아리아가 지나간 흔적이 드러날 거야. 뭐, 찾는 건 네 역할이지만...]
서둘러 찾지 않으면 저게 정상적으로 돌아올지도.
그녀는 방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된다면 가족이 아니게 됨으로써 이그네아의 진심을 알게 된 아리아가 그를 거부할지도 모른다.
[제길...]
[서둘러.]
파앗.
어느새 이그네아의 전류의 흐름을 벗어나 외부의 공간으로 빠져나갔다.
[그럼… 나는 우리 베린이하고 좀 더 놀아줘야겠다.]
그녀 역시 아래에 위치한 규격 외의 인간을 힐끔보다, 그대로 어둠 공간 속으로 사라졌다.
“대단하네.”
나는 순수히 감탄했다.
지난 1년간의 노력의 결실이 한눈에 보이는 일격.
괜히 삼지창 없이 목재인형을 박살낸 게 아니다.
시스템이 규정한 ‘불가능’을 베어낸 검술.
다윤이는 아마도 ‘등위’의 이름을 올릴 정도로 성장했으리라.
‘...그래봤자 1등위도 안되겠지만.’
그래도 초입이라도 들어섰다는 게 중요하다.
저대로 조금만 더 수련한다면 스스로 차원을 넘는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흐흥, 그 말이 듣고 싶었어요.”
다윤이는 갈라낸 길을 앞장서며 싱긋 웃었다.
그녀의 허리춤에 걸린 월광의 검은 더욱더 베어내고 싶다는 듯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무기 연마를 통해 얻어낸 월광검사의 무기.
비록 열화판이라 기본적인 스펙은 다른 레전드리 무기가 훨씬 좋지만, ‘월광식’에 한해서는 가장 뛰어난 효율을 발휘했다.
“...그래도 아직은 한참 먼 것 같네요.”
다윤은 그리 중얼거리며 길의 끝에 위치한 존재를 보았다.
세상을 가득 메운 전류와 파도처럼 그녀의 주위를 흐르는 거대한 힘.
얼굴은 변하지 않았지만 저 비정상적인 상태가 우리가 알고 있던 채림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기세를 내뿜었다.
사실 외형 따위는 중요치 않다.
문제는 그녀가 가진 힘.
간단히 얘기하면 강강약약이다.
강한 자와 싸우면 싸울수록 그녀는 더욱 강해진다.
주위에 빨아들일 수 있는 마력이 많기에.
반대로 약한 자와 싸우면 그만큼 약해진다.
하지만 약한 자는 애초에 기본의 채림보다 약하기에 이걸 무작정 나쁘다. 라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상대가 어떤 적이든 채림은 거의 동등한 수준에서 싸울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저 상태가 된 것은…
“지금 가진 게 너무 많아서 그래. 저걸 ‘온전한’ 능력이라 보기는 힘들지.’
지금의 채림은 수많은 중첩 효과가 걸린 상태다.
초월자, 네르토르의 삼지창.
물과 번개에 특화되어 있는 무구.
모든 상성을 무로 돌리기에 그라티아의 장검이나, 찬란한 빛과도 맞먹을 정도의 무기다.
그것만으로도 강한데 하필 전장이 아리아의 속성인 물의 마력으로 가득 찬 ‘바다’다.
네르토르의 고향이라고 불리는 곳.
안 그래도 강해진 채림이 바다의 마력을 과할 정도로 흡수하고, 그 마력은 증폭해 네트로트의 힘을 더욱 끌어쓴다.
다량의 초월자의 힘을 끌어쓰면 무슨 이유에서인지 외부 차원의 힘을 쓸 수 있게 된다.
아마도 특이점의 일부를 받은 영항이겠지.
‘저 능력을 이용하기 위해 일부로 뺏지 않았으니까.’
채림은 중요한 전력중 하나다.
[...스스 스장님...]
어느새 근처까지 다가서니 채림의 눈이 휙! 우리 쪽을 바라본다.
그중 나를 보고는 전류를 담은 눈이 순간 환기를 되찾듯 커졌다.
그러나 두눈은 다시금 푸른색의 전류로 뒤덮인다.
“괜찮아?”
[그, 그그그 몸이 이이상상해요….]
파직.
한눈에 봐도 정상이 아닌 정신.
그녀의 능력의 유일한 페널티 이자 제약.
그래도 이 정도는 까지는 아니었는데.
너무 많은 힘이 중첩된 탓인지 그녀의 정신이 바람 앞에 촛불처럼 흔들렸다.
“정신 붙잡고 있어. 금방 돌아오게 해줄게.”
[오… 오지마요!!]
콰지지지직!!
길의 끝에 도달하자 거대한 전류의 빛이 우리를 강타한다.
이랑이 분홍색의 불꽃을 둘러 빛의 흐름을 왜곡시켰다.
이랑의 창조세계의 능력.
왜곡시킨 빛은 방향을 꺽더니 그대로 다시 우리에게 달려든다.
나는 벌써 4명의 정령왕의 동의를 얻은 찬란한 빛을 휘둘렀다.
「▼정령─ 」
「▼정령─ 」
파득!
같은 힘이 서로 맞부딪힌다.
잠깐의 파동이 일렁이듯 ‘길’이 흔들리고 주변 공간이 거칠게 준동한다.
[오지마아아… 또, 다, 다치게 하기 시, 싫어......]
채림은 잔뜩 겁을 먹은 듯이 잡은 삼지창이 벌벌 떨린다.
아무리 영혼이 멀쩡하고 육체가 멀쩡하다고 해도 채림이 살아온 시간은 고작 22년 정도.
저만한 힘을 감당할만한 정신이 아니다.
“...레빗.”
“위험할 수도 있다냐.”
“상관없어.”
나를 지그시 쳐다보던 레빗의 손이 움직이자 이곳에 있는 모두의 시야가 주황빛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