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97화 〉 12. 홀리에린 (5) (197/318)

〈 197화 〉 12. 홀리에린 (5)

* * *

‘­

빛의 도시에 어둠이 찾아오고 하늘은 빛을 잃고 잠든다.

마침내 열 번째 밤이 찾아오자 붉은색의 문을 통해 마수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수들의 외견은 바깥에서 볼 수 있는 괴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딱 하나.

크륵.

그 강함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검붉은 창을 쥐어든 고블린이 흉흉한 마기를 뿜어내며 정예 팔라딘을 습격한다.

그에 팔라딘은 백색의 빛이 번쩍이는 방패로 막아낸 뒤 기다란 장검을 들어 베어낸다.

허나 고블린은 피를 좀 짙게 흘렸을 뿐, 치명상이 될 정도는 전혀 아니었다.

크아아아!!

한참을 고블린과 실랑이를 벌이던 정예 팔라딘은 5분간의 사투 끝에 간신히 고블린의 목을 베어냈다.

“후우… 후우…”

“...생각 보다 너무 고생하는데?”

입구에서 쏟아지는 마수들을 한차례 쓸어버리고 이면에 들어온 지 10분.

고작 초입인데도 팔라딘들은 쩔쩔매며 마수들을 잡고 있었다.

나의 의문에 20m는 넘을 것 같은 오크를 두 동강 낸 크렉이 큼큼 거리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이면에서의 마수들은 강해지니까요. 밤이기도 하고.”

“흐음… 그렇게 쳐도 그리 강하진 않은데.”

물론 새롭게 시작된 시즌에는 마왕 쪽의 몬스터가 극악할 정도로 강해진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쳐도 홀리에린의 정예병들은 매번 마수들의 침략을 막아내던 병사들.

고작 고블린 하나에 저렇게 고전하는 게 이상했다.

“성벽은 그라티아님의 영역이니까요.”

“미누아…”

팔라딘과 달리 사제의 주술을 이용해 하나씩 처리해 나가던 미누아 역시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라티아님의 영역 안에선 사악한 무리들은 힘을 못쓰죠. 따라서 성 안에만 있는다면 그리 무리가 없었답니다.”

물론 여기는 영역에 닿지 않아 약해지지 않는 거죠.

미누아는 싱긋 웃으며 그라티아를 상징하는 백색의 긴 깃털 목걸이를 쥐었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달에게 향했다.

아니, 달을 연상케할 정도로 기이한 여인.

“...저분을 보면 약해진 것 같지만요.”

미누아의 오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자, 크렉 역시 혀를 내두르며 무자비하게 마수 사이를 해집고 다니는 용사를 보았다.

붉게 떠오른 달의 기운이 마치 저 용사의 의지대로 움직여 밝게 빛나는 검에 스며든다.

그렇게 스며든 기운은 굉장한 상승효과를 발휘하며 그 질기고 단단한 마수의 육체를 두부를 베듯 일격에 베어냈다.

‘역시 용사는 용사인가.’

바깥의 용사들 대부분은 자신보다 강한 자가 그리 많지 않다지만,

어디까지나 예외는 있는 법이다.

크렉이 그리 생각하며 다시 창을 들고 토벌에 나섰다.

싸우는 이가 어찌 되었든 본인은 할 일을 행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 이곳에 자처해서 왔으니까.

“슬슬 정리가 되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입구를 통해 들어오긴 했다만 이면과 연결된 장소에 떨어진 건 아니다.

나도 모르는 장소.

그러나 지형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던 나는 여기가 맨 아래 지역인 것은 파악했다.

아래 지역에는 바깥과 마찬가지로 고블린, 오크 같은 낮은 수준의 몬스터가 나타난다.

당연하게도 높이 올라갈수록 더 높은 수준의 몬스터가 나타나고.

“당신은 안 싸우시나요?”

사제들을 보내고 여전히 떠나지 않았던 미누아가 물었다.

그녀는 여기 있었지만 저 목에 걸린 목걸이를 통해 사제들에게 힘을 보태주고 있었다.

“고작 여기서 싸우기에는 급이 안 맞지.”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미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이유만은 아니긴 하나 지금 밝힐 건 아니다.

­

홀리에린의 이면은 총 열 단계로 이루어진 탑과 같은 공간이다.

현재 발을 딛고 있는 이곳은 1층의 공간으로 낮은 수준의 마수들이 배회하지만 숫자만큼은 다른 단계보다 월등히 많다.

타닥 타닥.

우리는 2층로 올라가는 문을 앞에 두고 모닥불을 두고 앉았다.

다소 거칠게 싸워온 팔라딘과 사제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지만 나를 비롯한 다윤,미누아, 크렉은 휴식을 취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과 같이 쉬고 있는 중이다.

“두 번째 이면은 다음날 열립니다. 그때까지 푹 쉬십시오.”

이면의 문은 하룻밤에 한 개씩 열린다.

그것도 그냥 열리는 게 아니고 서있는 층을 일정 수준 이상 토벌해야만 열린다.

만일 그 하룻밤에 그 수준을 채우지 못하면 자격이 없다고 판단해 다시 1층으로 보내버린다.

문제는 그렇게 보내지면 올라왔던 층보다 한 단계 높이 도달하지 않는 이상,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된다.

‘이런 이상한 룰 때문에 이곳에 갇혀있는 사람도 제법 있었지.’

물론 그때는 그리 위험하진 않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곳의 몬스터는 바깥보다 훨씬 극악할 정도로 강해진 상태니까.

사제들은 사제들끼리 좀 떨어진 곳에 누워 수면을 취했고, 팔라딘들은 팔라딘끼리.

다윤이는 좀 쉬다가 찌뿌둥 하다고 더 사냥에 나섰다.

미누아는 그런 다윤을 도와준다며 따라갔다.

타닥 타닥…

주황빛의 불이 어두운 공간을 밝히지만 이곳은 여전히 어두웠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너는 크리드아의 후손이지?”

크리드아.

팔라딘들의 영웅적인 존재이자 실제로 칠 영웅전에 안치되어 있는 영웅들 중 하나.

전 시즌의 팔라딘 단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그였다.

크리드아와 크렉의 얼굴은 완전히 똑같진 않았으나 풍기는 분위기와 석상과 같이 서있는 모습이 상당히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습니다.”

크렉은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담담히 얘기했다.

그런 그의 표정은 분노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리운 것 같기도 했다.

“그분은 위대했죠. 이면을 처음 발견하시고 무려 7번째 이면까지 도달하신 분이니까요. 사실상 팔라딘들은 도시의 수호자로 불리지만 그분에 비하면 그저 검과 갑옷만 입은 병사에 불과합니다.”

그분은 그리했으니.

불꽃을 바라보던 그의 푸른 눈이 저 문을 향했다.

푸른 눈은 문을 뚫어지듯 바라보다 시선을 거뒀다.

“그래서 이곳에 오겠다고 한 건가?”

“그분이 흔적을 찾아야 하니까요. 사실상 대부분의 칠 영웅들은 7번째 이면 이후 연락이 끊겼으니 말입니다.”

이들로서는 8층에는 뭐가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알고 있지만.

빈 허리춤을 쓸은 나는 다음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

미누아는 자신의 앞에 달빛처럼 쇄도하는 용사를 보았다.

확실히 강하긴 하다.

그 많던 마수들이 전멸에 가까울 정도로 죽어나가고 있으니까.

하지만...

­녀석들이 이면에 직접 들어간다고 하더구나. 기왕 할 일도 없으니 너도 따라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혹시 모르지 않느냐. 네가 본 그자가 정말로 그라티아님에 필적할지, 아니면 그냥 특이한 그릇만 가진 존재일지.

‘...확실히.’

‘그’ 만큼은 아니다.

같이 왔길래 어느 정도 기대했건만 자세히 보니 그에 비하면 성인과 어린아이 만큼에 차이가 났다.

‘...그런 존재가 둘이나 있는 것도 말이 안 되겠지.’

“다윤 용사님.”

“네?”

“슬슬 날이 밝을 것 같습니다. 돌아가죠.”

“아, 그, 그럴까요?”

다윤은 월광검을 든 체 머리를 긁었다.

달 아래에서 싸울 일이 그리 많지 않아서 그런 건지 몰라도 월광검과 함께 움직이는 감각은 상당히 좋았다.

마치 검과 하나가 되어 싸우는 기분.

수련의 영향인지 시험의 영향인지 그것도 아니면.

‘저 달의 영향인지.’

다윤은 자신의 손에 들린 광채를 내뿜는 월광검을 빤히 바라보다 김윤이 기다리는 문 앞으로 돌아갔다.

­

2층.

두 번째 이면은 주술을 사용하는 트롤 마법사들이 즐비한 곳이다.

이면의 모든 몬스터들은 기존의 몬스터들보다 마기를 더욱더 짙게 받아 훨씬 강해진다는 설정이 있다.

문제는 새롭게 시작된 시즌은 애초부터 기존 몬스터들이 강해졌다.

그렇게 강해진 몬스터는 이면에 의해 한 번 더 강해질 테고…

“허억… 허억…”

결국 이면의 몬스터들은 과거의 일반 몬스터보다 수십, 수백 배 강해진 괴물인 것이다.

“크하악…”

푸슉.

“후우… 죽겠네 진짜.”

정예 팔라딘 하나가 간신히 죽인 트롤 마법사 시체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니, 이걸 트롤 마법사라 봐야 할까?

“미친… 무슨 성벽만 해 트롤이…”

도시의 성벽 위에서 약해진 마수만 상대하던 팔라딘은 기겁하며 죽은 트롤의 상태를 다시금 확인했다.

혹시 간신히 잡은 이 괴물이 다시 살아날까 봐.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이 지친 몸으로 저항도 하지 못하고 바로 죽으리라.

하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고 불길한 마기만을 내뿜었다.

“후우…”

“끝냈군. 수고했다.”

“아! 단장님!”

팔라딘은 검녹색의 피를 뒤집어쓴 단장을 보고 존경심을 느꼈다.

‘역시 크렉님이시군. 열 마리가 넘는 트롤을 혼자서 상대하다니.’

물론 저기 트롤을 슬라임처럼 쓸어버리는 용사가 있긴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애초에 용사는 칠영웅전의 시험을 단 번에 통과한 괴물이다.

집행관님과 제사장님만이 통과한 영웅의 시험을 통과했으니 당연히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겠지.

“슬슬 다들 힘이 부치기 시작하니 3층부터는 같이 잡도록 해라.”

“아, 네, 넵.”

크렉은 머리를 긁적이는 팔라딘을 보고 상황이 비슷한 다른 쪽도 보았다.

다들 그래도 팔라딘 중에는 꽤나 힘을 쓰는 자들.

자존심 때문에 혼자서 마수들을 상대했지만 더 이상 혼자서 잡기에는 마수의 능력이 너무 강하다.

파앗!

백색의 빛이 미누아의 주변을 감싸고 열 명의 사제들이 하나로 뭉쳐 트롤의 움직임을 억제한다.

그런 뒤 미누아의 손에서 뻗어나간 두 개의 빛의 번개가 트롤의 심장과 머리를 관통했다.

‘쯧. 역시 미누아는 미누아인가.’

아무리 단신의 능력은 약하긴 해도 뭉치면 단순히 11명이상의 효율을 발휘했다.

하나씩 잡아 토벌의 속도가 느렸던 제사장 쪽이지만 어느새 그 숫자가 팔라딘 쪽을 넘어섰다.

크렉은 고개를 저으며 가득 찬 빛을 이용해 온몸에 피를 지워냈다.

‘역시 미누아도 나와 같은 목적이겠지.’

그녀 역시 영웅의 후손.

아마도 자신과 같은 목적이리라.

크렉은 그리 생각하며 토벌을 이어나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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