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화 〉 여신과 마왕
* * *
행성에는 수많은 빛의 존재들이 존재한다.
빛은 항상 밝고 신성하며, 어둠에 대척한다.
그중 빛에 일가견이 있는 자들에게 가장 '위대한 빛'을 뽑으라 한다면 거의 모든 이가 한 존재를 말할 것이다.
빛의 대표이자 신 위에 신이라 불리는 여신, 엘레노아.
세상의 모든 빛 대리자, 모든 생명의 어머니, 마왕(?王) 제르노스의 유일한 대적자...
수많은 이명들은 위대한 신, 엘레노아를 찬양하며 그녀의 힘을 받은 '용사'들은 마왕과 그 사악한 무리들을 물리치기 위해 세상을 누빈다.
여신은 선(?) 하며,
마왕은 악(?) 하다.
단순한 이분법적인 사고지만 평범한 어드벤처 행성의 주민은 이 사실을 당연한 상식처럼 여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마왕의 수하인 몬스터들은 인간들을 습격하고,
여신의 대리자인 용사는 그들을 무찌르니까.
당연하게끔 '설계'되었기에 당연하게끔 느끼는 것.
하지만 많은 시간을 살아오고 스스로의 한계를 계속 뛰어넘어온 존재들은 이 괴리감을 진작에 알아차렸다.
여신은 선하기만 하지 않고,
마왕은 악하기만 하지 않는다는 것을.
물론 마왕과 그 무리의 악행은 아무런 정보 없는 제삼자 봐도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악랄한 전적들이 제법 많다.
하지만 그것은 여신 쪽도 마찬가지.
다만 피해자가 정 반대일 뿐.
오히려 '같은’ 진형에 한하면 마왕보다 여신 쪽이 더 심각했다.
왜냐하면...
[악마들은 동족상잔을 하지 않기 때문이지. 굳이 사례를 찾자면 세력전 정도?]
[흥, 그 버러지들을 어떻게 다 관리해? 너 같이 세뇌 걸고 통제하는 게 아니면.]
태초에 피어난 생명 아래 죄가 없는 이는 없을 것이다.
허나 원형의 탁자를 두고 마주 앉은 이 둘은 예외였다.
그들의 죄는 적어도 이 행성에 그 누구도 물을 수 없었다.
[여신이 말이 험악하구나.]
[꼬와? 그럼 너도 편하게 해. 오히려 그쪽이 난 더 괜찮으니까.]
같잖게 점잔 떨지 말고.
세상의 모든 하늘빛을 담은 긴 머리의 여신이 입술을 뒤틀며 상대를 노려봤다.
체격은 두 배 이상 작았으나 그 기세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그에 검 보랏빛 머리에 붉은 눈과 뿔을 가진 마왕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어두운 재질의 갑옷을 입고 있었고 의자 옆에는 커다란 대검이 놓여 있었는데, 그저 존재하기만 해도 주위의 빛을 잡아먹으려 들었다.
[아, 씨발.]
반면에 그녀는 여신답게 아름답고 우아한 옷을 입었지만 오히려 이런 옷이 불편한듯 팔목과 발목에 질질 끌리는 소매를 자꾸 걷어냈다.
[이래서 내가 공적인 자리를 안 좋아해요. 이 좆같은 옷을 안 입으려고 해도 아랫것들이 지랄하는데 내가 안 입을 수도...]
[난 상관없다만.]
[진짜?!]
마왕, 제르노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신, 엘레노아는 나풀나풀 거리는 옷을 훌렁훌렁 벗기 시작했다.
그녀의 나체가 선명히 제르노스의 눈에 보였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아직도 저런 철없는 모습을 가진 엘레노아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뭘 봐? 눈깔 뽑아버린다. 악마 새끼야.]
[너를 믿는 수많은 용사가 불쌍하군...]
[풋.]
살기가 가득했던 엘레노아는 흰색에 청색의 줄 세 개가 그어진 후드티와 짧은 검은색 반바지를 입고 자리에 풀석 앉았다.
그러고는 씁쓸한 미소로 말했다.
[...아직도 '믿음'으로 힘을 빌리는 연놈들이 있으면 그게 이상한 거다.]
[우리는 믿음으로 힘을 얻는 이가 있다만?]
[그래서 너네가 비정상이라는 거고.]
엘레노아는 깔깔 웃으며 큼지막한 제르노스의 갑옷을 팡팡 쳤다.
행성에서 가장 오랜 시간 전쟁 중인 두 수장이라기에는 너무 허울 없는 관계.
서로 눈이 마주치자마자 칼과 마법을 겨눠야 할 것 같지만 이들은 적도, 아군도 아니다.
정확히는 '연극'을 꾸미는 제작자들이다.
좀 더 재밌고 흥미로운 게임을 만들기 위한 배우를 양성하는 제작자.
그들은 배우를 양성하고 직접 본인이 연극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 개 같은 연극에 영원히 붙잡혀 있는 게 문제지만.]
[그렇지.]
여신과 마왕은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하다... 쾅!
탁자가 바스러졌다.
푸른색의 창공과 짙은 색의 붉은 하늘이 반반 나누어진 공간이 일순 흔들렸다.
[너는 아니잖아 개자식아!]
[나 역시 갇혀 있다만?]
[본체는 이미 다른 차원에서 호의호식하는 거 모를 줄 알아?]
[그러게 관리자에게 잘 말하지 그랬더냐.]
무식하게 계약서도 안 읽고 싸인한 네 잘못이다.
마왕은 그리 말하며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그에 여신은 부들거리며 다시 복원된 탁자를 마구쳐 부셔냈다.
과거, 초월자로서 치열한 전쟁을 벌이던 이 둘에게 외부에서 온 강자가 나타났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정체불명의 강자는 행성의 존폐와 자신들의 안위를 협박해 행성을 누군가의 놀잇감으로 만들었다.
당시 마왕과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던 때라 자신을 옳은 선으로 만들어주고 상대는 저열하고 비겁한 악으로 만들어준다는 말에 여신은 냉큼 수락했다.
문제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계약서를 안 읽고 싸인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엘레노아 입장에서는 전혀 손해 볼 일이 아니었다.
초월을 통해 차원 너머로 나아갈 수 있는 사실을 알았다면 모를까, 그녀는 아무런 지식이 없었고 그저 힘만 가득한 상태였다.
그런데 자신을 도와 상대를 몰락시켜 주겠다는 말을 거절할 수가 없던 것이다.
...물론 그와 별개로 상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적이라 거절 자체가 불가했다.
[흐흐... 내가 스스로 노예 계약을 쓸 줄이야.]
[...노예. 틀린 말은 아니군.]
[지금 나 맥이냐?]
엘레노아가 눈을 부릅뜨자 제르노스는 탁자에 비치는 행성에 손을 대었다.
[아니, 우리 모두를 얘기하는 것이다.]
초록빛의 익숙한 행성에는 그곳이 자신들이 살아가는 고향임을 알 수 있었다.
마왕의 표정을 힐긋 본 여신은 피식 웃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생명체들을 챙겼다고? 그 많은 천사들을 자비 없이 다 찢어 발길 땐 언제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엘레노아.]
[난 내 자식들 죽이는 거 못 보겠더라.]
그녀가 그리 말하자 제르노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
[...]
그들은 더 이상 싸우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그들만’ 싸우지 않는다.
이미 서로를 적대하던 감정은 무뎌진지 오래.
싸우는 이들은 각자의 힘을 부여받은 배우들일 뿐, 이들이 직접 서로에게 칼을 들이민 건 기억도 가물가물할 정도로 먼 과거다.
엘레노아는 말했다.
[관리자는 연락 안 되지?]
[그녀는 우리에게 더 이상 관심을 주지 않는다.]
이곳의 관리자인 이름 모를 초월자는 행성에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아마 이 행성의 관리 차원에 있는 것도 본체가 아닐 것이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우리를 버린 걸지도 모르지. 어쩌면 다행인 이야기다.]
그녀에게 더 이상 놀아나지 않는다는 소리니까.
제르노스가 그리 말하자 엘레노아는 의자를 한 바퀴 빙글 돌리며 탁자에 몸을 기댔다.
[으으…! 영~원히 관심 껐으면 좋긴 하겠네.]
[아마 그럴 리는 없겠지. 분신이지만 게임을 지속적으로 조정은 하고 있으니. 적당한 때가 되면 돌아올 거다.]
[...초 치지 마 악마 새끼야.]
[넌… 밖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이 없나?]
[밖?]
엘레노아는 고개를 올려 제르노스를 보았다.
그는 전과는 찾아볼 수 없는 전능함이 몸에 깃들어 있었다.
그런 그를 보고 짜증이 난 엘레노아는 후드를 휙 올려 썼다.
[두고 봐… 내가 그놈 보내서 너 또 죽여버릴 테니까.]
[그라면… 무명을 말하는 건가?]
[그래! 아주 묵사발을 내놓을 거다 개자식아!]
[글쎄… 난 그자보다... ]
마왕은 초록빛의 행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물론 무명은 강하다.
과거의 약해진 자신이 고작 열합에 쓰러질 정도.
그의 검술은 가히 대단했고 실력은 이미 어지간한 초월자를 능가했으며, 마왕인 본인조차 놀랄 정도의 깊은 정신과 영혼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과연 힘을 되찾은 지금도 그런 식의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
‘그리고…’
[뭐. 눈 여겨보는 용사가 또 있냐?]
[있지.]
[누군데? 네가 보는 애가 있다고?]
여신은 초롱초롱해진 눈으로 마왕을 보았다.
[알려줘! 나도 보게!]
[...넌 모르는 건가.]
[아씨! 용사들이 몇십만 명이 넘는데 어떻게 다 알아! 난 너처럼 일일이 다 파악 안 한다고.]
[흠...]
마왕, 제르노스는 그자를 떠올리다 피식 웃었다.
여태껏 웃는 모습을 손에 꼽을 정도로 본 적이 없는 엘레노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뭔데, 생각하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 놈이냐?]
[간이 큰 놈이지. 가는 행보마다 정해진 길로 가지 않고 항상 새로운 길을 찾지. 나의 정예 간부들을 벌써 넷이나 잡아내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아.]
[오오…]
[게다가 최근에는 모든 정령왕들을 굴복시키고 정령왕을 직접 만들기까지 했지. ]
[진짜?!]
그 정령왕들을 다 굴복시켰다고?
그녀가 어버버 거리며 묻자 제르노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 그렇게 들으니 엄청 대단한 놈 같네.]
[그리고…]
[그리고?]
그는 살짝 멈칫하다 이내 한 번 더 웃었다.
[내 딸아이가 좋아하는 놈이지.]
[? 혹시… 정신이 나갔어? 누가 누구를 좋아해요?]
[특별할 일은 아니지 않나?]
[특별한 일이지 악마 새끼야. 악마가 용사를 어떻게 좋아해! 무슨 로맨스물도 아니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뭐 그런 건가?
엘레노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은근한 궁금함이 가슴속에서 몽글몽글 피어났다.
[...근데 용사는 반응이 어떤데? 네가 말하는 거 보면 용사도 마음이 있는 거 아니야?]
[글쎄. 녀석이 딸아이의 방에 자주 들어가는 걸 보긴 했다만.]
[헐. 이미 그렇고 그런 관계? 혹시 사위로 들일 생각이야?]
아침 드라마의 흥미진진한 내용을 보는듯한 그녀의 물음에 딸의 아버지, 제르노스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이미 방에 들락날락하는 거보면 진행 많이된거 같은데. 허락해 주자!]
[적어도 그가 나를 이긴다면 허락해 줄지도 모르지.]
[오! 딸을 얻기 위한 전투! 그럼 장인어른을 허락을 받기 위해 장인어른을 이겨야 하는 건가?]
[굳이 따지자면 그렇게 되겠군.]
정작 당사자들이 알면 난리 칠 상황이었지만 이 둘은 전혀 개의치 않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뭐 그렇고 홀리에린 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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