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98화 〉 12. 홀리에린 (6) (198/318)

〈 198화 〉 12. 홀리에린 (6)

* * *

­

이그드라실은 거대한 백(白)의 나무를 기반으로 탄생된 땅이다.

뿌리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제사장, 베덴디스의 시야 안에 있으며,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기둥은 베덴디스의 힘이 아래로 뻗어 나가는 통로다.

그리고 그 위는…

“베데!”

“네, 히덴아가씨.”

“루쏘!”

“...네.”

이그드라실의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곳.

가지 위, 커다란 백색의 잎 위로 세 명의 존재들이 탁자를 두고 자리에 앉아있었다.

작은 한 사람과 그보다 훨씬 큰 둘.

언뜻 보면 작은 한 사람이 제일 위치가 낮아 보였으나, 중앙 자리에 앉았다는 것과 그녀에게서 흐르는 거대한 빛이 그녀의 높은 위치를 증명해 주었다.

“서로 싸우면 안 돼~”

“...저희는 사이가 좋습니다. 히딘님.”

“난 그렇지 않습니다. 베덴디스.”

허리까지 올 정도로 은발의 긴 머리카락과 청색의 눈.

휘황찬란한 백색의 갑옷을 입었지만 전혀 갑옷이라고 생각이 안 들정도로 자연스러운 움직임.

도시의 유일한 집행관, 루소니아는 베덴디스를 노려보았다.

“어허! 싸우지 말라니까!”

“그렇군요. 잠시.”

백색의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여자아이가 눈을 부릅! 뜨고 그녀를 쳐다보자, 루소니아는 위대한 존재를 향해 싱긋 웃으며 손가락을 한번 튕겼다.

“어! 머무이!”

왕!

자신과 똑같은 색의 강아지를 데리고 온 팔라딘에 의해 소녀는 어느새 자리를 박차고 강아지를 따라갔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베덴디스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신님의 자식이나 인간의 자식이나 그리 다르지 않구나.”

“...히딘님은 그런 것들과 차원이 다르십니다. 베덴디스.”

지금 누구와 누굴 비교하는 겁니까.

이제는 단둘만이 남은 공간에 도시의 두 대리자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한참을 신경전을 벌이던 베덴디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아무도 먹지 않은 차를 슬쩍 마셨다.

“자네와는 제법 오랜 시간 일을 보냈군.”

“그렇죠.”

“그런 자네는 여전히 과거와 똑같구나. 뭐, 젊은 육체가 좋긴 할테니.”

껄껄 웃는 베덴디스는 백발이 눈에 띄는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과거 자신과 같은 젊은 시절의 베덴디스를 회상하던 루소니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난 당신이 더 이해가 가지 않군요. 굳이 그런 모습을 취할 이유가 있습니까?”

수명에 제약이 있거나 수준이 낮은 인간들은 서서히 나이가 들수록 힘이 줄고 신체가 노화된다.

아니, 사실 대부분의 생명이 그러하다.

하지만 이들은 그라티아님의 가호 아래 평생을 살 수 있는 존재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원하는 모습의 나이대로 변할 수 있다.

때문에 저런 ‘비효율’적인 노인의 육체를 가진 베덴디스를 결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가호로 인해 그러한 제약들은 어느 정도 낮아진 상태이나, 굳이 하고자 한다면 젊은 육체가 월등히 낫다.

“이유야… 당연히 우리의 후대들을 위한 게 아닌가.”

베덴디스는 차를 살포시 내려놓았다.

“언젠가는 우리도 물러나야 할 때가 올걸세. 이 모습은 그때를 위한 연습이라고 볼 수 있지.”

“...우리의 삶은 무한합니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나?”

이들은 이미 천년을 넘게 살았다.

영물이나 신에 비하면 그리 오래산건 아니지만 ‘인간’ 치고는 매우 오래 산 셈이다.

인간이 천년을 살아온 경우는 행성 전체를 뒤져도 몇 없다.

아무리 강한 육체와 불멸의 능력을 얻는다 하더라도 인간의 영혼은 그렇지 않으니까.

태초부터 오랜 시간을 살도록 설계된 영물과 신과 달리, 인간의 영혼은 너무나도 나약했다.

그리고 그런 영혼의 최후는 타인에 의한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설마, 스스로 목숨을 끊을셈입니까?”

“설마.”

그녀의 물음에 제사장, 베덴디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후임이 크지도 않았는데 죽을 수 없지. 내 죽음을 그라티아 님께서도 바라지 않으실ㅊ테고.”

“...”

“게다가 나를 원하는 도시의 주민들이 있는데 내가 어찌 죽겠는가.”

그가 허허 웃었지만 루소니아는 싸늘한 눈빛을 띠었다.

그 말은 저 애송이 두 놈이 크면 그런 짓을 하겠다는 소리 아닌가.

아직 죽음이라는 것을 추호도 생각하지 않은 루소니아는 탁자를 가볍게 쳐냈다.

“난 죽을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도 허튼 생각하지 마시죠.”

“자네보고 영면하라는 소리는 안 했다만.”

“은연중에 같이 잠들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겁니까.”

“부정할 수 없군.”

베덴디스는 질색을 표하는 루소니아의 얼굴을 보며 이제는 석상으로밖에 찾아볼 수 없는 동료들을 모습을 떠올렸다.

한때 도시를 위해 싸우고,

도시를 위해 나아가며,

도시를 지키기 위해 이면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주했다.

그 안에 사는 괴물과 절대 밝혀져서는 안되는 ‘그것’이.

­

5층.

어느새 이면에서 시간을 보낸 지 5일이나 지났다.

3층~4층까지는 팔라딘과 사제들도 충분히 활약할 수 있었다.

애초에 그들 하나하나는 약하지 않고 뭉치면 어지간한 마수 무리가 몰려오더라도 상대가 가능했다.

하지만 5층부터는 달랐다.

검붉은 연기를 내뿜는 악령.

망령 지대의 악령을 본뜬 마수가 거대한 낫을 들고 칩입자를 사냥한다.

팔라딘들의 빛의 방패는 악령의 쇄도를 막지 못했고,

사제들의 주술 합작은 악령의 움직임을 조금도 봉쇄하지 못했다.

“후우...”

악령 셋를 베어낸 크렉은 숨을 고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5층부터 마수의 수준이 급격히 상승한다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 수준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악령 하나하나가 정예 팔라딘 이상의 강함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크렉은 이를 꽉 물었다.

고작.

고작 5층인데도 이리 고전하다니.

이래서 언제 7층 너머에 도달하고 언제 이곳의 보스와 마주한 단 말인가.

물론 보스는 용사의 힘을 빌리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진짜로 용사가 보스를 처치한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 많은 영웅들조차 7번째에서 좌절했는데.’

애초에 크렉의 목적은 7층, 혹은 7층 너머의 있을 크리드아의 흔적이다.

촤악!

“...! 크윽!”

갑작스러운 기습에 크렉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주변의 어둠 공간을 가득 메운 칼날의 쇄도가 크렉을 집어삼키려 들었다. 점점 더 빨라진 칼날은 마치 폭풍처럼 그 크기를 키워 나간다.

콰가가가가!!!

“흐읍!”

폭풍 속에서 힘을 고른 크렉은 위대한 그라티아님의 빛을 끌어내어 악령의 폭풍을 갈라냈다.

촤악…

그그그극…

“허…”

하지만 폭풍은 잠시 갈라졌을 뿐.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 원상태로 복구되었다.

크렉은 폭풍 속에서 수십, 수백 번 베이면서도 침착하게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대검을 쓰던 자신의 무기를 창으로 변환시켜 몸을 웅크리고 빛의 힘을 끌어모은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모인 빛은 하나의 거대한 창이 되어 악령의 가슴을, 심장의 코어를 조준했다.

“크흐… 가라!”

콰훙!

폭풍을 뚫고 쏘아진 거대한 창이 쏘아진다. 그에 악령은 폭풍을 멈추고 칼날을 옆면으로 세우며 공격을 막아낸다.

카가가각─ 칼과 창의 파열음이 커져나가고 서서히 힘이 다할 찰나.

외부에서 흘러들어오는 빛이 창에 더해져 폭발적인 속도를 내었다.

─….!!!

어느새 악령의 가슴팍은 커다란 구멍이 생기며 연기처럼 흩어졌다.

악령이 완전히 사라지자 크렉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후욱… 후욱… 제길, 빚을 졌군.”

“저흰 경쟁자가 아닙니다.

목걸이를 쥐며 신성한 빛을 내던 미누아가 허공에 붕 뜨듯 다가왔다.

“감히 그라티아님의 이면 속에 숨어 사는 악한자를 토벌하는 일. 확실한 토벌을 위해 서로를 돕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도 도움받은 건 받은 거지.”

크렉은 자신의 손에 들린 창을 바닥에 꽂으며 일어났다.

“빚은 기억해둬라. 그만한 대가를 치러줄 테니 .”

“예.”

“...거절은 또 안하네.”

“굳이 준다는걸 안 받을 이유 역시 없지 않습니까?.”

백의 사이로 보이는 벽안은 둥글게 휘었다.

역시 오래 보았지만 이상한 녀석이다.

“용사님들은?”

“다윤 용사님은 ‘방위’의 악령을 둘 잡았습니다. 당신이 하나를 잡았으니 이제 마지막이군요.”

방위의 악령.

다섯 번째 이면은 악령의 모습을 한 마수들이 가득한 곳이다.

그리고 그중에는 네 마리의 악령한 악령이 존재한다.

‘하나를 겨우겨우 잡을 동안 둘을 잡았단 말인가.’

심지어 그 용사는 팔라딘들과 사제들을 죽지 않게 도와가는 와중에 방위의 악령까지 잡은 것이다.

‘...’

어쩌면 정말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김윤 용사님은 마지막 악령을 잡으러 가신 건가?”

“네. 그쪽은 그분이 맡을 터이니 저희는 주위의 마수들을 정리하고 문으로 가 있으라고 하더군요.”

“...음. 알겠다.”

뭔가 걸리는 게 몇 개 있긴 하지만 괜한 생각일 것이다.

그래, 그렇겠지.

­

“윤 씨~”

“...”

“윤 씨!”

“...어.”

방위의 악령 중 마지막.

모든 악령들의 지배자이자 군주의 악령, 로메니안.

악령의 신을 앞에 두고 멍하니 있는 김윤의 곁으로 다윤이 다가왔다.

이미 수백, 수천의 악령을 벤 월광검은 저 앞에 있는 강대한 적을 베고 싶다는 듯 웅웅거렸다.

“가능해요?”

“...충분. 할걸?”

“무리 같은데…”

“뭐. 해보면. 알겠지.”

김윤은 불안정한 움직임으로 검을 꺼내들었다.

찬란한 빛이라기에는 너무나도 형편없는 검.

하지만 그 검이 히아트의 기운이 담긴 검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이윽고 김윤이 검을 들고 로메니안에게 도약했다.

적대 의사를 확인한 로메니안이 수천의 악령들을 소환했지만.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닌가 몰라.”

월광식(月光?)

유월(月) ─ 만령살(???).

중얼거리던 다윤의 월광검이 만 갈래로 쪼개져 악령들을 일격에 모두 죽여냈다.

그리고 로메니안의 지척까지 도달한 김윤의 검이 그를 또다시 베어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