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화 〉 12. 홀리에린 (1)
* * *
지금의 나의 상태는 한계에 도달했다.
나쁜 의미는 아니다.
‘성장’의 한계치에 도달했다는 의미니까.
이미 레벨은 최종 수치에 도달했고, 어지간한 장비들은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 외의 버프나 스킬은 미미한 효율.
때문에 나는 남들이 보면 억 소리가 나올 정도의 장비들조차 전부 길드원들에게 넘겨준 상태다.
이번에 찬란한 빛을 극도로 강화 시켰으니 적어도 월드 어드벤처 내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모두 얻은 상황.
‘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게 있지.’
유일하게 성장 가능성이 남아있는 것이 남아있다.
*그라티아 세트 효과
*투구 / *갑주 / *각반 / *신발 / *장검 / 반지 / 견장
신성 수치 1000 증가 (현재 500 증가)
체력 20000 증가 (현재 10000 증가)
모든 스텟 100 증가 (현재 50 증가) ]
홀리에린의 초월자, 그라티아의 장비들.
제작으로 얻을 수 있는 장비들은 모두 얻은 상황이고, 나머지 장비인 반지와 견장은 그라티아를 사냥하거나 ‘진짜’ 그라티아에게 직접 받아야 한다.
“그런데 왜 장비들을 모으시는 거예요? 지금 윤 씨한테는 그 정도 스텟은 그리 효율이 없을 텐데.”
“원래 컬렉션은 다 모아야 기분이 좋거든.”
괜히 한두 개 빠져 있으면 불편하고 대칭이 안맞는 것 마냥 불안하다.
나는 옆에 워프를 준비하는 다윤이에게 웃으며 그리 말했지만 사실 그 이유만은 아니다.
그라티아는 초월자다.
그것도 행성의 내로라하는 정령왕이나 여신, 마왕과도 같은 격이 높은 초월자.
그런 자의 장비들을 모두 모은다면 지금 상태의 나에게도 유의미한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굳이 그라티아 까지 회수하지 않아도 돼. 좀만 있으면 알아서 찰 수준까지 왔거든.
“좋아.”
게다가 이번에는 굳이 그라티아까지 잡지 않아도 된다.
임무의 난이도가 상당히 줄어든 상황.
그래도 기왕 하는 김에 히아트 때처럼 장비의 추가적인 강화 효과를 받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후우… 알았어! 그렇게 할 테니까…”
베린은 어깨에 앉아 있는 작은 정령과 실랑이를 벌였다.
정령의 이름은 세피드.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지금 만나러 가는 녀석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강한 초월자였다.
지금은 그냥 강한 정령이지만.
슈아아악!
자그마한 봉을 쥔 히아트가 홀리에린의 ‘문’을 계속 두드리자 마침내 빛이 우리를 감싸고 어디론가 이동했다.
“도착?”
“도착이네요.”
“알았다고!”
백색으로 가득찬 도시.
홀리에린에 도착했다.
“왔다! 용사. 어떤가 나의 능력이!”
“그래 들어가 있어.”
“자, 잠깐! 여기는 빛이 많아서 나는 있어도 상관…”
슈륵.
나는 찬란한 빛을 다시 허리에 찼다. 검에서 아우성이 터져 나왔지만 무시한 체 동료들과 함께 성문 앞으로 다가갔다.
[홀리에린에 진입 중입니다...]
[도시의 주인, 그라티아는 부재중입니다.]
[대리자, 집행관 루소니아가 당신들에게 방문 사유를 묻습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우리의 앞에 펼쳤다.
나는 메시지를 보며 위쪽을 슬쩍 봤다.
새햐얀 성벽 위에는 백색의 갑주를 입은 팔라딘들이 투구 속 푸른 안광을 띠며 우리를 내려다봤다.
그 옆쪽에는 백의를 입은 사제들이 지팡이 들고 있었는데 언제든 주술을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는듯했다.
‘이걸 보니 확실히 리벤디아는 너무 프리하군.’
정령왕의 도시, 리벤디아는 이런 것도 없이 너무나도 편하게 들어올 수 있었다.
“우리는 용사다.”
나의 발언에 성벽 위 팔라딘과 사제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허나 술렁거리기만 할 뿐, 저 신성하고 튼튼한 백(白)문이 열리진 않았다.
[...방문 사유가 적절치 않습니다. 정확한 사유를 말해주십시오.]
“이거.”
나는 깐깐한 집행관, 루소니아에게 하나의 검을 보여주었다.
그라티아의 영혼석으로 만든 ‘그라티아의 장검’.
새햐얀 자태가 인상적인 검이 내 손에서 반짝이자 술렁거림이 더욱 심해졌다.
[...!]
[집행관 루소니아가 눈을 부릅뜹니다!]
[집행관 루소니아가 무기의 출처를 묻습니다.]
“만들었어.”
[집행관 루소니아가 당신의 말에 부정합니다.]
[정확한 출처를 말해주십시오. 그 무기는 당신의 손에 있으면 안 되는 무기입니다.]
“그건 네가 판단할 게 아니야. 집행관 루소니아.”
[...입장을 허가합니다.]
드드득─!
‘진작에 그럴 것이지.’
나와 동료들은 도시로 입성했다.
“젠장!”
“무슨 일입니까. 집행관님.”
흰색의 커다란 갑주를 입은 남자가 큰소리에 백색의 문을 열고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에 비해 훨씬 얇고 더 빛나는 갑주를 입고 있던 루소니아는 흐트러진 탁자를 정리했다.
“아, 크렉. 왔군요.”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도시에 괴... 아니 용사가 왔습니다.”
“용사… 말입니까?”
눈앞에 자신의 상사를 보던 팔라딘 단장, 크렉은 의문을 가졌다.
용사라 하면 빛에 있어서 그라티아님과 필적할만한 정도의 신인 ‘여신’의 대리자 아닌가.
감히 빛의 순위를 논하는 것이 불경하긴 하나, 자신이 모시는 신을 비교할 만큼 여신의 위명은 행성에서 뿌리내린 상식이자 누구나 인정할만한 존재였다.
그런 여신의 용사가 왔는데 왜 집행관님은 저리 화가 나신 걸까.
“용사 중에는 여신의 선택을 받고도 불경한 일을 저지르는 자가 종종 있다고 하던데… 혹시 그런 자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아니 그는 그런 자가 아니었습니다.”
“헌데 어찌…”
“......”
도시의 둘 밖에 없는 대리자이자 홀리에린의 유일한 집행관, 루소니아는 고민에 빠졌다.
그라티아님의 ‘권능’을 통해 본 그 남자의 빛은 상상이상으로 거대했다.
마치 여신의 대리인이 아닌 여신 그 자체가 온 것 같은 신성함 이었다.
마기같은것도 아니었고 신성함이 많다는것이 이 도시와 나아가 그라티아님에게 해가 될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도시에 아무런 이를 함부로 들일 수 없었고 사유를 물었지만…
‘그라티아님의 힘이 담긴 무기를 가지고 있었지…’
아주 잠깐 비추어진 무기지만 절대 그라티아님께서 하사한 무기가 아니다.
아무래도…
“가짜에게서…”
“네?”
“아, 아닙니다. 크렉. 용사가 왔으니 정예 팔라딘들을 대리고 그자를 안내해 주세요.”
“안내… 말입니까?”
“네. 아마 제사장 쪽도 일부 인원을 보냈을 것입니다.”
방금까지 용사의 도시 진입에 불만을 가진 것 아니었나?
단장 크렉은 의문을 가졌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집무실을 나갔다.
혼자 남은 남은 자리에 루소니아는 탁자를 툭툭 쳤다.
“뭔 짓을 하러 왔는지는 모르겠다만… 멋대로 되지 않게 해주지.”
나와 다윤, 베린은 부제사장 미누아라는 사람의 안내를 받아 도시 곳곳에 깔린 백(白)의 길을 걸었다.
도보의 역할을 하는 백의 길은 악한 자는 결코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로 신성한 길이라고 알려져 있다.
물론 백의 길 말고도 다른 도보가 있긴 했지만 부제사장은 우리를 백의 길로만 인도했다.
‘아무래도 시험하는 거겠지.’
이자들이 악(?) 한 자인가 아닌가.
마기가 없는 다윤에게는 당연히 영향이 없다.
베린은 세피드와 계약했고 어둠에 특화되어 있긴 하나, ‘어둠’은 악(?) 하지 않다.
어둠의 정령이 타락한 정령과 다른것처럼.
그리고 나는…
“...흐음.”
“...”
나는 최상위 악마인 리비엔을 수하로 두었고, 악마족의 절대적 이인자인 하페루아와 계약한 몸이다.
따라서 마음먹고자 하면 최상위 악마 이상에 버금가는 마기를 뿜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의 그 누구도 내가 마기를 가졌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정령왕 」
─역시 절대적 빛이 되니 그 대단한 그라티아가 두렵지 않은 것 같습니다. 누님.
─절대적이라 칭하기에는 너무 오만하다고 생각이 들지 않나?
─윽… 그래도 제법 괜찮지 않습니까?
─뭐… 쓸만하긴 하구나.
창백하리만큼 찬란한 빛이 내 주위를 감싸고 내 의식 사이로 히아트와 바람의 정령왕, 네메린느가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원래 리벤디아에 수복을 위해 남겨둘 생각이었지만 기어코 따라온다는 걸 말리진 않았다
정령왕들은 하나의 가족이니 새롭게 정령왕이된 히아트는 가장 어린 막내 취급을 받았다.
실제로도 한참 어린 막내고.
“길이 기네.”
“...그라티아님께서 만들어낸 길이니까요. 그분의 거신(巨?)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입니다.”
부제사장 미누아는 내 쪽을 슬쩍 돌아보며 그리 말했다.
눈처럼 새햐얀 백의를 입은 그녀의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지만 상당히 오묘한 느낌을 주었다.
“눈이 부시네요.”
내 옆에 붙어 걷던 다윤이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가뜩이나 햇빛이 쨍한데 온통 하얀 도시라 더욱더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나는 다윤의 손을 잡고 눈 주변에 짙은 어둠을 깔아줬다.
어둠을 사용하자 미누아는 내 쪽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힐끔 보았지만 어둠보다 밝은 빛에 고개를 돌렸다.
“이제 좀 괜찮지?”
“흐흐… 네.”
다윤은 어둠을 깔아준 것보다 손을 잡은 것에 더 의의를 두는 것 같다.
평소에도 많이 잡아주는데.
“여기서부터는 영역이 나뉘는데 우선 저희쪽으로…”
“미누아!”
철컥. 철컥.
양 갈림길 끝에서 건너온 백색의 팔라딘들이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크고 신성한 빛을 내뿜는 샛노란 머리카락의 남자가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고 미누아를 노려봤다.
“어딜 우리 쪽 사람을 데려가려고.”
“이해가 안 가는군요. 이분들을 데리고 온건 저, 부제사장 미누아입니다.”
“이분들을 들여보낸 건 집행관님이야.”
“그러면 그분이 먼저 데려가셨어야죠.”
미누아는 자신보다 두 배 이상 차이날 것 같은 체격을 보고도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미누아 옆에 서있던 사제들도 마찬가지였다.
“반론은 받지 않겠습니다. 정 의문이 있다면 제사장님께 말씀하시죠.”
“...용사님들은 어디쪽으로 가시겠습니까.”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팔라딘 단장, 크렉.”
“왜? 손님이 오셨는데 이분들이 직접 선택해야지. 언제부터 제사장 쪽이 손님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얻었지?”
“......”
미누아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나를 바라봤다.
팔라딘 단장인 크렉이라 불리는 남자도 나를 바라봤다.
선택의 시간인가.
“나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