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화 〉 12. 홀리에린 (4)
* * *
홀리에린의 가장 높은 곳, 둥지.
도시의 주인인 그라티아의 쉼터이자 그녀의 자식들이 머무르는 곳이기도 하다.
“어머니.”
[그래, 숙제는 다 했니?]
백조의 모습을 지닌 거체의 눈이 작디작은 어린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부모와 똑 닮은 순백의 머리카락과 하늘빛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여기 숙제에요.”
[흐음...]
아이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숙제를 검사하는 그라티아를 보았다.
여러 장의 종이를 한참을 펄럭이던 그녀는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다. 미카. 훌륭하구나.]
“헤헤… 이 정도야 별거 아니죠! 히딘 보다 제가 나아요!”
[흐음… 부정할 수가 없구나.]
그라티아는 한숨을 내쉬며 저 아래에 있을 자신의 또 다른 아이를 생각했다.
숙제도 열심히 하며 말을 잘 듣는 아들 미카와 달리, 딸 히딘은 자꾸만 사고를 치고 도시를 마구잡이로 배회한다.
몇 번 주의를 주긴 했다만 그렇다고 피해를 줄 정도는 아니니까.
‘정신적인 피해라면 좀 있겠지만.’
모시는 신님의 자식이 도시를 배회하는 데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을 거다.
하물며 사고뭉치인 아이라면 더더욱.
‘좀 쉴까 했더니. 다시 내려가 봐야 하나…’
그라티아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아무리 초월을 하고 고위신보다 높은 존재가 되었다 한들, 여전히 자신은 이 행성의 신들 중 하나였다.
가뜩이나 며칠 전까지 회의를 주구장창 하던 터라 괜한 심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저 아래에 위험한 건 없으니 큰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다들 잘 막아주고 있고.
그래, 그럴 것이다.
[미카, 다른 숙제해볼까?]
“네!”
그녀는 자신의 아이와 휴식을 이어나갔다.
나와 다윤은 3일간 호텔에 머무르며 시간을 보냈다.
이곳의 건물은 죄다 흰색이라 설마 방까지 하얀색일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러진 않았다.
만일 흰색의 방에 흰색 가구, 흰색 조명 같은 것으로 가득 찼다면 휴식이 휴식이 아니게 됐을 거다.
크렉과는 홀리에린의 이면에 관해 제법 긴 대화를 나누었다.
아무래도 이면에는 크렉과 팔라딘도 같이 갈 것 같다.
‘그 정도 부탁이면 충분한데… 굳이 네가 갈 필요가 있나? 네가 가면 도시는 누가 지켜.’
‘제 부탁이니 제가 가는 겁니다. 도시는 남은 팔라딘들로 충분 합니다. 사제 쪽도 있으니 무리는 없고요.’
‘음...’
‘그리고 저희 쪽이 먼저 들이닥치면 이쪽으로 오는 병력이 줄겠죠. 따라서 이곳의 수비는 그리 중요치 않게 될 겁니다.’
그러한 이유로 크렉과 열 명 정도의 팔라딘들은 이면행 확정.
우리로서는 딱히 필요 없는 인원이지만 자기들 일이니 뭐, 잡몹 정도는 맡기기로 했다.
“제사장 쪽은 말 없데요?”
“글쎄. 그쪽으로 가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
내가 원하는 것들은 전부 판테움에 있었다.
원래 시간이 나면 도시 구경도 할겸 ‘이그드라실’쪽에 가려했으나…
“으으… 찌뿌둥 하네요.”
아쉽게도 시간이 남지 않는 바람에 대부분의 시간을 호텔에서 보냈다.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새로운 힘을 얻은 다윤이에게 적응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윤의 직업인 월광검사는 달과 같은 검술을 구사하고 달의 힘을 이용하지만, 무트라와 동일한 힘이라 보기에는 어렵다.
마치 내 몸에 있는 세 가지 빛이 각기 다른 구성요소를 가진 것처럼.
때문에 3일 동안 다윤의 옆에 붙어 힘의 안정화를 도와주는 작업을 거쳤다.
완전히 조율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부작용으로 인해 삐거덕 거리는 일은 없을 거다.
“그나저나 베린이도 고생하네요.”
나는 다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로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피드와 대화를 나누던 베린은 다시 칠 영웅전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단검을 든 암살자 석상의 시험을 받으러 간 이후, 지금까지 오지 않고 있다.
“이제 3번이니… 적어도 우리가 열흘 밤 지나고 돌아오면 통과해 있겠지.”
“그래도 한 이틀 후면 통과하지 않을까요? 처음에는 어려워도 패턴만 알면…”
“다른 석상은 무트라와 달라.”
나는 무트라의 시험만 통과했기에 다른 시험의 정보들은 모르지만 하페루아에게 대충 설명은 들었다.
그중 가장 어려운 시험이 3개 있는데 하나는 제사장 베덴디스가 통과한 ‘주술의 영웅 에레’.
주술적인 능력이 신에 달할 정도로 높지 않다면 결코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난이도가 극악에 달한다.
또 다른 하나는 집행관 루소니아가 통과한 ‘검의 영웅 아즈라.’
전과는 달리 한쪽 분야에 신에 도달할 정도는 아니어도 되지만 단, 하나.
육체만큼은 신 이상의 능력을 보여야 한다.
‘아즈라의 시험은 검이라는 이명과 달리 맷집을 중시했으니까.’
마지막으로…
“단검의 영웅 크로아. 이건 진짜 무리지.”
단검의 영웅 크로아의 시험 상대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모든 능력치가 자신보다 열 배 높은 분신을 이기는 것.
심지어 능력치 뿐만 아니라 전투 습관이나 공격 패턴 등등… 모든 걸 동일하게 부여받는다.
그런 적을 오로지 단검으로만 잡아야 한다.
‘근데 웃긴 건 상대는 단검만 쓰는 게 아니라는 거지.’
가뜩이나 열 배나 강한 자신을 상대해야 하는데 상대는 단검이 아닌 마법이나 이능을 쓸 수도 있는 것이다.
때문에 단검 하나만을 주력으로 쓰는 자가 아니면 시험의 난이도는 급격히 상승한다.
내 설명을 들은 다윤이 입을 벌렸다.
자신이 겪었던 시험도 어렵긴 했으나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 것이니까.
“...그럼 어떻게 이기죠? 자신과 똑같이 생각하는데 열 배나 강하면 이길 수가 없잖아요.”
“똑같이 생각하는 건 처음뿐이야. 계속해서 도전하면 강해진 능력치는 동일하게 변경되지만 생각까지는 바뀌지 않거든.”
분신이 습득한 생각과 공격 패턴, 습관 같은 것들은 처음 도전 시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능력치는 도전할수록 갱신되니…
결국 시험을 통과하려면 수차례의 도전은 불가피하다.
다윤은 곰곰이 생각하다 뭔가 깨달은 듯 손뼉을 짝! 쳤다.
“그래서 윤 씨가 베린이 한테 안 알려준 거였군요. 대비했다면 그 대비를 한 정보가 그대로 입력됐을 테니.”
“그렇지.”
이건 다윤이처럼 알려줄 수 없었다.
만일 내가 ‘자신보다 열 배나 강하고 똑같은 생각을 가진 분신을 이겨야 한다!’ 라고 말했다면 베린은 어떻게든 이길 방법을 강구했을 것이다.
그러면 상대는 자신보다 열 배나 강하고 똑같은 생각을 가진 분신을 ‘대비한 분신’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시험의 내용을 알려주는 건 오히려 상대를 더욱 키우는 일이었다.
“으음… 베린이 통과할 수 있을까요?”
“못해도 상관없어. 베린에겐 세피드가 있으니까.”
수십, 수백 번을 도전해가며 크로아의 시험을 통과하는 것보다 그 시간에 세피드의 수련을 받는 것이 훨씬 낫다.
크로아는 스스로 차원을 넘을 수 없는 초월자의 힘을 빌린 영웅에 불과하지만,
세피드는 스스로 차원을 넘은 3등위 이상의 ‘진짜’ 초월자니까.
애초에 비교할 거리가 못 된다.
‘세피드도 가망이 없다 싶으면 포기시키겠지.’
애초에 이 일을 부추긴 것도 세피드다.
세피드가 베린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베린의 성장은 전적으로 그녀에게 맡겼으니까.
똑똑.
“용사님.”
“어, 크렉. 갈 시간인가?”
“네. 준비가 되시면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드디어 이면의 문이 열릴 시간이다.
홀리에린의 이면은 열밤이 지나는 날, 도시 외각의 거대한 통로가 열린다.
따라서 우리는 백문을 통과해 도시 외각으로 나가야 했다.
그래야 했는데…
“미누아?”
“이면에 간다고 들었습니다.”
백문을 막고 있는 부 제사장 미누아와 열댓 명의 사제들이 보였다.
사제들 역시 평범한 사제는 아니다.
적어도 정예 사제쯤 되는 수준.
크렉은 우리의 앞에 서며 말했다.
“설마 막는 건 아니겠지? 우린 마수를 처리하러 가는 길이야. 도시의 수호를 목적으로 한다고.”
“수호가 목적이라면 전처럼 수성만 하는 것이 피해를 줄이는 길이 아닐까요? 뭐가 있을지 모르는 적진 한복판에 가는건 오히려 도시를 위험하게 만드는 일이죠.”
당신 역시 도시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미누아가 그리 말하자 둘의 시선이 마치 레이저라도 나올 듯이 신경전을 벌였다.
크렉은 크흠! 거리며 나와 다윤을 가리켰다.
“용사님이 있는데도 그런 말이 나오나?”
“...흠. 그렇군요.”
백의 사이로 아주 조금 보이는 벽안이 우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저 정도의 실력을 가진 용사님이라면 문제가 없겠지요.”
“그래, 그러니 이제 비─”
“그러니 저희도 가겠습니다.”
“뭐…?”
크렉이 귀에 벌레라도 들어간 표정으로 묻자 미누아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나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열이 낫겠지요. 저희 제사장 쪽도 합류한다면 사악한 적을 손쉽게 물리칠 수 있을 겁니다.”
“...너까지 가면 성은 누가 지켜.”
“크렉, 지금 도시에 누가 있는지 아십니까?”
미누아의 물음에 크렉의 입이 닫혔다.
지금 도시에는 자신보다 훨씬 강한 집행관과 제사장.
그리고 더 나아가 위대한 신, 그라티아님까지 있으시다.
물론 그라티아님이 직접 나서는 일은 도시의 장벽이 뚫리기 전까지 없을 테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적어도 두 대리자님이 나설 것이다.
하지만…
“그분들이 나서기에는 직함이…”
“그분들도 한때 저희처럼 도시를 수호했습니다.”
미누아는 백의를 펄럭거리며 앞장섰다.
“당신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 두 분의 위용을.”
“...”
“더군다나 당신과 저, 그리고 용사님이 이면을 몰아붙인다면 사악한 무리들은 습격할 생각을 하지 못할 겁니다. 그때가 되면 두 분이 나서지 않아도 남은 병력으로 충분하겠지요.”
그리 말한 미누아는 싱긋 웃으며 내 쪽을 바라봤다.
묘한 느낌이 드는 눈빛은 여전히 특이했다.
그리고 밤.
이면의 문이 열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