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화 〉 10. 이루어질 수 없는 (6)
* * *
평범한 사람보다 3배는 큰 푸른색 바위들이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고 허공을 떠다닌다.
그 아래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 그 위로 건너가는 존재를 위태위태하게 만들었으나, 오히려 이 공간을 비웃듯 자유자재로 바위 사이를 지나갔다.
“...치.”
“왜 화가 났냥?”
여전히 포니테일의 묶은 머리를 고수하는 다윤과 그런 다윤의 머리 위에 앉은 고양이 형태의 레빗은 계속해서 공중 바위를 건넜다.
다윤은 불만인 표정으로 경계의 마지막 바위에 도착했다.
"또 윤 씨랑 떨어졌어."
예상은 했다.
정신적으로 이상이 생긴 채림을 위해 환묘세계를 펼쳤다.
그러니 윤 씨와 채림이 같은 공간에 있는 건 당연한 일.
그런데 왜 또 나는 윤 씨랑 떨어진 건가.
“...설마 네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
“내가 뭐 하러 그러겠냥 .”
레빗은 주황빛의 꼬리를 살랑거리며 쿡쿡 웃었다.
“다윤 님은 주인님을 너무 못 믿는다냐.”
“내가 윤 씨를 못 믿는다니.”
윤 씨를 세상에서 가장 믿는 사람은 아마 나 일 것이다.
...라고 다윤은 그렇게 스스로를 자부했다.
윤 씨의 '유일한' 여자친구이자 하나밖에 없는 연인, 둘도 없는 영혼의 단짝...
스스로도 낮 부끄러운 수식어들을 마구잡이로 떠올렸지만 다윤은 외부의 의심스러운 세력을 걷어내기 위해 수치심을 감수하기로 했다.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 이상, 이 정도의 수치심은 충분히 버틸만했다.
“내가 안 믿으면 누가 믿어.”
“근데 왜 주인님을 믿지 못하냥.”
“...”
다윤은 ‘그야 너도 스스로 생각을 갖춘…’ 이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레빗은 윤 씨의 펫이자 고위신, 그리고 기사 겸 메이드이기도 하다.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어떤 모습이든 변할 수 있고, 우리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
주인인 윤 씨조차 최강자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진심을 다하는 레빗을 이길 수 없다.
‘그 악마는 예외지만... 아무튼.’
이렇게나 강한 레빗은 윤 씨의 모든 명령에 철저히 따른다.
레빗이 신이 아닌 그저 상점에서 구매한 펫 일때부터 함께했기에 다윤에게 레빗은 하나의 인격을 가진 동료보다는 펫에 더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신이 되기 이전에 말도 못 했고, 항상 고양이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진 않지만...
"?"
신이 된 지금도 맹목적으로 윤 씨를 따르는 이유가 단순히 전부터 충성을 맹세했기에 그러는 건지.
아니면 다른 사적인 이유가 있는 건지.
신이 되고 초월의 힘을 얻은 레빗에게 더 이상 시스템적인 제약은 의미가 없을 텐데.
레빗의 속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전혀 알 수 없었다.
“주인님이 내게 채림과 같은 공간에 있기를 원하셨다냐. 그리고 다른 이들은 따로 말이 없었다냐. 그래서 적당히 나눈 거다냐.”
“...”
“물론 나도 완벽하진 않아서 불안정한 차원 공간에 다수를 묶는 건 어려웠다냐. 여기서 이해가 안 가는 게 있냥?”
“...아냐. 고생했네, 레빗.”
다윤은 이번에 새로 나온 당근 구슬 아이스크림을 주었다.
그녀는 방금까지 진지한 얼굴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풀어진 상태로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했다.
이런 걸 보면 영락없는 츄르앞에 고양이가 맞는데 말이다.
어쩌면 악마를 상대하던 지난 1년간의 여정이 괜한 것도 신경 쓰게 만든 모양이다.
레빗은 특별한 이유 없이 그저 윤 씨를 따르는 것일 텐데.
‘...’
그런 다윤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레빗은 아이스크림을 입에 마저 넣었다.
피식.
“하아... 하아...”
물의 정령왕, 아리아.
아니, 그냥 아리아는 자신의 차원들 중 가장 눈에 뜨지 않는 장소로 몸을 옮겼다.
어찌어찌 차원을 열고 도망치긴 했으나 그다음이 문제였다.
바닥난 힘은 더 이상 육체를 원활하게 가동하기 힘들었고, 도움받을 정령도 하나도 없는 곳.
더군다나 마력도 쭉 빨린 상태라 공간이동 같은 기술도 사용이 불가했다.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
이 상태로 누군가 공격한다면 그대로 부활도 하지 못한 채 죽으리라.
하지만 더 최악인 것은...
“미친새끼...”
아리아는 제 입에서 나가는 험한 말을 질색하며 한편으로는 동의했다.
가족인 네메린느가 왜 맨날 입에 욕을 달고 사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다.
가족이라는 놈이 자신을 연인 상대로 삼다니.
그것도 일만 년을 넘게 살아온 가족을!
“으…”
아리아는 양팔을 부여잡으며 그 면상을 떠올렸다.
불같이 날뛰지만 제 앞에선 순한 양이 되던 특이한 녀석.
뭐든 지기 싫어했지만 자신이 참여한 내기에서는 자연스레 패배했던 녀석.
과거에는 그저 자신이 많이 도와줬기에 그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라고 생각했다.
초월을 한 뒤에는 그 행동의 의의를 조금 의심했다.
허나 이내 생각을 지워냈다.
설마 진짜로 그러겠냐고.
자신은 모르지만 평범한 가족들 중에는 어릴 때 자식이 부모와 결혼하고 싶다는 둥 그런 치기 어린 마음을 가진 경우가 있다지 않은가.
아마도 이그네아도 같은 부류일 것이라.
그게 좀 오래가긴 해도 설마 진짜로 그런 마음을 가진 건 아니겠지. 라고 생각했다.
“...”
근데 '제약'이 사라지고 진실이 드러나니 자연스레 알게 됐다.
이 미친놈을 진짜 나를 좋아한다는걸.
“하!”
이제껏 멍청하게 몰랐던 자신에 오히려 더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아니, 정확히는 모르게끔 설계돼 있었겠지.
‘그놈도 어지간히 고통받았겠네.’
자신이야 최근에서야 서서히 눈치챘지만 놈은 끙끙 앓으며 어떻게든 마음을 표현했을 것이다.
그러니 제약이 있는데도 티가 나지.
물론 그와 별개로 아리아는 받아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유야 여럿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일만 년을 같이 지냈는데 어찌 이제 와서 사랑을 나누겠는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아리아!”
“...이그네아.”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아니, 예정된 호재(虎災) 였으려나.
“괜찮은 거야?! 영혼이나 몸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니지? 아니면 정신”
“오지 마.”
뚜벅.
타박.
그가 빛이 비치는 동굴에 발을 딛자 그녀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다.
이그네아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런 그의 모습에 아리아는 혐오를 느꼈다.
“왜... 왜 그러는 거야.”
“왜 그러는 거야?”
어느새 두 발자국 뒤로 물러난 아리아가 이그네아를 노려봤다.
이그네아는 아리아를 상처 입히지 않기 위해 조금의 마력도 발산하지 않았지만, 그저 존재만으로 아리아의 기세가 조금 꺾였다.
“너야말로 왜 그래? 너답지 않게 내 말도 안 듣고 말이야.”
멈칫.
그녀의 말에 서서히 다가가던 이그네아의 발걸음이 멈췄다.
어느새 입구로부터 열 걸음이나 걸어온 상태였다.
“알았어, 멈췄어.”
“...”
“나는 네가 걱정돼서 온 거야. 네가 혹시나 힘을 빼앗기고 이상이 생기지 않았을까...”
“이상...”
큭큭.
웃기는 말이다.
이상은 이미 진작에 있었는데 말이다.
“이상이야 있지. 네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이제야 눈치챈걸.”
“......”
“그동안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겠지만 나는 그럴 마음─”
“말도 안 되는?”
흠칫.
아리아의 뺨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순간적으로 높아진 기온은 아리아의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높아진다.
평소라면 아무런 피해가 없었을 변화.
하지만 지금은 평소가 아니었다.
그가 한 발자국 내딛는다.
“그게 무슨 소리야.”
“...크흡, 흐읏...”
“그게, 무슨 소리냐고.”
“... 우리는... 가족... 이야, 누굴 연인처럼 생각하는 게... 아니라고!”
“...”
아리아는 턱턱 막히는 목과 입을 최대한 열어 말을 내뱉었다.
어느새 무릎 꿇은 체 바닥에 축 늘어진 아리아의 앞으로 이그네아가 다가왔다.
불의 주체가 코앞까지 다가왔으나 불은 더 강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눈앞의 존재를 보호하려는 듯 그 주위만을 태우려 들었다.
“......그럴 리가 없어.”
“...”
“네가 그럴 리가 없잖아... 너도 같은 마음이었잖아, 너도 나를 좋아했잖아!”
“개, 개소리를...”
스윽.
이그네아의 손이 아리아의 얼굴을 올렸다.
힘을 잃고 생기를 잃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얼굴이 말이 아님에도 그녀에 대한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제약이 사라진 아리아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가져야 한다.
그녀가 원치 않더라도, 아니 원하게끔 변하게 해야 한다.
어느새 기온은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아리아, 좋아해.”
“...난 너 같은 남자 싫어.”
“아니,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야.”
“...미친 새끼.”
“역시... 지금 힘이 사라져서 제정신이 아니구나. 걱정 마! 내가 어떻게든 고쳐줄게.”
“제정신이 아닌 건 너 같은데.”
아리아는 이그네아가 붙잡은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지금의 상태로는 어림도 없었다.
“나를 강제로 취해도 너를 좋아하게 될 일은 절대로 없어.”
“...지금은 정상이 아니지만 나중에 다 이해하게”
「▼정령─」
““!””
순간 돌아온 힘.
둘 모두가 눈치챘지만 가장 먼저 손을 쓴 건 아리아였다.
파도처럼 일어난 물의 폭풍이 이그네아를 덮치고 한순간에 동굴을 박살 냈다.
“젠장! 하필 이 순간에...!”
폭풍은 이그네아를 허공으로 띄우고 한 방울 한 방울이 물의 칼날로 변했다.
칼날은 그대로 이그네아의 육신을 갈갈이 찢...
푸확!
“...!”
[아리아. 나는 정말 슬프다.]
이러지 않고는 널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물을 산화시킨 거대한 불은 아리아를 집어 삼킨다. 물을 최대한 휘감은 아리아는 그대로 물의 창을 만들어 이그네아의 심장을 노렸으나.
[...]
툭.
콰직!
분노와 수많은 감정에 의해 강해진 이그네아의 육신은 이미 전성기의 네메린느보다 더 튼튼했다.
창은 육신에 닿자마자 산산조각 나 바닥으로 추락한다.
“크읏…!”
어느새 거대한 불의 손은 아리아의 몸체를 붙잡았다.
[미안해. 진짜 미안해… 하지만 너도 이해할 거야. 지금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야! 이그네아이 씹새끼가!!]
눈으로도 쫓을 수 없는 빠른 속도의 녹색 바람이 이그네아를 꿰뚫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