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화 〉 11. 계약 (1)
* * *
네메린느는 몸에 가득 차는 기력에 전능감을 느끼며 사건의 중심지에 도달했다.
차원 중단부를 관통한 거대한 검은 용과 그를 막는 스틸과 아리아.
다행히 제때 온 모양이다.
[하...]
네메린느의 주먹이 꽈악 쥐었다.
그녀는 정령왕이다.
바람의 정령들의 왕이자 정령들의 시초라고 불리는 존재.
행성에 나고 자란 이들 중 당연히 그녀보다 강한 이는 없었고, 그 무엇도 정령왕보다 높은 수준의 힘을 전할 수 있는 이도 없었다.
지금은 두 명 정도 있긴 하지만… 아무튼.
정령왕과의 계약은 계약자를 차원이 다른 존재로 만들었으며, 그들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자연재해가 될 정도의 위력을 자랑했다.
당연히 그 위력은 정령왕으로부터 비롯된 힘.
정령왕에게 있어서 계약자는 단순히 힘을 받아쓰는 아래 존재에 불과했다.
[세상이 변하려나...]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신보다 강한 계약자.
그 계약자는 힘을 받아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정령왕인 자신에게 힘을 빌려주었다.
「▼저장 」
이 목걸이에 담긴 말도 안 되는 힘.
우리가 가진 능력과 크게 다른 것 같진 않지만 훨씬 거대했고.
우웅─
훨씬 격이 높았다.
주먹을 꽈악 쥔 네메린느는 고고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살짝 들어 올린 주먹을 보았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능력.
능력을 주어야 할 정령왕이 도리어 능력을 받고 싸움에 나선다.
‘이건 마치…’
자신이 김윤의 계약자라도 된 것처럼.
처음 느껴보는 신선한 감각에 네메린느는 큭큭 웃으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
[이그네아, 그만 끝내고 따로 면담 좀 하자.]
툭.
연푸른 색의 은은한 에테르가 휘감긴 주먹을 내질렀다.
그리고 끝났다.
주먹에서 뻗어나간 에테르는 차원을 관통하던 용의 비늘이 터져나간다. 세 정령이 서있던 차원은 개박살 나며 아래로 추락했다.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스틸의 계약자, 레빗이 아리아와 스틸을 끌어안고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다.
마지막으로… 이그네아는 버둥거리며 몸을 수복시키려 들었으나.
[켁!]
[가만히 있어.]
‘저장’에 얼마 남지 않은 힘으로 이그네아를 제압해 기절시켰다.
「▼▼정── 」
「▼정령왕 」 「▼흑화 」
“?”
세피드는 돌아온 힘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마나 놀랐는지 변신 중이던 다크 슬라임의 형태도 잊은 체 모습을 드러냈던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금 슬라임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이상하네.’
분명 저곳에는 이그네아를 이길만한 녀석이 없었을 텐데.
세피드는 중얼거리며 꾸물꾸물 이동하는 슬라임 위에 앉아 팔짱을 꼈다.
이그네아가 그다지 강하지 않지만 고유 능력인 ‘흑화’를 이용해 정령왕의 이름의 힘을 교묘하게 변형시켰다.
이름 자체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무언가를 변화시키는 데에 특화된 것이 바로 세피드의 능력.
이름의 힘의 변형 정도야 과거 ‘디드락’에서 제법 이름을 날렸던 그녀로선 충분했다.
하물며 변방 행성의 반 초월자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단순히 힘의 일부를 내주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변화’시키는 것.
이것은 상위 등위에 위치한 초월자도 쉽사리 하지 못하는 행위였다.
“이상해.”
하지만 당연히 대가 없는 힘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령왕의 이름에 흑화가 스며들었고, 그에 따라 정령왕의 이름이 많이 흐려졌다.
정령왕들이 약해진 것은 단순히 정령왕이 늘어서만 이 아닌, 세피드의 능력이 오래전부터 서서히 이름을 갉아먹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그네아가 흑화를 적극적으로 사용했으니 이름이 더욱더 흐려지는 건 당연지사.
소모된 만큼 힘을 사용하는 이그네아는 적어도 1등위에 오를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거다.
하지만 힘은 돌아왔고, 이그네아의 행방은 알 수가 없다.
‘베린이랑 놀다가 상황을 못 본 게 크네… 하지만 재밌었는걸.’
커다란 슬라임을 안고 있던 그녀는 왼쪽을 힐끔 보았다.
저 멀리 용사, 베린은 짧은 다리를 움직이며 슬라임을 하나하나 뒤지고 있다.
가끔 발을 걸어 넘어트리거나 살짝 옷을 들추면 발작하는 것이 반응 하나하나가 아주 귀엽다.
“아이씨! 나와! 나오라고오오!!”
녀석의 그림자가 수천, 수만 마리의 슬라임들이 밟고 있는 바닥을 뒤덮는다.
마치 선별하듯이 구분하던 베린은 고개를 휙 돌려 정확히 자신이 있는 곳을 향했다.
“거기구나!”
‘제법 똑똑한데…’
“읏!”
꽈당!
베린은 그대로 넘어졌다. 급하게 이쪽으로 달려오다 슬라임의 촉수가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베린은 공간이동은 사용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곤 하나...
“멍청해.”
“으… 너 잡히면 가만 안 둬…”
“헤헤… 기대되네.”
스륵.
방금 전의 여파로 잠시 본래의 복장으로 돌아왔던 세피드는 짙은 남색의 후드 모자를 올리며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오!”
“이미 다… 봤어!”
‘어둠’을 붙잡은 베린이 그대로 수십 갈래의 단검을 회전시키며 세피드를 노렸다.
가능한 모든 궤적에서 베어내는 단검술.
아무리 세피드라고 해도 무방비 상태에서 단검의 쇄도를 막기란 쉽지 않았다.
그녀의 자안에 푸른색의 수십 개의 창이 뜨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하나의 창이 눈동자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너무나도 여유롭게 단검의 궤적 사이로 빠져나갔다.
“...!”
“히히~”
“말도 안 돼… 어떻게 내 단검을…”
베린은 경악했다.
수십, 수백 개의 단검을 그림자를 이용해 단번에 베어내는 기술.
많은 시간 동안 연구하고 수련한 기술로 피할 수 있는 모든 방향을 전부 차단하며 베어낸다.
공간이동이나 공격 무효화 같은 특수한 기술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절대’ 피할 수 없다.
강력한 기술이지만 기술의 한계를 너무나도 잘 아는 베린은 그림자를 짙게 늘려 공간이동을 차단했고, 무효화를 막기 위해 단검의 힘과 무게의 격을 단련했다.
그렇게 수련하고, 또 수련해서 만들어낸 기술을 처음 써보는 것이었다.
다른 상대들은 이 기술을 쓸 만큼 강하지 않았기에.
“...”
“놀랐어? 미안. 하지만 그런 기술에 당해주면…”
내가 너무 쪽팔리잖아!
세피드는 어둠 사이로 스며들어 베린의 귀에 큭큭 웃으며 속삭였다.
얼굴이 잔뜩 붉어진 베린이 단검을 휘둘러 세피드를 베어냈지만.
“헤헤…”
“...”
갈라낸건 어둠뿐이었다.
어느새 슬라임 위에 풀석 앉은 그녀는 부들부들 떠는 베린은 바라봤다.
“화나?”
“...아니.”
“화났네.”
“아니라고.”
“화내지 마. 네 동료들이 잘해주고 있는걸.”
“...뭐?”
베린은 단검을 꽈악 쥐었다.
급격히 변한 기세.
‘역시 이게 트리거 인가.’
그녀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질적인 자안이 반짝이자 베린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말 그대로 다들 잘해주고 있어. 벌써 나를 제외한 4명의 정령왕의 동의를 받았는걸.”
“...”
“이제 나 하나만 받으면 너희들의 목적은 완료야! 다만...”
「▼흑화 」
“나를 이길 수 있으면 통과지.”
“...아까는 찾기만 해도 통과라 하지 않았어?”
“물론 통과야. 다만 동의해 줄 정도는 아니라. 뭐, 혹시 원하는 거라도 있어? 어지간한 건 다 들어줄게.”
그녀의 물음에 베린은 잠시 멈칫했다.
김윤이 원하는 건 정령왕의 동의다. 하지만 세피드는 동의를 해주지 않겠다고 했다.
동의를 받으려면 세피드를 이겨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세피드를 이기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여전히 강한 놈이 너무 많아.’
베린은 주먹을 꽈악 쥐었다.
환각을 끝낼 당시 베린은 뭐든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초월에 들어서기도 했고 레벨과 무기도 이전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강화됐다.
그렇기에 동료들과 맞서 싸우지 않는 이상 자신의 앞을 막는 이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새롭게 들어선 세계에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고위신이나 초월에 길에 접어든 존재가 많았다.
그들을 상대하다 수차례 죽을 위기에 처했었다.
다행인 건 김다윤이나 콜트 같은 녀석들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
허나 김윤은 달랐다.
‘또 죽을뻔했네. 다들 고생했어. 다음에는 좀만 천천히 가보자.’
녀석은 환각 이후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과거에 검 한 번 휘두르고 픽─ 쓰러지던 연약한 모습은 어디 가고, 상처를 입는다는 게 뭔지 모르는 듯 단 한 번도 다친 적이 없었다.
다친 정도는 환각 같은 제한이 있는 곳에서만 피해를 입은 정도.
실제로는 피 한 방울 흘린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더 노력했다.
저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나도 녀석처럼 강해지기 위해.
노력에 보답하듯 나는 강해졌다.
더이상 고위신은 상대가 안 되고, 제아무리 반 초월자라고 해도 이기지는 못할지언정 공방은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있었다.
아직도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경지가 눈에 선명히 보인다.
바로 눈앞에.
“...나.”
“응?”
“나, 나랑…”
그렇다면… 차라리 가지면 되는 게 아닐까?
저 경지를.
저 힘의 편린이라도.
“나, 나랑 계약해 줘!!”
“......”
“나랑 계약해서 힘을…”
[헤에.]
후욱.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세피드의 얼굴이 베린의 얼굴과 맞닿았다.
아니, 거의 맞닿았다. 살짝 기울이기만 해도 닿을 정도.
살짝 작았던 세피드의 키는 어느새 베린과 동일했다.
“...!”
[나랑 하고 싶어?]
꿀꺽.
베린은 시야에 들어선 세피드의 모습에 식은땀이 조금 흘렀다.
어느새 세피드의 왼손이 베린의 왼손을 붙잡아 깍지를 꼈다.
깍지를 낀 손은 부드러웠다.
동시에 격의 무게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나랑 하고 싶냐구. 원한다면 해줄 수 있어.]
“...진짜?”
[응! 너는 귀여우니까. 계약 정도는 충분히.]
「▲흑화 」
그녀가 악동처럼 웃으며 작은 입술이 베린의 오른쪽 볼에 맞닿았다.
갑작스런 행동에 베린의 얼굴은 폭발할 듯이 빨개졌다.
“...뭐, 뭐 하는 거야!”
[계약의 표시야. 계약자.]
꽈악.
베린은 벗아나기 위해 노력했지만 깍지를 꽉 잡은 세피드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허, 나랑 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해야지.]
“이, 이제 됐잖아!”
[안돼. 계약에 있어 좀 더 긴밀한 관계를...]
콰아아아아앙!!!!
─위험 프로토콜 실행 모드 수정 중...
─위험 프로토콜 실행 모드 수정 중...
─위험 프로토콜 실행 모드 수정 중...
─위험 프로토콜 실행 모드 수정 완료.
[?!]
“...베타?”
─대(?) 초월자용 병기, 베타.
─코트(Code) ─ 네르토리아(Nertoria).
─광자 에너지 저장률 (100 / 97,120%).
─섬멸을 시작합니다.
세피드의 거처에 거대한 광자 에너지가 쏟아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