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화 〉 13. 영웅 (2)
* * *
갑작스레 열린 이면의 문.
열흘을 주기로 열리는 문에는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마수들이 쏟아졌다.
마수는 과거 수백 년간 싸워왔던 것들과는 차원이 달랐으며, 그 수가 수천, 수만에 달했다.
이러한 마수들의 침공은 잊혀진 영웅들을 필요로 했다.
아홉의 영웅은 과거처럼 도시를 침공하는 마수들을 상대해 나갔다.
마수를 베고, 가르고, 태우고, 묶고…
각각의 분야에 최고점에 달한 아홉의 영웅은 이전처럼 도시를 막아내기 시작했다.
물론 마수는 전보다 매우 강해지고 그 수가 많아졌다.
하지만 영웅 또한 강해졌다.
그들은 이미 그라티아의 가호를 받았기에.
사람들은 이면에서 쏟아지는 마수의 파도에 기겁했으나 기대 이상으로 잘 막아내는 영웅을 보고 다시 안심했다.
‘이번에도 별 무리 없이 막겠구나.’
‘역시 신님의 가호를 받은 영웅이 있으니.’
‘역시 영웅들이야!’
수많은 이들은 영웅을 찬양했다.
그리고 다시 익숙해져만 갔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들이 모셔야 할 것은 오직 위대한 신, ‘그라티아’ 하나.
그 외의 영웅들은 그저 신님의 가호를 받은 병사들에 불과했다.
모든 공적을 신께 돌리고,
모든 업적을 신의 것으로 치부했다.
다시 한 번의 사람들의 변화를 본 영웅 중 하나는 이대로는 안 됨을 직감했다.
우리의 존재가 그저 신의 부속품인가?
그저 우리는 집 잘 지키는 개에 불과한가?
영웅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신은 위대하다.
그라티아는 위대하다.
그리고 우리도 위대해질 수있다.
하지만 우리가 위대해지기에는 부족하다.
좀 더 강한 위험이.
좀 더 우리를 필요, 아니 갈구하고 간절할 수 있는 기회가.
[재밌는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
그리고, 그 기회가 찾아왔다.
저 눈앞에 로드리아는 분명 가짜지만 진짜 이상의 강함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저 붉은 창은 제힘은 아니다.
로드리아는 환각 외에 아무것도 못쓰는 얼간이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수십 개의 붉은 창이 내 육신을 찢어발기려 들고 있었다.
─하하! 전과 같은 힘이 느껴지지 않는군! 제라드 님을 죽이던 그 힘은 어디 갔나!
‘말이 많네.’
진짜를 모방해서 그런가.
가짜 역시 말이 제법 많았다.
나는 아주 섬세할 정도로 힘을 분배해 창의 쇄도를 전부 분쇄했다.
‘1%? 아니, 그보다 더 적겠군.’
‘위’에 있는 본체는 이미 과한 능력을 사용한 상태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능력을 쓰기 위해.
당연하게도 눈을 가려야 하니 힘의 크기를 줄여야 한다.
그리고 그 줄어든 힘을 쪼개 분신을 만들고, 그 분신조차 힘을 나눠쓰는 중이다.
즉, 나는 호수에서 퍼낸 물컵 하나 정도의 능력만을 사용하는 셈이다.
나는 백색의 검을 휘둘렀다.
힘은 극히 약하지만 최강자의 기술을 따라 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크읏!
‘옅다.’
절단되듯 잘려나간 왼팔을 금세 회복하는 로드리아를 보고 혀를 차며 빠르게 달려들었다.
히아트의 빛이 검신에 스며들며 궤적을 남기듯 로드리아의 목을 노린다.
그에 로드리아는 날개를 빠르게 회전시켜 살짝 뒤로 물러난 뒤 꾸득! 소리와 함께 거대한 대검을 소환해 그대로 검을 산산조각 내었다.
부러진 검의 손잡이를 미련 없이 버린 후 빠르게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어차피 이 검은 히아트의 빛을 가공해 만든 검.
부러진다면 하나 더 만들면 그만이다.
‘다른 검들이 넘치긴 하지만… 그럴 이유가 없지.’
초월자를 상대하는 데에는 초월의 힘이 필요하다.
물론 아예 안 통하는 건 아니지만 레전드리 장비들을 고작 저런 놈에게 부러져야 한다는 건 조금 아깝다.
그 아래라면 이 보급형 찬란한 빛이 훨씬 낫고.
하나의 빛의 검 대신 수십 개를 만들어 그대로 로드리아를 향해 날려보냈다.
다윤의 무형검, 이기어검을 염력과 마법을 이용해 적당히 응용한 기술.
─이 정도로!
파칵!
빛의 검들이 흘러나오는 검붉은 마기에 녹아내린다.
물론 다 막지 못하고 여러 개가 꽂히긴 했으나 로드리아의 재생능력에 의해 전부 수복되었다.
녀석은 히죽 웃으며 검붉게 물든 방패와 목걸이를 꺼내들었다.
분명 크렉과 미누아의 물건이다.
“용케 그 둘을 환각에 넣었네.”
─영웅도 아닌 버러지들이야… 뭐 쉽지 않나? 한 놈은 바로 걸리더만.
놈이 아니라 년인가?
로드리아는 여전히 실실 웃으며 나를 도발했다.
로드리아의 진짜 능력은 본인 자체의 능력이 아니다.
자신의 환각에 넣은 자의 능력을 고스란히 쓸 수 있는 것.
물론 격에 맞지 능력은 당연히 불가하겠지만 애초에 그런 자는 환각에 넣을 수도 없을테니까.
정예 팔라딘과 사제들은 7층에 올라가지 않고 6층에서 머무르기로 했으니 저 둘은 같이 있다 당했을 것이다.
─난 생각한다. 왜 제라드 님이 나를 선택했을까.
“...”
─그분이 나를 마지막에 도와주셨지. 그때의 네놈은 정말 강했어. 아니, 네놈이 강한 게 아니지.
네 옆에 있던 여우랑 고양이가 강했던 거지.
로드리아는 어깨에 걸친 창을 건들거리며 이죽였다.
─서로 나누어진 환각의 공간을 넘나들며 버러지들을 도와주던 여우나, 기이할 정도로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제라드 님에 죽음에 관여한 고양이나.
─아~주 마음에 안 들었지. 아! 물론 너도 강하긴 했어. 다만 둘이 없었다면 넌 그냥 환각 속에서 영원히 살고 있었을 거야.
“...”
─제라드 님의 힘을 받은 나의 환각 속에 영원히...
“선후가 바뀌었군.”
슬슬 회복할 때가 됐을 텐데.
「▼▼정령왕 」
나는 몸속에 찰랑거리는 아주 ‘작은’ 힘을 느꼈다.
물컵이 하나에서 세 컵 정도로 늘어난 수준.
하지만 저 불안전한 반초월자 악마 하나 정도는 충분하다.
“녀석들이 없으면 이 아니라.”
─무, 무슨 짓…
꽈드득─
로드리아의 육체가 점점 뭉개진다.
아까보다 조금, 하지만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압도적인 ‘빛’의 무게에 의해.
─끄아아아아아아!!
“내가 있으니 녀석들이 믿고 따라온 거다.”
이랑도 레빗도.
과거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지만 그들을 강제로 묶어둔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아니, 정확히는 묶어둘 수가 없었다고 보는 게 맞다.
고작 누군가를 도와주고 원하는 것을 이뤄주었다 한들 그 자를 위해 평생을 일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물론 대가는 치러야겠지만 그때의 나는 이미 대가를 받은 상태였다.
그러니 선택은 그들의 몫이다.
그리고.
“내가 이제 더 강하니 그만 꺼져라.”
─나, 날 죽이면 내 환각 속의 두 놈이!!
푸확!
“둘은 환각을 스스로 이겨내면 나오겠지.”
나는 로드리아가 짓뭉개진 자리를 바라봤다.
꽤나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남은 건 목걸이와 방패뿐 이었다.
그나저나…
“둘이 앉아서 뭐 하냐.”
“구경이요.”
“우리의 도움은 필요 없지 않았으냐.”
다윤이와 네메린느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주저앉아 싸움을 관람하듯 지켜보고 있었다.
네메린느는 기가 찬다는 듯이 말했다.
“설산의 고드름 정도로 잘도 싸우는구나.”
“그건 또 무슨 비유야.”
빙산의 일각도 아니고.
둘 다 비슷한 뜻이겠지만.
“그나저나 김윤. 나는 너를 다시 보았다.”
“응?”
히죽거리며 웃는 네메린느는 정말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있으니 녀석들이 믿고 따라온 거다. 라… 어떻게 이그네아보다 더한 수준의 말을 할 수가 있지?”
“...”
“그런 오그라드는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다니. 그건 너의 천재적인 재능이 분명하다.”
“...”
“너를 뭐라 하는 것이 아닌 정말 대단하다는 뜻에서─”
“닥쳐.”
철컥.
목걸이가 한차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네메린느의 모습이 변했다.
흰색과 검은색이 인상적인 젖소의 수인으로.
“아? 이, 이! 뭐 하는 짓이냐!”
네메린느가 분개하며 벌떡 일어났다.
수인이라지만 내가 볼 땐 그냥 젖소 잠옷을 껴입은 인간에 가까웠다.
귀가 뭉특히 올라와 있는 거랑 신체가 좀 커진 것을 제외하면.
“잘 어울리네. 그러고 있어라.”
“이, 이이이익!!!”
점잖은 태도를 버리고 발광하는 네메린느를 뒤로하고 다윤을 보았다.
“괜찮아? 가능하면 네가 잡게 해주려 했는데.”
다윤과 로드리아는 꽤나 악연이다.
초반부 고블린 지역에서 다윤은 한번 몸을 빼앗겨 베린을 날려버리고 나랑 제법 치열하게 싸웠다.
그로 인해 트라우마가 올라오고 꽤나 고생했었다.
또한 무려 9년이라는 시간을 환각 속에 갇혀있었다.
물론 복수하긴 했지만 9년은 제법 긴 시간이다.
다윤은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처음엔 화가 났어요. 저와 윤 씨를 함부로 말하는게.”
강해지기 위해 수련했다.
또다시 무력하게 당하지 않기 위해.
윤 씨 곁에서 당당히 한 사람의 몫을 차지하기 위해.
그렇게 강해지고 제대로 마주한 첫 번째 적이다.
“과거의 악연을 만나니 당황했지만 막상 싸우는 걸 보니 알겠더라고요.”
더 이상 저런 것에 휘둘릴 정도가 아니라고.
이제 그들은 자신과 김윤의 발목을 붙잡지 못한다고.
“그래서 괜찮아요.”
“음… 네가 괜찮다면.”
나는 다윤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줬다.
여전히 네메린느가 옆에서 소리를 질렀지만 무시하고 땅에 떨어져 있는 방패와 목걸이를 주워들었다.
“이들은… 환각 속에 있겠죠?”
“스스로 나와야지.”
주체인 로드리아가 소멸했기에 이들을 강제로 꺼내줄 방법이 없다.
나오는 방법은 단 하나.
스스로 환각을 깨닫고 빠져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영 갇혀 있으리라.
“우선 8층으로 가자. 문은 열어둬야 녀석들이 올라오니.”
환각 속과 이곳의 시간의 흐름이 어떻게 조정되어 있을진 모르지만 우선 열어둬야 이들이 1층으로 튕겨나가지 않고 올라올 수 있다.
나는 8층의 문을 열었다.
* * *